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暹
(? ~ ?)
1. 개요
고려의 인물. 무안현 출신이다.2. 생애
현종 원년(1010) 요성종이 친정한 제2차 여요전쟁 때 안북도호부사 병부시랑의 관직에 있었다. 거란군은 통주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곽주(郭州, 평안북도 곽산군)를 지나, 평안남북도를 나누는 청수강(淸水江, 청천강)에 이른다. 박섬은 청수강 이남의 영주(寧州, 평안남도 안주시) 안북대도호부에서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거란군이 가까워지자 성을 버리고 개경으로 도망친다. 도호부사 박섬의 도망에 영주의 백성들도 모두 흩어졌으며 거란군은 그대로 서경으로 진군하게 된다.안북에서 개경으로 돌아온 박섬은 남아있던 가족들을 이끌고 그대로 고향 무안현으로 간다. 무안으로 향하는 길에 박섬은 나주로 몽진하는 어가와 지채문 등 호종하는 신하 일행을 마주치고 자연스럽게 일행으로 따라간다. 어가가 삼례역(參禮驛)에 이르렀는데 전주절도사 조용겸이 역참에 나와서 어가를 맞이했다. 그런데 조용겸은 형식을 갖추지 않은 야복(野服) 즉 평상복 차림으로 왕을 맞이하는 무례를 범했다. 이를 본 박섬은 "전주는 곧 옛 백제 땅으로 성조께서도 역시 이곳을 싫어하셨습니다. 청컨대 주상께서는 행차하지 마십시오."[1]라고 아뢨고, 현종은 박섬의 말에 따라 장곡역(長谷驛)에 머무른다.
박섬은 어가가 나주에 이르렀는데도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하고 나주를 떠나버린다. 곧 하공진이 거란군이 철수했다는 문서를 들고 나주에 이르렀고 현종 2년(1011) 어가는 다시 개경으로 향한다. 돌아가는 길에는 어가(御駕)가 전주에서 7일을 머물렀는데 박섬은 철수 소식을 듣고 전주에 가서 현종을 알현한다. 덕분에 호종한 신하들에게 관직을 내릴 때 박섬도 사재경에 임명되는데, 이에 대해 사람들의 비난이 많았다. 이 해 9월 장작감에 임명되며 이후 상서우복야에 오른다.
문종 6년(1052) 5월 현종을 호종한 점이 조명돼 박섬의 초상이 공신각에 그려진다.
지난 통화연간에 나의 돌아가신 아버지 현종이 산남에 피난하셨다. 그 때 상서우복야 박섬이 고삐를 잡고 호종하여 매우 부지런하게 일했으며, 경성을 수복할 때도 시종일관 사직을 안정시켰다. 공신각에 그림을 그려 후세 사람들에게 보이도록 하라.[2]
문종이 무오일에 내린 제서.
문종이 무오일에 내린 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