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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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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사도
1.1. 공동체의 수호자1.2. 전문 군인1.3. 용감한 군인1.4. 무고한 살인자1.5. 근대 지식인들의 편견
2. 행정
2.1. 정부 수입2.2. 전비2.3. 군사 모집2.4. 보급
3. 전략
3.1. 첩보3.2. 의사 결정
4. 전술
4.1. 습격전4.2. 공성전4.3. 수성전4.4. 야전
5. 개인 전투
5.1. 기병5.2. 보병5.3. 궁병
6. 무장
6.1. 1기 (1337~1360)6.2. 2기 (1360~1389)6.3. 장기 휴전 (1389~1415)6.4. 3기 (1415~1431)6.5. 4기 (1432~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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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사도

1.1. 공동체의 수호자

기사 신분은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고귀한 혈통을 가졌기에 기사가 된 것이 아님을 이해하라.
모든 사람은 한 남자와 여자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질투와 탐욕이 자라나고,
무력이 정의를 억누르기 시작했을 때도,
모든 사람들의 집안과 신분은 동일했다.

하지만 약자들이 더 이상 강자들에게 저항할 수 없게 되자,
공동체는 약한 사람들과 온순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강한 사람들의 범죄와 잔학 행위를 규제하기 위해 수호자 계급을 만들었고,
자신들 가운데 가장 평판이 좋은 사람들을 선출했다.
그들은 크고, 강하고, 잘생기고, 민첩하고, 충실하고, 용맹하며,
정신과 육체가 모두 우수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기사 신분은 장난삼아 헛되이 주어지지 않았고,
그것을 받은 사람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이 지워졌다.
그게 무엇인지 아는가?
최초로 기사 신분이 만들어졌을 때,
기사가 되기를 희망했고, 선거에 의해 그 특권을 부여받은 사람들은,
비열하고 잔혹하게 행동하지 않으며,
관대하고, 예의 바르고, 친절할 것을 맹세했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그들을 도우며,
강도와 살인자들을 무찌를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을 요구받았다.
작자미상, '랑슬로', (c.1200)
비록 현대에는 여러 신분들이 있지만,
태초에 모든 인간은 똑같은 자유를 가진 자유인이었다.
우리 모두가 한쌍의 남자와 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구가 늘어나고, 오늘날에도 그렇듯이 지나친 자만심과 질투로 인해 원한과 전쟁이 발생하기 시작했을 때,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스스로를 위대한 군주라고 생각한다면 평화롭게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들 가운데서 왕을 선출해서 군주로 삼았다. 그리고 법을 만들고 질서를 유지할 수 있도록 그에게 잘못을 저지른 자를 처벌할 권력을 주었다.
또한 왕이 공동체의 적들과 사악한 관료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도록, 자신들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강하고, 현명한 자들을 선출해서 봉신으로서 왕을 도우며 평화를 지키는 영주들로 삼았다.
그렇게 해서 귀족이라고 불리는 신분이 만들어져 지금까지 전해진 것이다.
Beaumanoir, 'Coutumes de Beauvaisis', (1283), 45장 1453절
이러한 이유로 가장 훌륭하고 가장 고귀한 기사 신분이 형성되었다. 이는 전쟁의 위험으로 항상 가장 큰 피해를 입는 보통 사람들을 보호하고, 안전을 지키며, 방어하기 위함이다.
장 드 뷔에이, '르 주벵셀', (c.1466). 서문

1.2. 전문 군인

농사 기술을 익힌 농민과 상업 기술을 익힌 상인처럼, 기사는 전쟁 기술을 익힌 군사 전문가다.
전쟁 기술은 교묘함과 교활함의 예술이다. 따라서 초보자는 그 예술을 완전히 익숙해질 때까지 단계적으로 배워야 한다.
그리고 전쟁 기술에서의 우수성과 명예는 행운의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어떤 경력보다 더 확실하고 더 큰 성공을 약속한다.
물론 나는 다른 직업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모든 기술은 잘 훈련된 사람에 의해 추구될 때 큰 성공을 제공한다.
르 주벵셀, 서문

계략과 속임수를 사용하는 것은 기사도와 완전히 양립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심지어 칭찬 할만한 것으로도 간주되었다. 중요한 것은 중용이었다. 도를 넘게 비겁한 짓을 하고도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다면 망신을 당할 수 있었다.
매우 영리하고 교활한 사람인 크라토르의 대장은 공포에 질린 척하며 자신의 병사들을 급히 불렀고, 몇몇 기병들에게 마치 통제 불능인 것처럼 멀리 도망치도록 했다.
그것은 에스칼롱의 주둔군을 더욱 공격적으로 만들었고, 그들은 크라토르의 대장이 이미 전의를 잃었다고 여기며 공격하기 위해 나왔다. 그들은 그가 전투에서 패배했다고 생각하며 그를 추격했고, 대장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치는 척 돌아서 달렸다.
그래서 에스칼롱의 병사들은 교활한 대장을 점점 더 급하게 추격했고, 대장은 복병을 부를 적절한 순간을 판단해 신호 나팔을 불었다. 그것은 주벵셀과 로케통 경과 합의된 신호였다.
르 주벵셀, 2권 7장

1.3. 용감한 군인

강한 힘과 공격성보다 중요한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다.
언젠가 이방 민족의 족장들은 전장에서 앞장서서 싸울 전사를 선발하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석공, 목수, 대장장이 같은 수공업자들을 전장으로 보내자. 그들은 강하게 후려치는 일에 익숙하며, 거대한 바위를 부수고, 굵은 나무를 쪼개고, 단단한 쇠를 두드려서 부드럽게 만드는 자들이다. 그들을 전열 앞에 세워서 강하게 내지르고 후려치게 하면 우리의 적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수공업자들에게 좋은 갑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준 채 싸움터로 보냈다. 하지만 그들 중 일부는 행군 도중 지쳐 쓰러졌고, 또 일부는 겁에 질려 도망쳤고, 남은 이들 역시 두려움 때문에 제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 수공업자들의 군대는 전투에서 패배했다.
족장들은 실수를 인정하고, 이번에는 도살업자들을 장수로 삼았다. 도살업자들은 강한 산짐승과 거대한 황소를 도축하며, 잔혹하고 무자비하고 피를 보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족장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들은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후려쳐서 지난 일의 복수를 완수할 것이다."
그들은 도살업자들에게 좋은 갑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준 채 전열 앞에 세웠다. 하지만 도살업자들 역시 용기를 잃고 도망가버렸고, 족장들의 계획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다음번 전투에서 족장들은 높은 곳에 하인들을 보내서 전장을 관찰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우며 강하게 후려치는 용사들을 찾아오게 시켰다.
전투가 끝났을 때 족장들은 용사들을 불러모았고, 모두에게 전공에 걸맞은 칭찬과 명예를 주었다. 그리고 그들을 군대로 편성하면서, 무기와 갑옷을 정비하고 말을 돌보는 것 외에는 관심 갖지 말고, 군인으로서의 일 말고 다른 일을 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들을 위해 세금이 징수되기 시작했고, 이 제도가 아주 훌륭한 것이라는 사실이 곧 입증되었다. 모든 백성들은 그들을 사랑하고 존경했고, '의인(義人: good man)들'이라고 불렀다. 의인들은 자기 일에만 전념하며 그 일에 능숙해졌다.
의인들 중 한 명이 전장에서 싸우다 전사했을 때는 동료들이 다 함께 애도하고, 죽은 이의 자식들을 거두어서 훌륭하게 길렀다. 그리고 그들과 그들의 어머니에게 원래 그들의 아버지에게 속했던 특권과 다른 모든 것을 돌려주어 죽은 아버지와 똑같은 삶의 방식을 따르게 했다.
훗날 그들은 '의인의 아들', 또는 '좋은 집안의 아들'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반면에 불명예를 안거나 악행을 저지른 자들은 '누구의 아들도 아닌 자'라고 불렸다.
의인으로 선택된 자들은 소수였고, 이들은 전장에 나갈 때면 각자 열 명의 병사를 맡았다. 이들은 부하들이 더 잘 싸울 수 있도록 이끌었고, 실제로 한 명의 의인의 용기와 지휘 덕에 전투에서 승리하거나 요충지를 방어하거나 점령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의인 열 명을 이끄는 대장도 있었고, 이들은 백 명의 대장이었기에 백인대장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백인대장 열 명의 대장으로 선출된 사람도 있었으며 밀레스 또는 기사라고 불렸다. 그리고 60명의 백인대장과 600명의 의인과 6,000명의 병사를 이끄는 자는 공작이라고 불렸다.
구티에레 디아즈 데 가메스, '페로 니뇨의 연대기' (c.1448)

