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국산 1위 흥행 영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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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여자 (1977) Winter Woman | |
감독 | 김호선 |
각본 | 김승옥 |
원작 | 조해일 |
제작사 | 화천공사 |
기획 | 김재웅 |
촬영 | 장석준 |
조명 | 정덕규 |
음악 | 정성조 |
편집 | 현동춘 |
출연 | 장미희, 신성일, 김추련, 신광일, 박원숙 |
상영일자 | 1977.09.27 |
상영극장 | 단성사 |
관람인원 | 585,775명[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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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미희 전성시대의 시작조해일 원작인 소설 겨울여자를 영화로 각색한 작품. 57만 명의 당시 역대 최다 관객 수를 동원하였고, 이 기록은 1990년 장군의 아들이 개봉하기 전까지[3] 14년 간 한국영화 최다 관객 수 흥행 타이틀을 쥐고 있었다.[4]이 소설의 여주인공인 장미희는 이 영화를 발판으로 삼아 신 트로이카의 일원이 되어 왕성한 활동을 했다.
한국영상자료원의 유튜브 채널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5])
2. 상영 이전
먼저 소설 겨울여자는 자유부인 못지 않을 정도로 당시의 여성관으로서는 큰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사랑하는 남자를 잃은 이화는 다른 남자를 위해 성적으로 개방적인 태도를 가지고 수많은 남자를 만난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화의 삶이 성녀의 삶인가 창녀의 삶인가에 많은 논쟁을 일으켰다. 이렇기 때문에 겨울여자는 상영 이전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처음에 제작진은 갓 박동명 사건에서 벗어난 인기스타 양정화를 주연으로 점찍었다고 한다.[6] 그러나 양정화는 이미 은퇴를 마음먹고 있었고, 양정화는 이화 역을 고사한다. 결국 여주인공은 TBC 출신의 신인 여배우 장미희를 기용한다. 김추련도 당시에는 무명에 가까운 신인배우였다. 겨울여자는 이렇게 배역부터 신성일을 제외하고 새로운 배우를 주연으로 기용하게 되었다.
3. 등장 인물
유이화 (장미희) |
민요섭 (신광일) |
우석기 (김추련) |
허민 (신성일) |
4. 줄거리
여고 3학년 유이화는 어느 날 자신의 정체를 숨긴 한 남자로부터 편지를 받게 된다. 그는 이화의 등하교길이나 외출하는 모습, 심지어 졸업식까지 따라다니며 관찰하고 계속해서 편지를 보낸다. 이에 두려움과 호기심을 동시에 느낀 이화는 편지의 출처를 찾기 위해 그 나름대로 주변을 살펴보지만 성과는 전혀 없었고 오히려 악몽을 꾸게 된다. 성당에서 편지를 보낸 당사자를 찾게 되지만, 흰 붕대 위에 붉은 탈을 쓴 남자였던 것.
대학 합격자 발표날 이화는 정체불명의 남자 민요섭과 드디어 마주하게 된다. 그들은 처음으로 다방에 마주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이화는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이후 요섭은 이화를 자신의 별장[14]에 데리고 간다. 그곳에서 요섭은 이화에게 다가가지만 이성 경험이 전혀 없는 이화는 요섭의 행동에 기겁을 하며 뛰쳐나간다. 이화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한 요섭은 자살을 시도한다. 요섭이 죽기 직전, 요섭 가족의 연락을 받고 찾아간 이화는 요섭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는다. 붕대로 둘러싼 얼굴 사이사이가 피범벅이 되어 있었기 때문.[15]이화는 요섭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이 일은 이화의 인생관을 크게 바꾸는 계기가 된다.[16][17][18]
