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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해의 예식, 궁중예악으로 추정되는 음악. 현재는 그 형태와 내용이 완전히 멸실되어 전해지고 있지 않는다.2. 상세
渤海副使 己珍蒙 등의 歸國
二月己未 己珍蒙等還國
(740년 기미년 음력 2월 2일)
2월 기미 기진몽 등이 본국으로 돌아갔다.
속일본기 13권 天璽國押開豊櫻彦天皇 聖武天皇 渤海副使 己珍蒙 등의 歸國
二月己未 己珍蒙等還國
(740년 기미년 음력 2월 2일)
2월 기미 기진몽 등이 본국으로 돌아갔다.
속일본기 13권 天璽國押開豊櫻彦天皇 聖武天皇 渤海副使 己珍蒙 등의 歸國
발해의 국립 음악기관인 태상시(太常寺)[1]의 사신으로 갔던 기진몽(己珍蒙) 일행이 740년 정월에 발해의 음악을 연주한 것이 발해 음악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자 시작이다. 아마 이 연주를 계기로 발해의 궁중음악이 왜에 알려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발해 음악이 일본 조정에 전해져 최초로 연주된 것 해가 바로 749년.[2] 당시 일본의 대사찰이었던 도다이지에서 개최된 불교 법회에서다. 이 기록을 통해서 발해음악이 불교와 연관성이 있다고 추정되고 있으며, 바로 이 시기에 발해의 궁중음악이 비로소 정식으로 일본 궁중음악 중 하나에 속하게 되면서 발해의 사신들을 성대하게 맞이할 때 자주 공연되었다. 그리고 일본황실의 조정에서는 신흥강자로 떠오른 발해의 음악들을 직접 배워 올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발해에 유학생을 파견한 적도 있었다. 이러한 발해의 음악은 발해가 멸망한 뒤에도 여러 나라들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서, 후에 중국 내륙 지역의 송나라와 연해주, 만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금나라에 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송나라에서는 효종때인 1185년 3월에 발해음악을 완전히 금지해버리는 이상하고 갑작스러운 조치를 취하였다. 그래서 송나라에서는 안타깝게도 발해악이 전승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금나라에서는 '발해교방'이라 하는 기관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발해의 음악이 제도적으로 계속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금나라의 멸망 직후, 발해의 음악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으며, 이후 현재까지 발해음악은 고구려, 신라 음악과 달리 상당수 묻히게 되었다. 그러나 발해의 악기구성을 추측할 수 있는 유물과 기록들은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인 점이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발해의 공주였던 정효공주가 묻힌 무덤의 서쪽 벽에 그려진 악사 그림 속 보자기에 싼 악기들의 모습이다. 보자기에 들어 있기 때문에 어떠한 악기인지 알 수 없지만, 외형으로 보아 박판을 비롯한 수공후[3]와 비파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발해는 송나라 때에도 사용된 발해금(渤海琴)이라 하는 악기도 독자적으로 존재하였다고 하지만 현재 그 모습은 알 수가 없다.
[1] 발해의 중앙 관청에 속해진 궁중행사와 제사를 관장하던 기구. 여러 기록에 따르면 당나라와 왜에 악단을 보낼 때에는 항상 태상시의 악사를 보냈다고 기록되어져 있었다. 이 때문에 발해악은 상당한 수준을 갖춘 발해 악사들만이 연주할 수 있었던, 발해의 궁중음악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으나 현재 그 자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다.[2] 이 해는 일본의 불교사에서 현재까지 주목받는 승려 중 한명인 교키가 죽은 해였다.[3] 수공후의 경우에는 비단으로 추정되는 보자기 밖으로 갈색을 띈 긴 자루가 나와 있고, 이 자루 위에는 꽃잎 모양의 매듭이 져 있으며, 이 중 두 개의 매듭의 끈이 아래로 늘어뜨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