대담함 없이는 어떠한 작전도 시작될 수 없다.
적이 요새처럼 좁은 지형에 배치돼 있다 해도 공격하고 싶어지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본능이다. 그리고 그것은 공격이 잘 계획되고 침착하게 진행될 경우 합리적인 판단이다.
전쟁에서는 대담함(필수적이다. 대담함 없이는 어떠한 작전도 시작될 수 없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위기 속에서의 냉정함, 그리고 전투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전투 전에 미리 예측하는 능력이다. 전투의 열기 속에서는 생각을 정리할 여유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훌륭한 지휘관은 가능한 모든 문제들을 미리 예측하고 대비해야 한다. 그래야 위급할 때 열정적이고 공격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열정적인 대응의 기반에는, 전투 전 미리 생각한 정교한 전술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열정적인 대응은 차가운 성찰에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르 주벵셀, 2권 11장

귀족은 곧 '싸우는 자'이다.
하지만 진정한 용기는 전장에서의 행동으로 측정된다. 군인이 군인을 대면할 때, 누가 더 대담한지 즉시 명백해진다. 군인이 군인을 대면할 때, 그것은 이기거나 죽는 문제이다. 그것이 그러한 상황에서 용감하게 행동하고, 굳건하게 서 있는 결심을 칭찬할 수 있는 이유다. 그렇게 하는 자들은, 그들의 신분이 무엇이든, 그들이 비난받을 일이 없고 그들의 행적에 흠결없다면 항상 기사 작위를 받을 자격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은 당신 앞에 있는 능숙한 중장병을 보고, 당신과 그 사이에 있는 것이 서로에게 가할 타격뿐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전투가 명예와 용기의 최고의 척도라고 주장하는 이유이며, 그곳에서 귀족의 혈통이 아닌 사람도 귀족으로서의 지위에 도달할 수 있는 이유다.
르 주벵셀, 2권 22장

1.4. 무고한 살인자

민간인 학살은 비극이지만, 그 살인의 책임은 부당하게 전쟁을 일으킨 위정자들에게 있다.
왕세자가 지나갈 때 주민들이 무릎꿇은 채 '자비를, 고귀하신 전하, 자비를' 이라고 외치며 울부짖는 것을 보는 것은 가슴이 찢어지는 일이었다. 그는 너무 분노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침략자들은 아무도 그들의 호소를 듣지 않으며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람을 칼로 찔렀다. 이 사람들은 도시의 반역과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실제로 책임이 있었던 큰 인물들보다 더 큰 대가를 치렀다. 그날 리모주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하느님의 이름을 기억했다면, 거기에서 일어난 비극에 대해 울지 않았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프루아사르,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c.1400)

전쟁과 살인은 나쁜 것이지만, 정당한 이유로 시작한 전쟁과 전쟁의 관습에 따른 살인은 무고하다.
세상이 시작되었을 때, 하느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신 후, 자연의 질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전쟁이 그 평화를 깨뜨렸다. 자연적인 동맹이자 형제인 카인과 아벨 사이에 말이다.
그리고 창세기의 두 번째 장에서 설명하듯이, 그 전쟁은 시기심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창세기는 무시무시한 전염병의 탄생이 단 한 사람에 의해 일어나고 촉발되며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것은 널리 퍼지고, 세대가 성장하고 번성함에 따라 배가되었다.
이에 따라 세상 모든 곳에 불화와 분쟁이 생겨났다. 어떤 곳에서는 사라진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동안 다른 곳에서 재발하며 장기화된 전쟁으로 균형을 맞춘다.
전쟁은 악한 사람들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선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쉽게 일어날 수 있다. 물론, 부당하게 전쟁을 선포하는 사람은 악하다고 말해야 하지만, 정당한 이유로 전쟁을 시작하는 경우는 비난받을 수 없다.
장 드 뷔에이, '르 주벵셀', (c.1466). 서문

1.5. 근대 지식인들의 편견

1919년에 출간된 요한 하위징아의 <중세의 가을>은 기사도를 소수 귀족들을 위한 퇴폐적인 가식, 잔인하고 짧은 삶에서 위안을 얻기 위한 공상과 허례 허식에 불과한 것으로 묘사했다.
중세 끝 무렵 문명은 이 시각으로 다가가야 하는 문화이다. 이상적으로 꾸며진 귀족계급의 삶, 그 삶을 비추는 기사도의 낭만적인 인공조명, '원탁의 기사' 이야기로 모습을 바꾼 세계까지, 삶에 있어서 양식과 현실 사이의 긴장감은 격렬하다. 빛은 모조품으로 번쩍거린다.
요한 하위징아, '중세의 가을'

역사학자들이 19세기의 편견에서 벗어나 중세 전쟁의 현실과 기사 계층과 기사도 그 자체를 객관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부터였다. 하위징아가 단정한 것과 달리 기사도는 현실과 동떨어진 가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고, 소수 귀족뿐 아니라 사회 각층에서 진지하게 수용되었다. 당대의 많은 작가들이 기사도의 이상이 현실에 적용될 때의 모순을 예리하게 인식하고 해결법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우리는 중세 세속 귀족 계층의 중심 이념인 기사도가 받은 조롱과 같은, 무지에 바탕을 둔 비판을 경계해야 한다.
한때 위선적이고 시대착오적이라는 조롱을 받았지만, 이제 우리는 기사도적 이상이 당대인들 사이에서 순수하게 수용되었으며 전사들의 훈련과 동기부여, 그리고 사회적 응집력의 원천으로서 유용한 기능을 제공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비록 그러한 이해가 우리를 과거의 이상에 대한 무비판적인 존경으로 이끌거나, 현대의 삶에 부활시키려는 운동으로 이끌어서는 안 되지만, 그것은 낯선 사고방식들을 무지에 근거해 배척하는 실수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
Christopher Dyer, 'Standards of Living in the Later Middle Ages'

