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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예후다 거리 테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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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1948년 벤 예후다 거리 폭탄 테러
2.1. 여파
3. 1951년, 1967년 시온 시네마 방화 테러 시도 사건4. 1975년 벤 예후다 거리 폭탄 테러(시온 광장 냉장고 테러)
4.1. 주동자
5. 1975년 벤 예후다 거리 폭탄 테러(카페 나바흐 폭탄 테러)6. 1976년 벤 예후다 거리 폭탄 테러 시도 사건7. 1976년 벤 예후다 거리 폭탄 테러 사건8. 1979년 벤 예후다 거리 폭탄 테러 사건9. 1997년 벤 예후다 거리 폭탄 테러 사건10. 2001년 벤 예후다 거리 폭탄 테러 사건11. 2012년 벤 예후다 거리 무차별 폭행 사건

1. 개요

1948년 2월부터 예루살렘 벤 예후다 거리에서 일어난 3번의 테러 시도와 9번의 폭탄 테러, 1건의 혐오 범죄를 통틀어 부르는 이름.

2. 1948년 벤 예후다 거리 폭탄 테러

이 테러는 1947년~1948년 위임통치 팔레스타인 내전 중, 1947년 11월 유엔 팔레스타인 분할 계획 이후, 1948년 5월 이스라엘 독립 선언 이전에 발생했다.

1948년 2월 22일, 아랍 비정규군과 영국 탈영병이 운전하는 장갑차가 이끄는 영국군 트럭 3대가 벤 예후다 거리에서 폭발하여 민간인 49~58명이 사망하고 140~200명이 부상당했다. 이 폭탄은 애틀란틱 호텔과 암두르스키 호텔에 숙박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순찰을 위해 떠난 퍼먼스(팔마흐 호송대 호위대) 대원들을 죽이기 위한 걸로 추정된다. 두 호텔 외에도 빌렌칙 빌딩과 쿠팟-밀베 은행이 파괴되었다. 폭탄은 파우지 알 쿠트브(Fawzi al-Qutb, فوزي القطب)가 제작했다. 호송대는 예루살렘 무장 전투원인 아즈미 알 자우니(Azmi al-Ja'uni, عزمي الجاني)가 이끌었는데, 그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해 영국 장교로 위장 할 수 있었다. 이르군에게 자신의 형제가 죽음을 당한 경찰 서장인 에디 브라운과 육군 상병인 피터 마디손이라는 두 명의 영국 탈영병은 상당한 금전적 보상의 약속에 설득되어 공격에 가담했다.

2.1. 여파

이 테러는 3일 전인 2월 19일 람라에서 이르군의 폭탄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발생했다는 내용이 적힌 전단지가 테러 다음날 저녁에 배포되었다. 이 전단지에는 작전의 책임을 맡은 압둘 카디르가 서명했다. 다음날 카이로에서 압둘 카디르가 자신이 알 아흐람[1]에 같은 내용의 성명을 남겼고 성전군[2] 최고 사령부는 팔레스타인에서 이 선언을 반복했다. 아랍 고위 위원회의 비서인 후세인 알 칼리디는 이 행위를 '아랍 정신에 걸맞지 않은 타락'이라고 비난했다.

이어진 혼란 속에서 유대인 주민들은 즉시 영국을 공격의 책임자로 비난했다. 학살 현장을 방문한 다비드 벤구리온은 이 테러에 대한 일부 책임을 유대인 깡패들에게 돌린 것으로 인용되었으며, "우리의 깡패와 살인자들이 길을 열었다는 것을 잊을 수 없다."라 말했다. 이르군은 무장 세력에게 영국인을 발견하는 즉시 사살하라고 명령했다. 하루가 끝날 무렵, 8명의 영국군이 총에 맞아 사망했고, 9번째 병사는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유대인 병원에 누워 있던 중 살해되었다. 며칠 후에는 레호보트 역에서 출발하는 영국군으로 가득 찬 기차를 폭파하여 27명을 죽였다.

그 다음 날인 2월 23일, 유대인의 박격포 공세가 예루살렘의 아랍인 거주 지역인 무스라라에 시작되어 일가족을 포함한 7명의 아랍인이 사망했다.

3. 1951년, 1967년 시온 시네마 방화 테러 시도 사건

1951년, 1967년 각각 한 번씩 두 차례의 방화 테러 시도가 발생했다. 두 사건 모두 극장 좌석 아래에 방화 물질과 점화 장치가 설치되었고 불이 붙기 전에 발견되었다.

4. 1975년 벤 예후다 거리 폭탄 테러(시온 광장 냉장고 테러)

1975년 7월 4일.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가 가전제품 매장 안에서 5kg(11파운드)의 폭발물이 들어 있는 부비트랩이 장착된 냉장고를 폭발시켜 민간인 15명이 사망하고 77명이 부상당했다.

유대인 행인 샤브타이 레비는 팔레스타인 남성이 예루살렘 중심부의 시온 광장에 있는 가전제품 매장으로 냉장고를 옮기도록 도우고 있는 중이었다. 이 냉장고는 시온 광장 근처에서 일하던 에스더 란드너와 예후다 워쇼브스키의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란드너는 경찰에 전화했지만, 그녀가 경찰의 질문에 답하던 중 냉장고가 폭발했다.

사망자 중에는 미국 시민인 35세 리브카("리비") 벤-이츠하크와 그녀의 남편 마이클이 있었는데, 마이클은 두 어린 자녀를 두고 세상을 떠났다. 이스라엘 박물관에서 매년 뛰어난 아동 도서 일러스트레이터에게 수여하는 벤-이츠하크 상은 이들을 기리기 위해 제정되었다. 킹 데이비드 호텔의 아랍 회계사인 다우드 쿠리도 이 테러로 사망했다.

