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방환(方環) |
자 | 형규(亨奎) |
본관 | 온양 방씨[2] |
출생 | 1886년 12월 9일 |
함경도 부령도호부 동면사 마전동[3] (現 함경북도 청진시 마전동) | |
사망 | 사망년도 미상 |
사망지 미상 | |
상훈 | 건국포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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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6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2. 생애
1886년 12월 9일 함경도 부령도호부 동면사 마전동(現 함경북도 청진시 마전동)에서 아버지 방순악(方舜岳, 1854. 9. 3 ~ 1904. 8. 20)과 어머니 울진 장씨(蔚珍 張氏)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4년 아버지 방순악이 별세하자 청나라 길림장군(吉林將軍) 연길청(延吉廳) 화룡욕분방청(和龍峪分防廳) 명신사(明新社)[4] 충신장령(忠臣場嶺)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농업에 종사하며 서당을 운영해 아동들에 대한 민족교육에 힘쓰는 한편, 의원 노릇을 하며 이웃들을 보살폈다.이후 길림성 연길도(延吉道) 화룡현(和龍縣) 덕화사(德化社) 유동(柳洞)[5]에서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 총재 이범윤) 소속 의군단(義軍團) 유동사무소장 방준규(方俊奎)의 권유로 의군단에 입단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후 대한의군부 서부지방 총리분국장(總理分局長)에 임명되었고, 1920년 8월 26일 연길도 왕청현에 주둔 중이던 대한의군부 중대장 허근(許根)의 지시에 따라 허근이 보낸 서부지방부장 이범모(李範模)와 함께 조선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할 계획에 대해 협의했고, 이어 이범모에게서 대한의군부의 사무분장(分掌)규칙, 참리부임시지방제(參理部臨時地方制), 군법, 의연금 영수증 및 지원서, 대한민국총부 취지서, 유고문(諭告文), 격고문(檄告文), 의연금 모집령(募集令), 동부 산포대(東部山砲隊) 소식, 통고문(通告文), 훈령(訓令) 등의 대한의군부 관련 문서들을 전달받았다.
중국인으로 변장하기 위해 변발까지 한 그는, 1920년 8월 29일 화룡현을 출발해 그날 밤 함경북도 무산군 읍면(現 무산군 무산읍) 부근의 두만강 상류 약 5리 가량되는 얕은 여울에 도착했고, 맨몸으로 여울을 건넌 뒤 10리에 걸쳐 산길을 지나 무산군과 회령군 사이를 관통하는 길로 나왔다. 이어 회령군 근처 두만강 하류 약 2리되는 수성천(輸城川)을 건너 부령군과 청진부 사이에 있는 다갈령(多葛嶺, 487m)을 넘어 부령군 부거면에 도착해 며칠 전 이범모에게서 전달받은 문서들을 주민들에게 배포하고 군자금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군자금 모집 활동에 박차를 가하던 그해 9월 4일 오후 3시에 부령군 부거면에서 약 20리 가량 떨어진 이방령(梨方嶺)에서 청진경찰서 부거주재소 소속 타카하시(高橋) 순사와 조선인 순사 1명의 불심검문을 받았고, 대한의군부 사무분장규칙 등을 싼 보자기에 대해 조사를 받던 중 도주했다. 그러나 끝내 붙잡혀 체포되었고, 곧 청진경찰서에 송치되었다.
1920년 9월 10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 검사분국에 송치되었다. 1920년 9월 22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이른 바 정치에 관한 범죄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형을 선고받아 이에 공소했으나, 같은 해 10월 2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 바 정치에 관한 범죄 혐의에 대해 공소가 기각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행적 및 사망년월일, 사망지에 대해서는 자료가 미비해 알 수 없다.
201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 1920년 9월 20일 동아일보 기사에는 方[2] 판서공파(判書公派) 36세 정(正) 항렬.[3] 온양방씨중앙종친회 근현대인물.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함경북도 부령군 부거면 마전리가 되었다.[4] 現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화룡시 둥청진(東城鎭) 밍신촌(明新村).[5] 現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화룡시 난핑진(南坪鎭) 류둥촌(柳洞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