2. 행정

2.1. 정부 수입

  • 백년전쟁 기간 동안 잉글랜드 정부는 잉여소득에 대한 직접세와 수출입에 대한 간접세로 거의 930만 파운드를 조달했다. 따라서 잉글랜드의 전쟁세 수입은 연 79400파운드 이상이었다.
  • 프랑스에 원정군을 파견하기 위해서는 10만 파운드가 필요하므로 잉글랜드 정부는 GDP의 2-3%를 조달해야 했다. 잉글랜드의 조세 수입은 1416년에 GDP의 3.4%, 1354년에는 3.5%, 1378년 4.5%, 1339년 5.9%에 달했다. 이는 현대 기준으로는 높지 않아 보일 수 있으나(2015년 기준 잉글랜드 세입은 GDP의 32.5%, 프랑스는 45.2%), 당시 중세 행정부의 입장에서는 인상적인 성과였다. 프랑스의 경우 1461년 노르망디의 세입이 추정 GDP(농업 일당에서 추정)의 약 2.6%를 차지했다고 추정된다.
  • 중세 후기 잉글랜드의 가장 부유한 두 왕은 에드워드 2세와 리처드 2세로, 이들 모두가 퇴위당할 당시 재무부에 상당한 액수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가장 성공적이고 존경받는 중세 국왕 중 두 명인 에드워드 1세와 에드워드 3세는 항상 부채에 시달렸다. 인기 있는 왕은 의회로부터 과세 허가를 확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으므로 막대한 현금을 비축할 필요가 없었다.
    1343년 페루치가, 1345년 바르디가 각각 몰락한 이후, 에드워드 3세는 관세(신용 시스템에 중요한 정기적인 세입원)를 잉글랜드 국내의 상인 회사들에 위탁함으로써 시스템을 지속하려 했다. 이러한 상인 회사들은 반드시 자신의 자원으로 자금을 대출한 것은 아니며 소규모 대금업자들로부터 컨소시엄을 구성해 자금을 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으로서는 수백 명의 개별 채권자들과 직접 거래하는 것보다 단일 중개자와 거래하는 것이 더 편리했다. 그 대가로 상인 회사들은 이자와 무역 특권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중세 후기에 들어서면서 정부의 재정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기존의 대규모 금융조달 방식은 한계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래서 왕들은 보다 분산된 신용 체제를 도입해야 했다. 이는 말 그대로 중간 상인들을 제외하는 전략이었다. 14세기 후반부터 잉글랜드 정부는 개인과 법인으로부터 더 많은 소규모 대출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잉글랜드
  • 왕령지 지대 수입
    법정 수입 등과 합쳐서 1330년대 기준 연 2만 파운드.
  • 잉글랜드 양모 관세 수입
    평시에는 자루당 1/3파운드로 연 1만 3천 파운드.
    전시에는 의회의 승인을 받고 5배에서 최대 8배까지 추가 관세를 부과할 수 있었다. 6-10만 파운드.
    전시 정부 수입의 60%를 차지했다.
    15세기초에는 양모보다 직물 수출이 늘어나면서 왕실 재정의 근본적인 위협이 되었다. 직물에는 양모보다 더 가벼운 세금이 부과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세입이 크게 줄어들었다. 헨리 6세는 직물 수출세를 인상하지도 못했고, 이를 상쇄할 대체 세원도 찾지 못했다. 이는 에드워드 시대의 국가 재정 기반을 무너뜨렸다.
  • 보르도 와인 관세 수입
    연 1만 5천 파운드.
    대륙에 붙어있어서 전시에 군대의 약탈과 파괴로 피해를 입기 쉬웠다. 최대 1/5까지 감소. 약 3천 파운드.
  • 잉글랜드 전쟁 보조금
    평신도세의 경우 농촌은 잉여생산의 1/15, 도시는 1/10. 1회당 약 3만 7천 파운드.
    성직세는 1회당 약 1만 8천 파운드.

파일:프랑스 왕국 국기.svg 파일:800px-France_moderne.svg.png 프랑스
  • 왕령지 지대 수입
    잉글랜드 왕실의 3-4배. 연 35만 리브르.
  • 화폐 가치 조작
    실질가치가 명목가치에 미치지 못하도록 화폐를 주조하고 시뇨리지를 얻는다. 화폐 가치가 낮아지면 주로 채권자 역할을 하는 지주 귀족과 도시 상류층 등 기득권층에게 불리했기 때문에 삼부회의 저항이 가장 심했다.
  • 신민소집령 arriere-ban
    프랑스 국왕은 이론상 왕국의 주권자이자 '왕국 내 황제'였으며 프랑스에서 18세 이상 60세 이하의 모든 신체 건강한 남자들은 왕국의 방어를 위해 군복무를 해야 하는 법적인 의무가 있었다. 신민소집에 의한 자유민 동원은 13세기에도 종종 있었지만 필리프 4세 시대부터 명시적인 제도가 되었다. 충분한 돈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돈을 내고 병역을 면제받을 수 있었고, 대부분의 귀족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
    그러나 1360년부터 화로세가 도입되면서 신민소집령은 전쟁세 징수 수단으로서 의미를 잃었다. 병력 소집 수단으로서도 넓은 전선에서 기습적으로 들어오는 공격을 방어하기에는 느리고 비효율적인 방식이라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푸아티에 전투 이후 거의 반세기 가까이 신민소집령은 선포되지 않았다. 샤를 5세는 그 대신 화로세와 상품세를 걷어서 용병대를 고용하거나 전문적인 직업군인들을 모병해 상비군에 가까운 군대를 만들었다.
  • 상품세 aides
    도시에서 판매되는 다양한 상품에 부과된 간접세. 전시에 삼부회의 승인을 받고 징수되었다. 필리프 4세 시대에 처음 도입되었고 백년전쟁 초기에는 화폐개주 다음으로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잉글랜드처럼 소수의 항구에서 수출입을 감시할 수 없었던 프랑스에서는 모든 내부 거래를 감독하고 과세하는 것이 행정적으로 더 복잡했다. 15세기 프랑스는 수천 명의 세금 징수원을 고용했고, 이는 잉글랜드의 소규모 징수원 인력과 대조된다.
    랑그독 삼부회는 간접세보다 직접세를 선호하여 판매세 대신에 정기적으로 세금을 바쳤다. 따라서 탈세를 막기 위해 랑그도일에서 랑그독으로 이동하는 상품에 5%의 관세가 부과되었다.
  • 소금세 gabelle
    소금에 부과된 간접세. 1341년부터 정기적인 세금이 되었지만 정부의 위기 때마다 민심을 얻기 위해 삼부회의 승인을 받고 비정기적으로 징수하거나 전비가 부족해서 다시 정기적인 세금으로 바꾸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1436년 상품세와 함께 정기적인 세금으로 정착되었다.
  • 화로세 fouage
    용병 도적단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1360년 11월부터 도입된 가구세. 극빈층은 면제되고 소득에 따라 가구당 1~9프랑을 부과받았다. 가구당 평균 3프랑. 귀족들도 참전을 대가로 이 세금을 면제받았다. 1380년대 도시의 중하층민들이 세금에 저항해 일으킨 반란이 진압된 뒤 타이유(taille)라는 이름의 비정기적인 세금으로 대체되었다. 이 타이유세는 1439년부터 다시 정기적인 조세가 되었다.
  • 성직자 보조세
    왕국의 방어를 위해 아비뇽의 교황의 허가를 받고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한다.

2.2. 전비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잉글랜드
  • 잉글랜드의 대륙 원정군 (1340-1389)
    맨앳암즈 3천과 승마궁수 3천의 6개월 군사작전의 전비는 6만 파운드(순은 16톤).
    1346-7년 에드워드 3세의 크레시-칼레 전역은 약 20만 파운드(순은 58톤).
    1356년 랭커스터 공작과 흑태자의 푸아티에 전역은 10만 파운드(순은 26톤).
  • 거점 주둔군
    칼레 수비대 유지비 연 1~2만 파운드.

파일:프랑스 왕국 국기.svg 파일:800px-France_moderne.svg.png 프랑스
  • 프랑스 야전군과 요새 주둔군 (1340-1389)
    1343년 300만 리브르(순은 61톤).
    1355년 500만 리브르(순은 81톤).
  • 샤를 7세의 칙령군 (1445)
    상비군 유지비 연 74만 리브르(순은 22톤).