대학에 진학한 이화는 2학년 재학 중에 우석기라는 정치학 전공의 대학생과 만난다.석기는 학생 운동을 하고 있는데, 다방에서 자기의 학우들과 학생 운동에 대한 토론[19]을 하고 돌아가던 길에 이화와 마주치고 첫눈에 반해 버스까지 쫓아가서 그녀를 유혹한다.석기는 취재부 신분을 이용해 이화에게 접근하고,두 사람은 어느덧 연인 사이가 된다. 둘은 빠칭코에도 가고 놀이 공원에도 가고 여관에도 가는 등 여느 연인들 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석기는 입대하고 이화는 힘들어하지만 석기의 친구들과 어울리며 그럭저럭 외로움을 극복해나가던 중에 석기는 휴가 1주일을 남기고 사망하게 된다. 석기는 외출에서 돌아오다가 교통사고로 죽은 것이었다. 그렇게 이화는 그의 뼛가루를 강물에 뿌리며 그와도 작별하게 된다.[20]
어느덧 대학 졸업반이 된 이화는 고등학교 시절의 은사인 허민과 우연히 만나게 된다. 만취한 허민이 몸을 가누지 못하자 이화는 그를 집까지 바래다준다. 이화는 아침을 차려주며 그와 대화를 나누던 중 허민이 이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21]옛 선생님의 처지를 알게 된 이화는 그의 집에 자주 드나들게 되고 같이 자전거도 타고 수영장에도 같이 다니는 등 두 사람은 한층 가까워지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이화는 허민의 집에서 하룻밤 자겠다고 하면서 그를 유혹한다. 이화는 욕실에 들어가서 옷을 모두 벗은 채로 있었는데,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허민은 욕실 문을 열어 이화의 벗은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허민이 사제 관계라는 이유 때문에 그녀의 알몸을 본 것에 죄책감을 느끼자 이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똑바로 보세요 선생님, 도망치지 마시구요. 지금 보신 게 제 참모습이에요. 제가 학생이란 점이 그렇게 중요하게나 생각되세요? 인간의 거짓없고 순수한 욕구를 그 때문에 억눌러야 할 만큼? 그게 그렇게도 큰 장애로 보이세요? 그건 마치 우체부는 사랑을 해서는 안된다는 거랑 뭐가 달라요? 전 아무개의 제자가 아닐 수는 있지만 사람이 아닐 수는 없어요. 전 대학 졸업반 학생이 아닐 수는 있지만 이화라는 한 여자가 아닐 수는 없어요. 선생님 왜 보다 중요한 사실보다 중요하지 않은 사실을 보려고 하세요? 전 선생님이 가엾어 죽겠어요.
- 이화
라고 말하며- 이화
하루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도 받지를 않아 그의 집에 베란다를 타고 들어간다.[22] 방은 널부러져 있었는데 욕실에 가니 허민은 자살 시도에 실패한 채로 욕실에서 기절해 있었다.
[23]
둘의 관계가 지속되자 허민은 이화와 결혼할 생각을 하게 되지만,이화는 거절한다. 오히려 이화는 그의 전처가 [24]운영하는 의상실에 찾아가 전처와 허민이 재결합하도록 도와준다.후에 도로가를 걸으면서 옅은 미소를 짓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5. 기타
당시 유신정권 하에서 침체기를 걷던 한국 영화의 사정에도 불구하고, 58만명의 관객을 동원해 이전의 국산 영화 최고 흥행 기록이었던 1974년에 상영한 관람인원 46만 명의 별들의 고향의 기록을 뛰어넘었다. 단성사(5,590석)에서 34일간 하루 5회 상영했는데 전 회 매진이었다고 한다. 부산에서는 동명극장에서 상영하였는데, 여기서도 상황은 비슷했다.이러한 겨울여자의 성공은 일시적으로 한국 영화에 부흥을 일으켰지만, 당시 유행하던 일명 '호스티스물(物)'의 유행을 극복하지는 못했다.[25] 유명한 여배우 벗기기가 주 내용인 호스티스물[26]의 범람으로 인해 겨울여자의 흥행으로 인한 한국영화계의 부흥도 일시적으로 끝나게 되었고, 전두환 정권의 집권과 그로 인한 정치적 혼란으로 한국 영화계는 소위 3S 정책 시대의 암울한 80년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원래 장미희는 당시 별들의 고향 2와 겨울여자 2에도 출연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영화배우가 아니라 공채 탤런트 출신이었던지라 이에 반감을 가진 영화계에서 장미희의 겨울여자 2 출연을 거부하여 별들의 고향 2에만 출연하게 되었다. 1983년에 개봉된 겨울여자 2는 김지영이 대신 여주인공을 맡았는데 서울관객 4만 7천명이란 처참한 흥행을 거두며 망했다. 영화계의 자업자득인 셈.