4.1. 주동자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PLO는 이 테러의 주범이 자신이라 밝혔다. 나중에 이 공격은 투르무스 아야[3] 출신인 아랍계 미국인 아메드 자바라, 일명 아부 수카르가 실행한 것으로 밝혀졌다. 자바라는 요르단으로 도주한 테러리스트 바셈 타빌라의 도움을 받았다.

이스라엘 경찰의 조사에 따라 자바라는 체포되어 1977년 6월 군사 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는 유죄 판결을 받고 종신형과 30년의 추가 형을 선고받았다.

2003년 아메드 자바라는 27년 동안 복역한 후 감옥에서 풀려났다. 자바라는 석방 직후 팔레스타인 언론에서 널리 보도한 베들레헴 집회에서 이스라엘 군인을 납치할 것을 촉구했다. 야세르 아라파트는 이후 그를 수감자 문제에 대한 고문으로 임명했다. 자바라는 2013년 7월 17일 라말라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당시 그의 나이는 78세였다.

5. 1975년 벤 예후다 거리 폭탄 테러(카페 나바흐 폭탄 테러)

1975년 11월 13일, 보행자 전용 쇼핑몰 근처 자파 로드의 카페 나베흐 근처에서 폭발물이 터져 6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부상당했다.

6. 1976년 벤 예후다 거리 폭탄 테러 시도 사건

1976년 4월 9일, 벤 예후다 거리에서 자동차 폭탄이 폭발하기 직전에 해체되었다. 사상자는 없었다.

7. 1976년 벤 예후다 거리 폭탄 테러 사건

1976년 5월 3일, 벤 예후다와 벤 힐렐 거리 모퉁이에 위치한 보행자 쇼핑몰에서 폭발물이 장착된 모터 스쿠터가 폭발하면서 지나가던 사람 33명이 부상을 입었고 1명이 사망했다. 부상자 중에는 예루살렘의 그리스 영사와 그의 아내가 있었다. 다음 날, 독립 기념일 전날, 지방 자치 단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슬로건으로 테러 현장에서 행사를 열었다. 팔레스타인 해방민주전선(DFLP)이 저지른 테러였다.

8. 1979년 벤 예후다 거리 폭탄 테러 사건

1979년 3월 24일, 시온 광장의 쓰레기통에서 폭탄이 터져 1명이 사망하고 13명이 부상당했다.

9. 1997년 벤 예후다 거리 폭탄 테러 사건

1997년 9월 4일, 하마스 자살 폭탄 테러범 3명이 보행자 전용 쇼핑몰에서 동시에 폭탄을 터뜨려 이스라엘인 5명과 테러범 3명이 사망했다. 이 폭탄 테러는 아시라 알-샤말리야 마을의 팔레스타인인이 수행했다.

이 공격으로 14세 소녀 3명 시반 자르카, 야엘 보트빈, 스마다르 엘하난이 사망했다. 엘하난은 평화 운동가 누리트 펠레드-엘하난의 딸이자 이스라엘 장군이자 정치인인 마티티아후 펠레드의 손녀였다.

미국 시민인 야엘 보트빈의 가족은 미국에서 이란 이슬람 공화국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 공격으로 사망한 미국인의 가족에게 2억 5,100만 달러의 배상 및 징벌적 손해 배상금이 지급되는 기본 판결이 내려졌다. 이 판결 이후 미국에는 이란 정부의 자산이 거의 없었다. 원고들은 시카고 박물관에 보관된 귀중한 페르시아 유물을 압수하여 수익금으로 팔겠다고 위협했고, 이로 인해 시카고의 페르시아 문화유산 위기가 발생했으며, 뉴욕은행에 있는 멜리 이란 은행의 계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미국 법무부가 멜리 은행을 지지하는 아미쿠스 쿠리아가 발언하며 은행이 자금을 인출할 책임이 없다고 발언했고, 그 결과 유가족들에게 불리한 판결이 내려졌다.

10. 2001년 벤 예후다 거리 폭탄 테러 사건

2001년 12월 1일, 벤 예후다 거리에서 자살 폭탄 테러범 2명이 자폭했고, 구급대원이 도착하자마자 폭발하도록 설정된 자동차 폭탄이 폭팔했다. 군복을 입지 않은 군인과 테러범을 포함하여 15~21세의 13명이 사망했고 188명이 부상당했다. 하마스는 하마스 고위 무장 세력인 마흐무드 아부 하누드를 죽인 것에 대한 보복으로 테러를 했다고 밝혔다. 가자지구의 하마스 대변인은 이 폭탄 테러로 복수심이 가라앉지 않았으며 추가 폭탄 테러를 감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랍은행, 낫넷, 크레딧 리오나리스를 상대로 하마스에 자금을 제공했다는 소송이 제기되었다.

11. 2012년 벤 예후다 거리 무차별 폭행 사건

2012년 8월 16일 밤, 수십 명의 유대인 청소년들이 시온 광장에서 팔레스타인 청소년 4명을 쫓아가 ​​그중 한 명을 의식을 잃을 때까지 집단폭행 하였다.
[1] 1876년에 창간된 이집트의 일간지[2] 1947~1948년 팔레스타인 위임통치 내전에 있던 팔레스타인의 아랍 비정규군[3] 팔레스타인 서안 지구 라말라 알비레 주에 위치한 팔레스타인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