2.3. 군사 모집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잉글랜드
  • 맨앳암즈 man at arms
    일반적으로 중장병, 즉 "갑옷으로 몸의 대부분을 가리고, 승마전투가 가능하건 불가능하건 준마를 탔건 조랑말을 탔건 이동할 때는 말을 타는, 백병전 전문 전투원"을 지칭하는 용어. 백작이든 기사든 향사든 일반인이든 신분은 상관 없다. 징집병이나 민병대와 구분되는 잘 무장한 직업군인이라는 의미에서 근접전투원이 아닌 제노바 쇠뇌수 등도 맨앳암즈라고 칭할 때가 있지만 흔하지는 않다. 중무장 근접전투와 군인 직업이 존경을 받는 시대였으므로 어느 쪽이든 존중이 담긴 표현이다.
    • 왕실 가신단 기사
      국왕에게 연금을 받고 봉사하는 왕실 기사들. 노르만 왕조와 앙주 왕조 시절부터 잉글랜드 국왕군의 핵심 전력이었다. 왕실 기사의 전성기였던 에드워드 1세의 폴커크 전역에서는 중기병 1400명 중 절반 이상인 800명이 왕실 가신단 소속이었다. 이들은 참전의 대가로 봉급을 받았지만 회계 기록에서 용병 기사들과 철저히 구분되었다. 그러나 1360년 전후로 가신단 기사라는 명칭은 갑작스럽게 궁내부 기사(chamber knight)로 대체되었으며 왕실 소속으로 참전한 기사들에 대한 회계 기록이 아래의 고용계약서(indenture)로 모집된 용병 맨앳암즈들과 통합되었다.
    • 기사의 의무에 호소
      잉글랜드에서 연수입 40파운드 이상의 모든 지주들은 기사 작위를 받거나 국왕에게 벌금을 내야 했다. 대부분 그냥 벌금을 냈지만 그럼에도 14세기 잉글랜드에는 대략 900명이 조금 안 되는 기사들이 있었다. 당대 기사도의 이상에 따르면 기사는 국가 공동체의 수호자 계급이자 군인들의 지휘관이므로 국왕의 소집령에 응해야 한다는,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무시하기 어려운 사회적 기대가 있었다. 그러므로 국왕은 기사들 각자에게 서신을 보내서 참전을 '요청'했다.
    • 벌금이나 채무를 면제하는 대가로 참전 요구
      이런저런 이유로 많은 빚을 진 사람들 중에는 갑옷과 말을 살 정도로 부유하고 무예 실력으로 명성이 높은 이들도 있었다.
    • 고용계약 indenture
      중무장 근접전투와 군인 직업이 존경을 받으며 전쟁은 돈이 되는 시대였다. 명예를 원하거나 단순히 돈이 필요한 사람들을 모병한다. 원정군인 잉글랜드군은 1년에서 많으면 10년 이상의 장기계약을 맺었지만 방어하는 입장이라 행정에 여유가 있었던 프랑스군은 한달마다 계약을 갱신했다.
  • 궁수 archer
    • 배치위임 징병 commission of array
      알프레드 대왕 이후 잉글랜드의 모든 자유민들은 '잉글랜드인들의 왕'에게 충성하며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왕국을 방어할 의무를 가졌다는, 역사적 사실과 신화가 뒤섞인 관념이 있었다. 그러한 관념은 에드워드 1세 시대부터 명시적인 제도가 되었다.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모든 잉글랜드인 남성에게 병역 의무가 있었다. 농노 역시 자유민으로 취급되어 전쟁세를 내거나 국왕군에 징병되었다. 전쟁세 납부금액은 자유민과 비자유민 신분이 아닌 재산을 기준으로 평가되었다. 30에이커 소작지를 가진 농노는 15에이커를 가진 자유소작농보다 마을 공동체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다. 땅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였다.
      대부분은 전쟁 보조금을 내는 대신 의무를 면제받았지만, 징병관들은 어쨌든 할당된 숫자의 병력을 소집 장소로 데려와야 했다. 1296년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서는 보병 6만 명이 소집되었고 1인당 약 5실링 가치의 무장을 지원받았다. 반대로 생사르도스 전쟁에서 에드워드 2세는 인당 1파운드 이상의 비용을 들여 사슬갑옷과 투구와 건틀릿으로 완전히 무장한 보병 5100명을 소집할 계획을 세웠다. 에드워드 3세는 갑옷 대신 1파운드 가치의 말을 지급하라고 지시했다. 1347년 칼레 전역은 기마약탈보다는 공성전이 중심이었지만 그럼에도 잉글랜드군의 승마궁수와 보병궁수의 비율은 1:3이었다.
    • 웨일즈의 군주의 자유민 소집
      고대부터 모든 웨일즈인은 자유민이자 군인이므로 웨일즈의 군주를 위해 복무해야 했다는 전설이 있었다. 잉글랜드의 배치위임 소집령보다도 역사적 근거가 미약했지만 웨일즈는 가난한 지방이었으므로 봉급과 약탈의 기회에 대한 만족도가 잉글랜드 징집병보다 높았다.
    • 고용계약 indenture
      군인 직업이 존경을 받으며 전쟁은 돈이 되는 시대였다. 명예를 원하거나 단순히 돈이 필요한 사람들을 모병한다.

파일:프랑스 왕국 국기.svg 파일:800px-France_moderne.svg.png 프랑스
  • 신민소집령 arriere-ban
    프랑스 국왕은 이론상 왕국의 주권자이자 '왕국 내 황제'였으며 프랑스에서 18세 이상 60세 이하의 모든 신체 건강한 남자들은 왕국의 방어를 위해 군복무를 해야 하는 법적인 의무가 있었다. 대부분은 병역 대신 돈을 냈지만, 그럼에도 많은 귀족들과 평민들이 명예를 원하거나 봉급을 받으려고 국왕군에 참전했고, 필리프 6세는 최대 2만에 달하는 맨앳암즈와 그 이상의 민병대를 소집할 수 있었다. 1337년 아키텐 공작위 몰수 이후부터 푸아티에 전투 이전까지 신민소집령은 최소 7번 이상 선포되었다.
    하지만 신민소집은 넓은 전선에서 기습적으로 들어오는 공격을 방어하기에는 느리고 비효율적인 방식이었다. 크레시와 푸아티에 전역에서도 기마약탈을 벌이는 잉글랜드군을 추격하기 위해 항상 수많은 민병대 보병들이 해산되었다. 그래서 푸아티에 전투 이후 거의 반세기 가까이 신민소집령은 선포되지 않았고, 샤를 5세는 그 대신 화로세와 상품세를 걷어서 용병대를 고용하거나 전문적인 직업군인들을 모병해 상비군에 가까운 군대를 만들었다.

2.4. 보급

  • 군대에 필요한 식량
    3만 명의 대군세는 이론상 일주일에 약 4500-5000쿼터의 곡식을 필요로 했다. 1쿼터는 8부셸이며 290리터다. 여기에 말 1만 마리가 추가된다면 일주일에 약 4000쿼터의 귀리나 다른 곡물이 더 필요했다.
    에드워드 3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서 계산된 군사 4000명의 4개월치 식량: 밀 5400쿼터, 보리 8250쿼터, 콩과 완두콩 2400쿼터, 에일 60통(tuns), 베이컨 12960개, 청어 45??, 생선 32400마리, 치즈 9072스톤.
  • 보관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서 왕실의 지시사항: 밀을 잘 갈아서 체에 거르고, 깨끗한 통의 바닥에 개암나무 가지 세 개와 소금을 넣고, 그 위에 밀가루를 빽빽하게 눌러 담아야 한다. 잘 마르도록 정기적으로 통을 뒤집어야 한다.
"만약 강이 지나간다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강변을 장악해야 한다. 강은 군대의 방어와 보급에 엄청난 이점을 준다.
말과 모든 가축에게 물을 먹일 수 있고, 아군이 강을 마음대로 건너다니는 동시에 적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배를 띄울 수 있는 경우 보급 수송에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강을 통제하는 군대에게 큰 이점이 생긴다는 것이다. 어떤 노력을 들여서라도 강변을 점령해야 한다.
강을 장악한다면 전략이 크게 개선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다음에 제시하는 방법, 또는 그밖의 창의적인 방법으로 적을 계속 괴롭혀야 한다."
르 주벵셀