김추련(1946~2011)은 80년대에는 제법 흥행배우였으나 잊혀졌고 2011년 스스로 목을 메어 자살했다. 우울증 및 사업실패로 인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아울러 김추련의 목소리 성우는 유강진, 신성일의 목소리 성우는 이강식#이 맡았다[27]
[1] 순수 한국영화로는 송재호, 유미나 주연의 여자들만 사는 거리.[2] 제작사가 집계한 바로는 635,693명이라고 한다.[3] 비공식적으로는 영구와 땡칠이가 개봉할 때까지인데, 장군의 아들 1편도 영구와 땡칠이도 모두 1990년작이다.[4] 58만 명이라는 기록은 서울 개봉관 한곳의 관객수를 센 것이어서 서울 재개봉관 관객수와 지방 관객수는 포함되지 않았다. 지금 기준으로는 천만 명을 넘었을 관객 동원을 기록한 것이다.[5] 성인용 영화이기에 연령 제한이 걸려 있다.[6] 박동명 사건 이전에 1세대 트로이카의 뒤를 이을 여배우 후보로 가장 유력했던 당대 인기 여배우이다.[7] 하지만 영화에서는 신성대학이라는 가상의 학교에 재학중이다.[8] 요섭과 석기는 죽고, 허민과는 이어지지 못했으니 말이다.[9] 지금 기준으로는 스토커.[10] 이화의 졸업식에도 찾아가 몰래 이화의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은 이후 편지에 동봉.[11] 성관계를 말한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저 이화의 무릎에 얼굴을 묻는 정도로 끝나는데, 순진한 이화는 겁에 질려 도망친다. (...)[12] 배경이 신촌이고 연세대학교의 응원 구호를 변용한 구호가 나오는 걸 보면 연대를 본뜬 듯 하다. 그런데 정치학과라는 걸 보면 서울대일 가능성도[13] 현재 시점에서 보면 대학생임에도 굉장히 나이가 들어보인다. 당시 김추련의 나이는 31세로 70년대임을 감안해도 나이 치고는 꽤 노안이었다.[14] 별장 이름은 청평별장.[15] 이전에 꾼 꿈은 사실 복선이었던 것.[16] 성이라고는 전혀 모르던 순진한 쑥맥 여학생에서 개방적인 성의식을 가진 여대생으로 변모.[17] 영화에서 요섭은 소심한 탓에 그저 이화의 무릎에 얼굴을 묻는 정도의 시도(?)만 한다. 그러나 순진한 학생 이화는 기겁하며 도망친다.[18] 사실 요섭이라는 이름은 기독교 계열 이름인데 정작 장례식은 불교식으로 지낸다(…).[19] 이 때 나오는 노래가 김세화&이영식의 '겨울 이야기'이다.[20] 이때 나오는 노래는 김세화의 '눈물로 쓴 편지'.[21] 허민의 전부인은 교사인 그의 벌이가 자신의 성에 차지 않는다는 이유로 결혼 6개월만에 그를 떠나버렸으며, 이에 허민은 7년 동안 독신생활 중이다.[22] 실제로 굉장히 장미희가 찍기 위험한 장면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장미희는 대담하게도 촬영을 강행했다고 한다.[23] 현 서울 이촌동이다.[24] 배우 박원숙이 출연, 이름은 강윤희.[25] 겨울여자의 흥행 이후로 호스티스물이 범람했다는 얘기는 어폐가 있다. 이 영화보다 영자의 전성시대가 훨씬 먼저다.[26] 이러한 호스티스물에서 가장 관심을 받았던 여배우가 당대 최고 미녀였던 정윤희였다. 이외에도 유지인, 김자옥 등도 이러한 흐름에 편승하여 흥행에 상당히 성공을 했다.[27] 이 기사에서는 해당 배역 성우가 유광진, 이광식으로 나오지만 유강진, 이강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