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70년대 연예계를 뒤흔들었던 대형 스캔들.2. 상세
박동명은 신앙촌으로 유명한 천부교의 교주 박태선[1](1917~1990)의 아들로, 당시 태광산업의 젊은 사장이었던 그는 국산차를 사는 것도 사치로 통하던 시절에 외제차만 여러 대를 가지고 있었고 미국 라스베이거스 같은 곳까지 가서 유흥을 즐기고 오는 등 상당히 방탕한 인생을 살아 온 것으로 유명했다.1975년, 당시 33세[2]였던 박동명은 외화밀반출 혐의로 그의 자택에서 구속되었다. 당시 미화 8만 달러를 빼돌리려다가 걸렸는데, 당시 물가로는 강남의 고급 아파트 세 채를 살 수 있던 거액이었다. 참고로 1975년 한국의 1인당 GDP가 617달러, 일본이 4674달러, 미국이 7801달러, 룩셈부르크가 8701달러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금액이었던 셈이다.
일단 검거 당시 현장에 신인 여배우 강모양이 함께 있다가 발각되었는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의 집에서는 고급 핸드백과 보석 200여 점, 그리고 그가 만났던 여배우의 목록이 무더기로 발견되었으며 그가 만난 여배우가 누군지 캐내고 싶어하는 기자들의 호기심으로 수많은 여배우들이 박동명의 애인으로 거론되었다.
3. 후폭풍
연예계에 끼친 파장이 상당했다. 당시 수많은 연예인들이 박동명의 여자로 거론되었는데[3] 그 중에는 1960년대 최고 미녀 김지미도 있었다. 여론은 김지미에게 "당신도 박동명과 놀았느냐?"며 추궁했지만 김지미는 "내가 왜 그런 망나니랑 놀아나느냐?"며 강력하게 부인했다. 당시 명보극장 사장 아들과 결혼할 예정이었던 최정민도 의심을 받았다. 최정민은 결백을 증명하고자 음독까지 시도하였으나 결국 파혼을 맞았다.그러나 이 사건으로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은 여배우는 바로 양정화였다. 드라마와 영화를 오고가면서 사실상 1세대 여배우 트로이카의 뒤를 이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배우였지만 박동명의 애인으로 지목되면서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고 모든 방송계약이 파기되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MBC 전속이었던 양정화를 TBC에서 헤드헌팅을 시도했지만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고 모기업인 중앙일보를 통해 보복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양정화는 적극적으로 소명했고 중앙일보를 상대로 1억 5천만 원대의 소송을 걸어 승소했으며 여론도 다시 우호적으로 돌아와 수많은 작품 제의도 받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김호선 감독의 겨울여자였다. 처음 양정화에게 주연 자리를 주려고 했지만 이미 이 사건으로 연예계에 환멸을 느끼고 은퇴를 마음먹었기 때문에 양정화는 출연을 고사했다.[4]
양정화의 몰락으로 반대급부로 수혜를 입은 배우들도 존재했다. 2세대 트로이카 정윤희, 장미희가 대스타로 만드는 데 아주 중요한 기여를 하였으며 방송 체계에도 큰 영향을 끼쳐 김자옥의 인기 상승에도 기여하게 되었다. 당시 MBC를 이끌어가던 쌍두마차 여배우가 양정화, 김자옥이었지만 양정화의 은퇴로 김자옥은 MBC의 원탑 배우가 될 수 있었다.
당시 청춘극장에 출연 예정이었던 강경희도 여기에 연루되어 주연을 맡을 수 없었다. 강경희 자리에 들어온 여배우가 바로 정윤희. 당시 정윤희는 데뷔작 '욕망'의 흥행 실패로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무명 여배우였으나 이 영화의 출연을 재도약의 기회로 삼았다.
그도 그럴 것이 청춘극장은 이전의 스타였던 김지미, 윤정희가 주연이었던 영화였던지라 시사성이 엄청났다. 비록 영화는 실패했지만 이 영화에 출연하여 정윤희는 대중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정윤희는 이 영화에 출연한 후 TBC에게 주목을 받아 발탁되어 쇼쇼쇼에 출연했고 동시에 당시 해태제과의 모델이었던 양정화가 몰락한 후 그 자리를 대신해 해태제과의 전속모델 자리를 쥐어 성공의 발판을 마련했다.
또 이 사건은 영화계를 겨낭해서 터졌기 때문에 수많은 영화배우들이 몰락하였다. 역설적이게도 이 사건은 당시 엄격하게 구분되었던 영화계와 드라마계를 하나로 묶는 데 기여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여배우 인력이 대거 감소하여 출신을 따질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많은 드라마 배우들이 영화계에 진출했으며 그 중 한 명이 안방극장의 트로이카인 김자옥이었다. 김자옥은 O양의 아파트 등의 흥행작을 내면서 2세대 트로이카가 연예계를 휩쓸던 시절에도 살아남은 배우가 되었다.
당시 박동명과 추문이 일었던 여배우가 100여 명이나 거론될 만큼 큰 파문이었고, 영화인협회는 박동명 사건에 연루되거나 비밀 요정에 출입한 여배우들을 내사해 13명을 퇴출시켰다.
4. 여담
- 사실 박동명과 같이 어울려서 자유분방(?)한 삶은 살던 친구들이 있었고, 이들을 언론에선 7공자라고 불렀다. 하지만 박동명을 제외한 나머지 7공자의 이름은 전혀 보도가 되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나온 적이 없다. 박동명 사건 정리
[1] 당시는 '예수는 개자식이다' 설교 전으로 박태선 장로라고 주로 지칭했다.[2] 상단 기사에는 31세로 기재되었다. 이는 세는나이로 33세이고 만 나이로는 31세일 가능성도 있으며, 당시에는 주민등록을 늦게 기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게 맞다면 1943년생.[3] 당시 '박의 엽색대상자 28인의 명단'이라는 출처불명의 찌라시가 나돌았다고 한다.[4] 이후 이 자리를 차지한 여배우가 TBC 출신 장미희였다. 결국 영화는 엄청나게 대박을 터뜨리면서 성공가도를 달렸으며 장미희는 이후 전두환 스캔들이 터지고도 인기를 구가하는 연예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