3. 전략

3.1. 첩보

  • 첩보 문서는 대부분 읽자마자 파기되었다. 명령이 지켜지지 않은 극소수의 문서만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 1468년 에드워드 4세는 첩보 비용으로 2200파운드 이상을 썼다.
"군주는 예산의 1/3을 첩보원을 고용하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왕의 지갑을 아끼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단 첩자를 확보하면, 기습을 당하는 일이 결코 없을 것입니다. 적의 음모를 항상 파악할 수 있게 되므로 이를 좌절시키기 위한 신중한 계획을 세울 수 있고, 많은 실패를 피할 수 있습니다."
르 주벵셀

3.2. 의사 결정

제 아무리 치밀한 계획이라도 시작부터 엉망이 될 수 있다. 남을 속이려는 사람 또한 남에게 속게 되는 법이다. 그래서 '사람이 계획하지만 신이 결정한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르 주벵셀
주벵셀과 그의 부대가 행군하는 동안, 한 첩자의 보고가 들어왔다. 그는 적군이 크라토르로 향하고 있어 원래 계획을 진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전쟁이란 이런 것이다. 항상 의도한 대로만 움직일 수 없는 것이고, 때로는 정해진 작전 대신 더 좋거나 나쁜 다른 행동을 취해야 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군인들이 운에 기대며 산다고 말한다. 군인들은 주둔지를 떠난 다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절대 모른다.
르 주벵셀
흔히 성찰할 시간이 있는 사람만이 좋은 판단과 조언을 제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시간과 여유가 있는 사람이 남을 해칠 음모를 꾸미기 가장 좋다는 말도 있는데, 그것이 옛말에 '악마는 게으른 자에게 일을 시킨다'고 하는 이유다.
르 주벵셀
위대한 일을 성취하고자 할 때는, 더 많이 계획할수록 더 운이 따르게 된다. 어떤 사업의 성공 또는 실패를 결정짓는 것은 지휘관의 판단력인데, 만약 지휘관이 현명하지 못하고 신중하지 않다면 그는 성공할 수 없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르 주벵셀
"훌륭한 아이디어입니다." 대장이 말했다. "좋은 계획이네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경은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전문가입니다. 계획된 작전을 다시 토론하는 것은 항상 좋은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좋은 아이디어는 항상 토론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계획을 세 번째로 검토하는 중인데, 여전히 이전보다 더 나은 아이디어를 얻고 있습니다. 자, 갑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사업은 잘 계획된 것 같습니다. 주벵셀은 자기가 찾은 길잡이들을 신뢰한다고 말했습니다. 내일 저녁에 출발하고, 작전은 짧게 끝냅시다. 길게 끌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르 주벵셀
우리가 지식을 반복해서 검토하는 것을 멈춘다면, 우리는 결코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나는 인간의 창의력과 혁신이 매일 확장되고 있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고대인들이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기술이 발견된다고 대답할 것이다. 따라서 내 책은 적어도 어느 정도의 유용성을 가질 수 있다.
르 주벵셀
적이 요새처럼 좁은 지형에 배치돼 있다 해도 공격하고 싶어지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본능이다. 그리고 그것은 공격이 잘 계획되고 침착하게 진행될 경우 합리적인 판단이다.
전쟁에서는 대담함(필수적이다. 대담함 없이는 어떠한 작전도 시작될 수 없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위기 속에서의 냉정함, 그리고 전투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전투 전에 미리 예측하는 능력이다. 전투의 열기 속에서는 생각을 정리할 여유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훌륭한 지휘관은 가능한 모든 문제들을 미리 예측하고 대비해야 한다. 그래야 위급할 때 열정적이고 공격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열정적인 대응의 기반에는, 전투 전 미리 생각한 정교한 전술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열정적인 대응은 차가운 성찰에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르 주벵셀
전쟁에서 속도는 필수적이다. 신속하게 배치된 500명의 병사들은 종종 2000명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우에는, 어떤 사람도 기다리지 말아야 하며,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아야 한다.
르 주벵셀

