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요하너스 람베르튀스 더하르더르 Johannes Lambertus de Harder |
출생 | 1920년 1월 14일 |
사망 | 1982년 12월 7일 (향년 62세) |
국적 | 네덜란드 |
출신지 | 헤이그 |
포지션 | 아웃사이드 레프트 포워드, 센터 포워드 |
신체조건 | 173cm | 75kg |
소속팀 | VUC 덴하흐 (1937~1949) FC 지롱댕 드 보르도 (1949~1954) 홀란트 스포르트 (1954~1956) AS 앙굴렘(1956~1957) |
국가대표 | 11경기 3골 (네덜란드 / 1938~1955) |
감독 | AS 앙굴렘 (1957~1960) FC 뮐루즈 (1962~19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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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네덜란드의 전 축구 감독.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더하르더르는 형 카럴(Karel)과 함께 트란스바알(Transvaal)에서 축구를 배웠다.1937년에 VUC 덴하흐에 입단한 더하르더르는 1부 리그 데뷔전 상대였던 고 어헤드 이글스의 레오 할러를 상대로 데뷔골도 넣었다. 데뷔 이후 3시즌에서 46골을 넣었고 디비전에서 득점왕을 한 적도 있었다.
1943-44 시즌에 VUC 덴하흐가 디비전 우승으로 네덜란드 풋볼 리그에 참가해서 결승전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우승을 차지할 더 볼레베이커스(De Volewijckers)에 밀려 준우승에 그쳤다. 특히 4월 30일 경기에선 더하르더르가 빠진 상황에서 1대5 대패를 당했지만 그의 결장 이유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클럽 회장에게 탈의실에서 질책을 당한 적도 있었고 뇌물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떠돌아다녔다. 더하르더르는 이런 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법을 몰랐고 불만이 있는 채로 경기를 뛰었다. 그러다 그는 1945년 협회로부터 제명 처분을 받았다. 나중에 2년 반으로 기간이 경감되었고 1947년 1월의 복귀전에서 4골을 넣었다.
1949년, 네덜란드 B팀과 프랑스의 B팀이 경기를 했는데 그는 보르도 관계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보르도는 1948-49 시즌에 디비지옹 1으로 승격되었고 더하르더르와 계약을 제안했다. 더하르더르는 보르도 역사상 세번째 네덜란드 출신 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승격 시즌에 보르도는 클럽 역사상 첫 디비지옹 1 우승을 차지하는 대형 사고를 쳤다. 더하르더르 역시 이 시즌에 21골을 넣어 팀내 득점왕이 되면서 보르도의 우승에 큰 지분을 담당했다.
1951-52 시즌은 더하르더르의 불행한 개인사로 인한 힘든 시즌이었다. 아내와 자녀 4명이 모두 사망했음에도 더하르더르는 결국 25골을 넣어 디비지옹 1 득점 랭킹 2등에 자리했다. 프랑스에서 뛴 5년간 더하르더르는 le divin chauve(신성한 대머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1954년에 고국 네덜란드로 돌아간 더하르더르는 홀란트 스포르트에서 2시즌을 보냈다. 그러나 더하르더르는 심판 모욕 혐의로 네덜란드에서 출장 정지 징계를 받았고 다시 프랑스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커리어를 마감했다.
2.1.2. 국가대표
1938년 5월 21일,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스코틀랜드와의 경기가 더하르더르의 대표팀 데뷔전이었다. 네덜란드는 이 경기에서 1대3으로 패했지만 만 18세 소년의 활약은 대표팀 관계자들의 눈에 들었고 곧 있을 월드컵 대표팀에 승선하게 되었다.네덜란드는 1라운드에서 체코슬로바키아에 0대3으로 패했지만 더하르더르는 선발 명단에 들었고 네덜란드 축구의 미래를 책임질 자원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그는 1940년까지 9경기에서 3골을 기록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대표팀 경기가 중단되었다.
전쟁이 끝났음에도 더하르더르는 징계와 프랑스에서 뛰는 등의 이유로 대표팀에 한동안 선발되지 못했고 네덜란드에 돌아온 1954년 이후에 두 경기를 더 뛰었다.
2.2. 이후
선수 은퇴 후 더하르더르는 프랑스 축구계에서 감독, 코치로 일했다. 그는 고향 헤이그로 돌아가고 싶어했지만 재혼한 아내의 뜻을 존중해 계속 프랑스에 머물렀다.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득점력을 갖춘 아웃사이드 포워드. 양발 사용이 가능했고 뛰어난 드리블과 가속 능력, 트릭, 패스에 능했다.4. 뒷이야기
- 더하르더르가 어린 시절에 축구를 했던 트란스바알 클럽은 노동자 스포츠 연맹 소속이었다. 더하르더르가 이 클럽에서 뛴 이유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사회주의때문이 아니고 단순히 돈이 덜 들어서였다.
- 보르도에서 뛸 때 Le bon prince(좋은 왕자), Le Divin Chauve(신성한 대머리), Le roi du Terrain(투구의 제왕), Un diable frétillon(바쁜 악마) 등 별명이 매우 많았다.
- 1953년 1월에 있었던 북해 홍수로 당시 프랑스에서 뛰던 네덜란드 선수들이 3월에 자선 경기를 열었다. 더하르더르도 이 경기에 참가, 1골을 넣었다.
- 1955년, 스헤베닝언은 레키프로부터 막 창설된 어떤 대회의 초청을 받았는데 팀이 거절했다. 지금의 대회 위상과 팀의 위치를 생각하면 그저.. 그리고 더하르더르의 선수 생활 말엽에도 의미 있는 참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5. 수상
5.1. 클럽
- 디비지옹 1 우승 1회: 1949-50(FC 지롱댕 드 보르도)
- 디비시 웨스트 2 우승 1회: 1943-44(VUC 덴하흐)
- 네덜란드 풋볼 리그 챔피언십 준우승 1회: 1943-44(VUC 덴하흐)
- 디비지옹 1 준우승 1회: 1951-52(FC 지롱댕 드 보르도)
- 쿠프 드 프랑스 준우승 1회: 1951-52(FC 지롱댕 드 보르도)
5.2. 개인
- 디비시 웨스트 2 득점왕 1회: 1938-39(VUC 덴하흐)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