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a0> 출생 | 1836년 12월 23일 |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대제리 | |
사망 | 1912년 7월 14일 |
경상북도 예천군 | |
본관 | 함양 박씨 |
자 | 계우(啓宇) |
호 | 나암(羅巖)·침천(枕泉) |
상훈 | 대통령표창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박주학의 친형이다.2. 생애
박주대는 1836년(헌종 2) 12월 23일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대제리에서 박득녕(朴得寧)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 부친에게 글을 배웠고, 20세 때 족숙(族叔)인 박기령(朴箕寧)의 문인이 되었다. 1872년 향시에 응시하여 장원 급제하였고, 이듬해인 1873년(고종 10) 식년시 진사시에 응시해 3등 29위로 급제했다.# 그러나 과거제도가 문란한 것을 보고 출세를 단념하고 향리에 응거하여 성리학을 연구하는 한편, 예약, 음양, 복서, 지리, 의약 및 제자백가 등 여러 학문을 익혔다.1882년 왕세자의 관례(冠禮)를 기념하여 과거가 실시되자, 그는 이에 응시하고자 상경했으나 곧 매관매직이 성행하는 등 문란한 정치에 실망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1884년 백의를 금한다는 명령이 내려지자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권경하(權經夏)·황재영(黃在英) 등과 문산사(文山社)에서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고 고례(古禮)의 수호에 앞장섰다. 또 향시의 시관이 되기도 하고, 향교의 교수직을 맡아 학자와 인재를 많이 배출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 단발령이 잇달아 발발하자, 그해 2월 6일 예천 사림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당시 병이 들었던 그는 아우 박주학을 대신 보내고 자신은 창의통유문(倡義通諭文)을 지어 유문(儒門)에 보냈다. 그리고 안동 의병장 권세연을 비롯하여 이강년(李康秊)·서상렬(徐相烈) 등 의병장을 지원하였다.
1898년 예천군수 이인성(李寅聲)을 도와 교궁(校宮) 개혁 사업에 참여하였으며, 1901년 예천군에서 향약을 베풀 때 약정(約正)으로 추대되었다.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시를 지어 비애를 토로했다. 이후 가재를 털어 독립운동을 후원하는 등 일련의 활동을 전개하다 1912년 7월 14일에 사망했다. 그의 유고인 <나암수록(羅巖隨錄)>은 1867년에서 1910년까지 시국 정황에 따른 중요한 사건과 관련된 자료들을 실어 사료적 가치가 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박주대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