4. 전술

4.1. 습격전

그날 밤, 주벵셀은 동료들과 함께 무장을 하고 성문으로 가서 도개교를 내렸다. 그리고 말발굽 소리를 감추기 위해 근처의 거름 더미에서 거름을 퍼다 도개교에 깔았다.
르 주벵셀
주벵셀은 동료들 중 네 명, 즉 제르베즈 나르데로와 다른 세 명을 지명해 전위에서 매복이 있는지 살펴보게 했다. 네 명 중 두 명, 즉 제르베즈와 또 한 명은 선두에서 정찰하고, 나머지 두 명은 돌을 던져 맞힐 수 있는 거리에서 그들을 따라갈 것이었다.
그리고 주벵셀은 또다른 두 명에게 후위를 맡겼고, 이렇게 해서 본대에는 열아홉 마리의 말이 남았다. 원수는 후위를 맡았다. 원수는 후위가 본대에서 분리돼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소리를 더 잘 들을 수 있도록 자신의 동료에게 창 두 자루 거리를 두고 뒤따르도록 했다.
주벵셀이 말했다. "좋아. 모두 정해졌으니 말을 타고 위치로 가. 전위의 정찰병 네 명 중 누군가 소식을 가지고 돌아올 경우를 대비해 나는 본대에서 창 두 자루 거리를 앞서 갈 거야. 그래야 그들의 말을 더 잘 듣고 비밀스럽게 대화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제르베즈에게는 평소와 다른 점이 없는지 잘 살피도록 지시했지만, 정찰병이 돌아오면서 모두를 불필요하게 놀라게 할 위험이 있어. 그래서 내가 앞에서 그를 막아서야 하는 거야."
르 주벵셀
주벵셀이 계획을 세우자 모두 말에 올랐고, 행군을 시작했으나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확신한다. 나뭇잎이 바스락거리거나 나무가 삐걱거릴 때마다 그들은 공격받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작은 소리나 정찰병이 돌아오는 소리를 듣기 위해 자주 멈췄다. 물론 그들은 최대한 조용히 행군했다.
르 주벵셀
그래서 적군은 주벵셀과 장앵을 포로로 데리고 다시 출발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매우 체계적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그들에게는 약 100명의 중기병과 300명의 궁수, 그리고 약 200명의 보병이 있었다. 전위대는 20명의 중기병으로 구성되었고, 본대에는 모든 궁수, 보병, 그리고 포로들이, 후위에는 나머지 80명의 중기병이 배치되었다.
이런 종류의 부대 배치는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올 때는 가장 강력한 부대를 후위에 남겨 습격에 대비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면 나머지 부대에게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줄 수 있으니까.
이는 크라토르의 병사들이 주벵셀의 대답을 한 마디도 믿지 않았고, 당연히 기습 공격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준비한 것이었다. 베르길리우스가 말했듯, 패배한 자들은 항상 불안하다.
르 주벵셀
"장비는 새 것도 많이 있고 충분해. 다만 점검하고 정비해서 흠 잡을 데 없게 할 필요가 있겠군. 사다리의 갈고리들을 단단히 조이고, 지지대를 검게 칠하고, 발판은 소음이 나지 않도록 새 것으로 교체해야겠어."
르 주벵셀
"우리가 그들과 접촉하기 전에 날짜를 정해야 해요. 보름달이 아닌 밤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거주지들을 지나게 될 테니, 발각되지 않고 두세 시간 정도 말을 타기에 적합한 밤이 좋겠어요."
르 주벵셀
그리고 나서 그는 제르베즈에게 약 20명의 병력을 데리고 라 바누아까지 이어지는 시골 지대를 샅샅이 수색해 주변의 불량배나 용병들을 쓸어버리라고 명령했다. "그러면 그들은 기병 20명이 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알 뿐 우리의 작전은 눈치채지 못할 거야. 시골 사람들은 병사들만 보면 바로 도망치겠지. 그럼 수요일에 약속 장소로 오는 로케통 경과 다른 이들을 아무도 보지 못할 거야."
르 주벵셀
수요일, 약속대로 원수와 제르베즈는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라 바누아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뤽의 대장을 기다리고 있는 로케통 경을 발견했다. 로케통 경과 다른 이들은 중요한 정보 하나만 대장에게 전해달라고 원수에게 말했다. 그들이 시골 주변을 배회하는 두 명의 남자를 목격했는데, 그 중 한 명은 적군의 길잡이였다고. 대장이 부대를 이끌고 도착하자 원수는 그 경고를 전달했다. 그리고 가볍게 무장한 10명 정도의 병력을 파견해 교차로와 주요 도로를 감시해서 첩자들이 도시로 향하는 것을 막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이에 대장은 적절한 조치라고 답했다.
르 주벵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세 가지 있어. 해자에 물이 있는지, 얼마나 깊은지, 또 근처에 건너기 어려울 정도의 습지가 있는지 확인해야 해.
만약 해자에 물이 있다면, 돗자리나 나뭇가지 묶음, 또는 밧줄이 있어야 해. 그래야 사다리를 든 병사들이 안전하고 빠르게 건널 수 있으니까.
해자에 물은 없고 목책이나 가시덤불이 있다면, 이를 넘기 위한 발판를 만들어야 해. 즉 사다리 한 쌍과 발판으로 쓸 판자, 그리고 버팀다리가 필요하지. 사다리는 울타리를 넘어갈 수 있을 만큼 길어야 하고, 디딜 때 소리가 나지 않아야 해. 습지가 있는 경우에는 지지대를 멀리 놓을 수 있도록 사다리가 더 길어야 하지.
가시덤불을 잘라내기 위해 두껍고 큰 낫이 필요해.
투구가 반짝이지 않도록 잘 가리라고 당부해둬. 그리고 서로 부딪치지 않도록 팔 하나 정도 거리를 유지해야 해. 이건 전쟁, 특히 야습이나 은밀하게 움직여야 할 때 기억해야 할 요령이지."
르 주벵셀
주벵셀은 자기 부하 열 명을 창 하나 정도의 간격을 두고 앉게 했다. 각자 자기에게 배정된 사다리 부품과 공성 장비를 등에 짊어졌다.
그리고 피에트르는 성벽의 높이와 사다리를 걸 가장 좋은 장소를 확인하기 위해 성벽 기슭으로 향했다.
장소를 결정하자 병사들은 엎드린 자세 그대로 사다리 부품을 조용히 손에서 손으로 건네받았다. 피에트르가 사다리를 조립해 자신이 선택한 위치에 걸었다.
그런 다음 바로 옆에 있던 부하를 돌아보고, 그에게 밧줄 사다리를 건넸다. 그리고 그것을 성벽 꼭대기까지 가지고 올라가서 사다리를 설치하라고 지시했다.
"성벽 위에 올라가면 밧줄 사다리 끝부분에 단단한 막대를 끼워. 그리고 그 막대를 성가퀴 사이에 가로질러 고정시키면 사다리가 확실하게 고정될 거야."
그리고 피에트르는 사다리 앞에 서서 올라오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손으로 붙잡을 곳을 가르쳐주라고 지시했다. 부하는 성벽 꼭대기로 올라가 사다리를 고정하고 피에트르가 시킨 대로 했다.
한편 피에트르는 사다리의 과적과 파손을 막기 위해 다른 부하와 함께 사다리 아래에 남아서 두 번째 인원을 올려보냈고, 그렇게 모두가 사다리 꼭대기까지 올라가도록 했다. 그리고 그 뒤로 주벵셀의 부하 열 명이 모두 올라갔다.
그리고 제르베즈와 원수의 부대가 올라오는 동안, 주벵셀은 20명의 병력을 이끌고 성채에서 도시로 통하는 문으로 가서, 길이가 약 2피트 정도 되는 단단한 철제 집게로 자물쇠를 부수고, 부대가 도시로 들어가서 도시 정문을 열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로케통 경과 나머지가 이끄는 80명의 병사들이 서둘러 성채로 들어가 성벽 바깥으로 통하는 문을 강제로 열었다.
그런 다음 전체 병력이 "도시 점령!"이라고 외쳤고, 대장과 그의 부대가 열린 성문을 통해 들어와서 성채의 주둔군 일부를 죽이고 나머지는 포로로 잡았다.
르 주벵셀
그렇게 모든 병사들이 들어오자 주벵셀이 대장에게 말했다. "대장님, 성채는 놔두고 이제 도시로 가죠."
"아니," 대장이 말했다. "서두르지 마. 서두르면 병사들이 모두 약탈에 집중하게 돼. 도시 안에 우리를 공격하거나 피해를 줄만한 적들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아직 모르잖나. 곧 날이 밝으면 계획을 세워 함께 공격할 수 있고, 그땐 상황을 보면서 행동할 수 있으니까. 지금은 누구도 어둠을 틈타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해야 해."
"맞는 말이긴 하지만," 주벵셀이 말했다. "그러면 주민들이 도망칠 것이고, 가치 있는 포로나 좋은 말들을 놓치게 될 겁니다."
"아니!" 대장이 대답했다. "규율을 지키지 않아서 도시에서 수치스럽게 쫓겨나는 것보다는 그들을 놓치는 게 낫다."
르 주벵셀
"대장님도 아시겠지만, 에스칼롱 놈들이 우리에게 큰 불편을 주고 손실을 입히고 있어요. 제 생각에는 그들을 공격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와 원수와 제르베즈는 에스칼롱 쪽으로 밭을 가로질러 15명 또는 20명의 경기병 부대를 보내려고 해요. 그렇게 하면 적들이 공격하러 나올 거고, 매복해 있던 다른 부대가 그들을 사방에서 포위할 거에요."
"주벵셀, 네 계획은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우리 병력이 20명밖에 보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최대 40명 정도의 소탕 부대를 보낼 거야. 그럼 우린 지겠지. 설령 우리가 이겨도 그건 40명을 잡은 것뿐이고, 에스칼롱의 나머지 부대는 경계를 강화할 거야."
르 주벵셀
나는 에스칼롱을 잘 알아. 여러 번 가봤거든. 거기 대로를 따라 성문 밖에 나가면 바로 보이는 길가에 거름더미가 있어. 거긴 해자나 목책처럼 순찰대가 감시할 만한 곳이 아니야.
우리는 밤을 틈타 몰래 거기 가서 거름더미에 200명을 숨길 수 있어, 아무도 보지 못하게 말이지. 거름과 짚으로 가볍게 덮어서 보이지 않게 할 수 있을 거야.
우리는 적이 거름더미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면서 성문을 열고 나올 때 공격을 시작할 거야. 그들은 목책과 해자만 걱정할 거고, 거름더미는 한번도 쳐다보지 않을 게 분명해.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경작지 너머에 있는 작은 숲에 기병 300명을 매복시키는 거야. 그리고 각각의 기병은 뒤에 보병 한 명씩을 태워야 해.
주둔군이 밖으로 나오면, 매복해 있던 다른 부대가 튀어나올 거야. 즉 300명의 기병과 그들 뒤에 숨은, 말의 엉덩이에 앉은 300명의 보병으로, 총 600명이 될 거야. 거름더미에서 나올 200명을 더하면 800명이 되고, 그 정도면 신의 은총으로 적들을 물리치기에 충분할 거야.
적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선봉대의 50명 또는 60명, 아니면 그 뒤에 매복한 300명의 기병뿐일 거야. 이것을 본 적들은 전투를 감행할 거고, 거름더미에 숨은 200명이나 말의 엉덩이에 앉은 300명에 대해서는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할 거야.
거름더미에서 나온 200명은 다 함께 성문으로 이동하고, 전투가 우리의 승리로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켜야 해."
르 주벵셀
"하지만 저도 계획을 자세히 고려할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성문으로 가는 길에 목책과 해자가 있다는 것을 기억했습니다. 적이 목책 뒤로 후퇴해서 문을 닫으면 우리는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한 가지 교묘한 방법을 생각해냈습니다. 우리가 거름더미에 숨으러 갈 때, 쇠줄을 가지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걸로 목책을 자르고, 다시 밀랍으로 붙여놓은 다음, 흙으로 밀랍을 덮어서 잘린 부분을 볼 수 없게 할 겁니다."
르 주벵셀
해가 뜨자, 도시의 문이 열렸고, 그곳 주민들(아이들, 여자들, 그리고 개들)이 모든 해자, 울타리, 덤불, 땅의 움푹 패인 곳을 살펴보러 나와 잘못된 것이 없는지 확인했지만, 그들은 거름더미를 살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특이사항이 없다고 보고했다. 그래서 모두가 말에게 물을 먹인 후 하루 일을 시작하기 위해 떠났다.
르 주벵셀
새벽 무렵, 적의 기병 100명 정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주벵셀의 숙영지 근처까지 다가왔다. 하지만 주벵셀은 완전히 깨어있었고 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창을 챙기고 소란이 일어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주벵셀은 적군이 포위군 진지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이 모든 소란이 다른 주둔지를 공격하기 위한 교란 작전임을 깨달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말했다. "모두 말에 타! 이놈들이 우릴 공격하고 있다. 지금 떠들어대는 건 우릴 속이려는 거다! 서둘러서 다리를 건너자!"
르 주벵셀
기병들이 부대를 이탈하지 않고 밀집 대형을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누구도 명령이 내려지기 전에 돌격해서는 안 된다.
모두 자기 부대의 군기 아래에서 싸우도록 해야 한다. 익숙한 지휘관 아래에서 병사들은 더욱 용감하고 성실히 싸울 것이다.
너희가 지휘하는 병력이 백, 오백, 또는 천 명이고 적의 영토 안에서 행군하고 있다면, 기습을 방지하고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사방에 정찰대를 배치해야 한다.
하지만 적이 요새에 틀어박혀 있거나 어디로 이동하고 있다는 확실한 정보가 있다면, 정찰병의 수를 줄이고 은밀하게 행군해 적을 기습해야 한다.
르 주벵셀

