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兵漕船. 조선 세조 7년, 1461년 10월에 개발된 조운선이자 병선. 맹선의 초기형이다.2. 내용
2.1. 개발 이전
이 항목의 내용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병조선 항목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조운 항목을 참고하였습니다.우리나라는 고려 때부터[1] 13조창제를 기반으로 하여 조운제도를 유지, 발전시켰다. 그러나 고려 말기에 각종 혼란한 상황이 벌어지면서 조운이 모두 봉쇄되고 세곡의 운반은 오로지 육운을 통해서만 이루어지게 되었고 나아가 우왕 2년에는 결국 국가의 모든 조운 활동을 정지시키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육로가 거의 발전하지 않았던 상황 상 육로만을 통한 세곡의 운반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조선이 들어선 후 태종대에 이르러 우리나라 연안 지역의 지배권을 확립하고 국가 관리하에 대규모의 조선 사업이 이루어지게 되지만 이때 건조된 수많은 조운선들이 잇따른 해난사고로 극심한 피해를 받았다. 이러한 경제적 피해로 인해 세종 때는 국가에서 조선한 관선(官船) 대신 민간의 사선(私船)을 이용하여 조운을 실시하였는데 이 때문에 세종실록에 나오는 829척의 군선은 선종(船種)과 선제(船制)가 수시로 바뀌니 아무런 규격도 없이 건조된 것으로 잡다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2.2. 개발 과정
이 항목의 내용은 한국학진흥사업단 성과포탈 : 병조선 항목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수영 항목을 참고하였습니다.이런 상황이 계속되다가 세조 대에 들어서면서 큰 개혁이 일어나게 된다.
세조 3년, 1457년에 진관 체제에 따라 처음으로 각 도에 수영이 설치되고 수군절도사가 임명되어 각 관할 지역의 수군을 효율적으로 지휘, 감독하게 된다. 기존에는 개경이나 한양에 중앙 수군만을 두었으나 이 때부터 각 지역마다 지방 관할 수군을 두고 장수들에게 평시 함대 운용 재량권을 부여한 것이다.
세조 7년, 1461년에 군선과 조선(漕船)을 관장하는 전용 관서인 전선색(典船色)을 창설하였고, 1465년에 전선색을 전함사(典艦司)로 개편하여 해운판관 등으로 하여금 서울 징청방(澄淸坊)과 서강의 외사를 통해 선박관리와 운수사업, 병선건조, 기타 수도 외 지역의 선박과 전함 등에 대한 일들을 관장하게 하였다.
이후 세조는 민간의 사선이 아닌 국가의 관선으로 나라의 조운이 이루어지게 하였고, 아울러 각 조창에서 갖추어야 할 조운선 수를 법제화하는 한편, 개수연한(改修年限)과 조운선 관리규정을 정하여 비로소 제대로 된 조운제도를 정립하였다.
이때 신숙주가 유구와 일본, 중국을 직접 방문해 각국의 선박들을 비교 검토한 후 1461년에 병조선의 개발에 대해 진헌하였고, 세조가 이에 동의하여 1465년에 완성한다. 대선은 80명, 중선은 50명, 소선은 30명이 탑승하였고, 1465년 7월 26일에 양화도(楊花渡)에서 시험운행하였으며, 8월 2일에 희우정(喜雨亭)에 세조와 신숙주를 비롯한 문무백관, 기타 왕실 가족들이 모두 모인 후, 기존의 병선들과 수전을 붙은 바 크게 성공을 거두어 그 전투력이 각광을 받게 되었다. 조운 능력 또한 800석~1000석 정도로 일반적인 조선 후기의 조운선과 거의 동일하였다.
이후 병조선은 널리 사용되었으며 점차 맹선제도로 발전하는데 후기의 맹선과의 차이는 운용인원이 50명에서 60명으로 바뀌는 정도로 아주 약간의 수정만을 거쳤다.
2.3. 의의와 한계
병조선의 발명으로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바로 무군선(無軍船)의 존재다. 무군선이란 비상시를 대비하여 예비함대로 구성한 군선들을 말하는데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와있는 무군선은 57척 뿐이나 이후 경국대전에 나오는 무군선은 249척에 이르게 된다. 이는 세조시대 이후 일반적인 조운선에까지 각종 전투병력들을 싣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휴식 없이 한계까지 운용되던 함대들이 각 항구에 예비함대를 두게 될 정도로 군선운용과 정부예산에 여유가 생기고 양적으로 크게 팽창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또한 병조선의 등장은 내륙 깊숙한 강 상류에까지 왜구들에게 겁탈당하고 이를 피해 미개척된 육로만을 힘겹게 사용하던 시대가 완전히 지나고 태종을 시작으로 세종, 세조 등의 노력에 의해 이 시기에 이르면 한반도의 조운제도가 완전히 정상 가동되고 나아가 연안 해역까지 우리나라가 완전히 주도권을 되찾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병조선과 그 후의 맹선들은 결국 기본 태생이 드랍십이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전투 능력과 크기에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배였다. 때문에 대한민국 해군이 참수리급 쓰다가 점차 이지스함 사달라고 빼앵 거리던 것처럼 이 때도 수군에서 아 이제 이런거 좀 그만 만들고 새삥으로 큰 배 좀 만들어주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를 외치게 된다. 그리하여 명종 10년, 1555년에 대형군선인 판옥선이 개발되고 이어 중형군선인 방패선(防牌船) 등이 추가로 개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