성명 | 박노일(朴魯一) |
본관 | 밀양 박씨 |
생몰 | 1894년 10월 11일 ~ 1963년 12월 28일 |
출생지 | 경상남도 함안군 여항면 여양리 (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여양리)[1] |
사망지 | 경상남도 함안군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박노일은 1894년 10월 11일 경상남도 함안군 여항면(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여양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조한휘(趙漢輝), 한종순, 이찬영(李讚榮), 조병흠(趙丙欽), 박건병(朴建秉)[2], 강기수(姜琪秀), 한관렬(韓灌烈)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시위 계획에 참여해 3월 19일 함안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했다. 이후 3월 19일 정오경에 함안읍내 봉성동에서 수백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오후 2시, 3천 명으로 늘어난 군중은 경찰주재소로 행진했다. 이때 이를 저지하기 위해 출동한 마산경찰서장 북촌(北村)과 현지 경찰들이 무력을 행사하려 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도끼, 몽둥이, 돌을 들고 주재소로 들어가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했다. 또한 경찰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주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했으나 경찰들이 응하지 않자 구타했다. 이후 군중은 군청 문을 부수고 청사 안으로 들어가서 군수 민인호(閔麟鎬)를 붙잡아 제복과 모자를 벗기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했다.
이후 군중은 등기소, 우편소, 일본인 소학교를 차례로 파괴했다가 마산 중포대병력 16명과 현지 경찰 연합대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이때 박노일도 체포되었지만 곧 탈주해 8년간 도피 생활을 하다가 통영 경찰서에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후 함안군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63년 12월 2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박노일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2004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