4.2. 공성전

4.3. 수성전

주벵셀은 모든 부하들과 동맹들에게 군대를 모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모인 인원은 고작 800명 정도로, 약 7000명이나 되는 포위군에 비하면 초라한 숫자에 불과했다.
모두가 주벵셀에게 말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정도 병력으로는 포위를 풀기 어렵습니다."
주벵셀은 이렇게 대답했다. "포위를 푸는 방법은 전면전만 있는 게 아닙니다. 적과 싸우지 않고도 포위된 군대를 지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가 마을을 구출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버릴 수 없습니다."
모두가 이 말에 동의했다. 그들은 새벽에 포위군을 기습하기로 합의했으며, 안전을 위해 상당한 병력을 예비대로 남겨두기로 했다.
그들은 포위된 마을 주둔군이 구원군에 호응해 출격할 것으로 기대했고, 주님의 도움으로 적군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면 포위를 풀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면 적어도 호위대를 물리치고 대포를 노획하여 못을 박고, 부상자들을 대피시키고, 마을에 지원군과 약간의 보급품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그들은 적에게 피해를 입히고 그들의 전술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며, 후방에 남겨둔 예비대와 합류해 후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적진 주변을 순찰하면서 보급품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거나, 그들의 징발대가 농촌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방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아마 포위를 풀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수적으로 우세한 적을 상대로 하는 전쟁에서 추구해야 할 현명한 전술이다. 계획과 인내는 종종 약자를 승자로 만든다.
지휘관의 역할은 적의 약점을 파고드는 것이다. 힘으로 이길 수 없다면, 교묘한 책략으로 이길 수 있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력과 민첩한 판단이므로, 항상 적을 예의 주시해야 한다.
르 주벵셀

