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박노창(朴魯昌) |
이명 | 박형남(朴馨南) |
생몰 | 1888년 12월 24일 ~ 1977년 5월 6일 |
출생지 | 경상도 문경현 신북면 평천리 (현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평천리)# |
사망지 | 서울특별시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박노창은 1888년 12월 24일 경상도 문경현 신북면(현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평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만주로 이주했고, 1914년 만주 통화현 이도구에서 동지들과 함께 동화학교(東華學校)를 설립하여 한인 자제들을 가르치면서 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노력했다. 이후 1919년 5월 대동단원 정남용으로부터 대동단의 결성 취지를 듣고 이에 찬동해 대동단에 가입했다.대동단은 김가진을 총재로 추대하여 황족, 유림, 종교, 상공, 노동, 청년, 군인, 부인, 보부상 등 전 사회 각 계층의 인사들을 규합하려던 조직으로서, 주로 각종 인쇄물의 인쇄·배포 등을 통한 독립사상의 고취와 동단의 선전 및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했다. 박노창은 이건호(李建鎬)의 집에 영동활판소(永同活版所)라는 비밀 인쇄소를 차려 놓고 정남용, 권헌복(權憲復), 이근고(李根高), 김용의(金用儀) 등과 함께 대동단의 기관지인 <대동신보(大同新報)>를 제작, 발행했으며, 대동단규칙 등 지하 문서와 각종 선전문을 인쇄, 배포했다.
이후 정남용의 지시를 받고 동지를 규합하고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대동신보', '대동단규칙' 문서를 소지하고 부산에 거주하는 구상서(具尙瑞)를 만나 그와 함께 선전물을 배포했다. 그러나 이 일이 일본 경찰에 탐지되면서 체포되었고,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정치범 처벌령 위반, 사기 등의 혐의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중 200일 본형에 산입)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77년 5월 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박노창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1995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