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박달준(朴達俊) |
생몰 | 1894년 1월 10일 ~ 1965년 3월 25일 |
출생지 |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중동 |
사망지 | 대구광역시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박달준은 1894년 1월 10일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중동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경남 합천의 해인사에서 승려로 지냈는데, 1919년 3월 31일 확생 대표 김봉신(金奉信)과 함께 독립선언서 1만매를 살포해 다수의 군중과 더불어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같은 해 4월 16일에는 결사대 제3대 책임자로서 해인사 입구에서 1만여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 그러다가 경찰이 자신을 체포하려 하자 간도로 망명했다.이후 1919년 11월부터 1920년 8월까지 서간도 유하현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수료하고 제1군정서지구 경비대에 편입되어 활동했으며, 1920년 9월경 해인사에서 동지들과 모임을 갖고 각지의 사찰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해 간도의 한족회(韓族會)로 송부하기로 협의했다. 그는 1921년 3월 4일 경북 문경군 금룡사, 대무사 등지에서 김봉진(金奉津) 등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했다.
그러나 얼마 안가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21년 5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대구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65년 3월 2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박달준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1992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