4.4. 야전

"만약 방어시설이 없는 곳에서 전투를 해야 한다면, 전열을 길게 전개하는 것이 가장 좋다.
중군에 주력 부대를, 양익에는 궁수 또는 가능하다면 쇠뇌수들을 배치해야 한다. 그러나 이 쇠뇌수들을 보호하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수의 중장병들도 측면에 배치해야 한다.
그리고 대규모 군대라 할지라도 반드시 후방에 소규모 예비대를 배치해 후방을 보호하고 필요한 경우 지원하게 해야 한다."
르 주벵셀
"중요한 것은 전열이 잘 정돈돼 있고 지휘관이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수 있다면 야전을 감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지휘관은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 한다.
즉, 적군이 태양을 마주보게 하거나 바람이 적진으로 전투의 먼지를 날려보내는 위치를 말한다.
작은 덤불숲이나 도랑이 있어도 도움이 되고, 습지, 경작지, 부드러운 토양 또한 유용하다.
혹은 말을 타고 건널 수 없을 정도로 울창한 숲이나 강이 있어도 된다.
간단히 말해, 유리한 지형이 있다면 적을 공격하기보다는 그 장소를 선점하고 적과 가까운 거리에 포진해야 한다. 물론 적에게 기습당할 정도로 가까우면 안 되고, 언제든 대응할 수 있는 최적의 위치여야 한다."
르 주벵셀
"적에게 보급품이 도달하지 못하도록 강 주변을 계속 감시해야 하고, 어떻게든 보급품을 수송했다면 그것을 모두 소진할 때까지 모든 움직임을 통제해야 한다. 그러면 적들은 후퇴하거나 공격해야 할 것이다.
만약 공격한다면 그만큼 이쪽에 유리해진다. 왜냐하면 놈들은 그러기 위해 우회를 시도하거나 정면으로 공격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원하는 바이다. 그들이 공격하는 것이고 우리는 대비되어 있기 때문에 원했던 이점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적들이 상당한 수의 후위 부대를 배치한 채 후퇴할 수도 있다고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에게 등을 보인 군대는 사기가 떨어진다. 이때는 반드시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며 공격해야 한다."
르 주벵셀
"만약 그들이 장거리에 걸쳐 후퇴한다면, 적을 공격하기에 가장 좋은 곳을 찾아 양익과 선봉대를 배치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일정 비율의 병력을 예비대로 남겨 적과 교전 중 필요할 때 증원병을 투입할 수 있도록 대비해야 한다.
만약 "적의 수가 우리보다 적은데, 근처에 요새 같은 곳이 있어서 그들이 피신할 수 있고, 적군이 도보로 전열을 갖추고 있다면, 공격하지 말고 그대로 보내주어야 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절대 보내주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면으로 공격해서도 안 된다.
대신 상당한 규모의 중기병 부대를 보내 적의 군기(가장 강력한 주력군이 있는 곳)를 추격하되, 활의 사거리 안에 들어가지 않도록 거리를 유지하게 해야 한다. 즉 이 중기병 부대는 적군의 양익 중 가장 강한 측면 방향에 배치되어야 한다.
동시에, 공격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으며 적이 가장 약한 측면에 나머지 중장병과 궁수들을 도보로 배치해야 한다. 이들 보병대가 적과 교전하여 적의 중군과 약한 측면을 견제하는 동안, 아군 중기병 부대는 적의 강한 측면이 먼저 공격을 개시하기 전까지는 접전을 시도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만약 적의 강한 측면이 공격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면, 우리 측면 중기병 부대에 신속히 진격해 적과 교전하라고 명령해야 한다.
이것이 도보로 싸우는 중장병들을 위한 교전 지침이다. 도보 전투에서 명심해야 할 것은,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처럼 위장하면서 실제로 가장 약한 곳을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양익과 중군 각각에 용감하고 지혜로운 지휘관이 배치되어 너희들의 전반적인 명령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게 중요하다. 위의 내용은 정확한 순간에 정확하게 실행되어야 한다. 이는 각 지휘관이 다른 지휘관들과 전투를 잘 조율해야 한다는 뜻이다. 만약 한 지휘관, 한 부대라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모든 게 허사가 될 것이다."
르 주벵셀
"적군과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전열을 정비해서는 안 된다. 또한 전력 차이에 관계없이, 정해진 시간 전에는 그 어떤 부대도 적진에 접근해선 안 된다. 이와 같은 경우 아군은 맹렬한 기세 없이 교전을 시작하게 된다. 그들은 제멋대로 진격하다가 하나씩 차례로 적에게 쓰러질 것이다."
르 주벵셀
적의 후방에 퇴각할 수 있는 공간을 언제나 남겨둬야 한다. 전투에서 도망치는 겁쟁이들은 항상 존재하고, 이들이 도망치면 용감한 자들도 사기가 저하된다. 물론 도망친다고 살 수는 없겠지만, 모두가 그걸 깨닫지는 못한다."
르 주벵셀
뒤에서 부하들이 외쳤다. "주벵셀,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기 우리 동료들이 패하고 있는 게 보이지 않습니까? 한 사람은 얼굴에 칼자국이 나 있고, 또 다른 사람은 겁에 질려 있습니다. 그들은 아군이 전부 죽거나 포로가 되었고, 적이 우리보다 훨씬 많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적은 병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리를 부수고 크라토르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버티다간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주벵셀이 대답했다. "너희들 모두 잘못 생각하고 있어.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순간이다.
적들은 교만과 허영에 사로잡혀 하느님도, 우리도 무시하고 있다.
한 놈은 포로의 손을 잡고 있고, 다른 놈은 여분의 말을 이끌고 있으며, 또 한 놈은 손에 활 세 개를 들고 있고, 다른 놈은 검 세 자루와 창 두 자루를 들고 있어. 또 다른 놈은 머리가 하나밖에 없는데도 안장턱에 여분의 투구를 매달고 있다.
놈들은 지금 전리품에 짓눌려 몸을 가누지도 못한다. 백 명의 장군도 그들을 통제하며 전열을 정비시킬 수 없을 것이다!
우린 당장 재편성하고, 대형을 갖추고, 질서 있게 돌격을 가해야 해. 중장병들을 전열에, 궁수들을 후열에 배치하고, 내가 앞에서 신호를 주면 바로 뒤따르라. 나를 잘 보고 내가 적진으로 돌진하는 곳을 따라 돌파하며 나를 엄호해.
혼전이 시작되면 적의 겨드랑이와 목, 그밖에 갑옷의 약점을 노려라.
포로를 잡거나 말이나 전리품을 챙기려 하지 마. 우리가 승리할 때까지 적에게 반격할 시간을 주지 마라.
만약 너희가 명령을 따른다면, 주님의 은혜로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되리라."
그래서 주벵셀은 적의 배치를 살피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대체로 그가 묘사한대로였다. 주벵셀과 그의 부하들을 보고 다시 전열을 만들려 했지만 전리품 탓에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주벵셀이 그들 사이로 돌진하고 그의 병사들이 바짝 따라붙자 적의 대열은 무너지고 반으로 갈라졌다. 주벵셀과 그의 부하들은 조직력이 가장 강한 쪽을 공격해 베어 넘겼다. 일단 그 부분이 혼란에 빠지자 다른 모든 부분이 두려워하며 도망쳤다.
이것이 주벵셀이 전쟁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적을 무찌른 방법이다. 전투에서 승리한 순간이 실은 가장 취약한 순간이기에, 바로 그때 공격해야 한다. 주벵셀은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적은 주벵셀의 군대의 세 배였지만, 주님의 뜻대로 모두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르 주벵셀

5. 개인 전투

5.1. 기병

5.2. 보병

5.3. 궁병

6. 무장

6.1. 1기 (1337~1360)

그레이트헬름이 아직 현역이다. 브리간딘과 판금 팔보호대와 다리보호대 등 트랜지셔널 아머의 형태는 이미 완성되었지만 비싸기도 하고 기마약탈과 강행군에 불편해서 부유한 기사들도 사슬갑옷만 입는 경우가 더 많다. 반대로 신분이 낮은 맨앳암즈가 안전제일주의자라서 판금 보호대와 브리간딘으로 중무장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파일:Miroir_historia.jpg
프랑스 연대기 삽화. 1335년경
파일:Bodley 264 Romance of Alexander c.1340.png파일:BL Royal 6 E IX  Address in verse to Robert of Anjou, King of Naples 1335-1340.jpg
알렉산더의 로망스 / Carmina Regia. 1340년경

파일:Sir Hugh Hastyngs. 1347.jpg
휴 헤이스팅스 무덤 장식. 1347년경

6.2. 2기 (1360~1389)

그레이트헬름은 거의 토너먼트에서나 볼 수 있고, 배서닛이 가장 표준적인 투구로 자리잡는다.
파일:Beinecke MS.227 Arthurian Romance 1357.jpg파일:Beinecke MS.227 Arthurian Romance 1357 2.jpg
아서 왕 로망스. 1357년경

파일:rvdmelee.jpg
연대기 삽화. 1370년경
파일:Miroir Historial 1 Folio 94v Dating 1370-1380.jpg파일:black prince 1376.jpg
연대기 삽화 / 흑태자 에드워드 무덤 장식. 1376년경

파일:yates-thompson-35-f51.jpg
베르트랑 뒤 게클랭. 1385년경

6.3. 장기 휴전 (1389~1415)

판금 보호대가 거의 표준으로 자리잡았고 부리처럼 튀어나온 면갑이 대중화되었다.
파일:1390-1400 Chroniques de Saint-Denis.jpg파일:화이트컴퍼니 1400년경.jpg
생드니 연대기 삽화 / 호크우드와 화이트컴퍼니. 1400년경

6.4. 3기 (1415~1431)

넓은 판금 목가리개를 붙여서 가동성을 희생하는 대신 치명적인 급소인 목을 보호하는 그레이트배서닛이 유행한다. 판금갑옷이 맨앳암즈의 상징으로 자리잡는다.
파일:Battle_of_Crécy_Grandes_Chroniques_de_France_(c.1415).jpg파일:Guiron le Courtois c.1420.jpg
프랑스 대연대기의 크레시 전투 삽화 / Guiron le Courtois. 1420년경

6.5. 4기 (1432~1453)

진정한 판금 갑옷의 등장. 목가리개 등 관절부의 판금 보호장비를 인체공학적으로 정교하게 설계해서 방어력을 유지하는 동시에 가동성을 향상시켰다. 그러나 이전처럼 값싸고 튼튼하고 단순한 형태의 보호장비도 여전히 많이 쓰이고 있다.
파일:Book of Hours, M.63 fol. 68v c.1440.jpg파일:Morgan M.359 Book of Hours c.1430.jpg
기도서의 맨앳암즈 삽화. 1435년경

파일:italian men at arms c.1440.jpg
'산로마노 전투'. 1440년경
파일:Bodley Auct. D. inf. 2. 11 Book of Hours, Use of Sarum c.1445.jpg파일:Scheggia c.1449.jpg
용을 죽이는 성 조지 / '명예의 승리'. 1445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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