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 요새의 외관 |
독일어: Fort Vaux (포르트 보)
영어: Fort Vaux (포트 보)
1. 개요
보 요새는 프랑스 뫼즈에 위치한 19세기 말에 건설된 요새이다. 베르됭 요새 방어선(Région fortifiée de Verdun, RFV)의 일부로, 세레 드 리비에르 방어체계(Système Séré de Rivières)의 일환으로 1881년부터 1884년까지 건설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베르됭 전투의 핵심 전장이었으며, 특히 1916년 6월 2일부터 7일까지의 격렬한 전투로 유명하다.2. 건설
1881년부터 1884년까지 일반 석조 공법으로 건설되었다. 1886년에는 요새의 병영 시설을 강화하기 위해 2.25m 두께의 시멘트 콘크리트 외피를 추가했으며, 석조 구조물과 콘크리트 사이에는 1m 두께의 모래층을 삽입했다. 1887년 1월 21일, 당시 전쟁부 장관이었던 조르주 불랑제는 모든 요새, 포대, 병영의 이름을 과거 군사 지도자들의 이름을 따서 변경하는 법령을 공포했다. 이에 따라 보 요새는 아르튀르 디옹(Arthur Dillon, 1750-1794) 장군의 이름을 따서 '디옹 요새'로 개명되었다. 이 새 이름은 요새 입구의 프론톤(정면 삼각형 장식)에 새겨졌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13일 불랑제의 후임자 테오필 페롱(Théophile Ferron)이 이 법령을 폐지하면서 요새는 공식적으로 원래 이름을 되찾았다. 하지만 프론톤에 새겨진 불랑제 시기의 이름은 그대로 남았다.1904년부터 1906년 사이에 요새는 대대적인 현대화 작업을 거쳤다. 75mm 회전포탑 1기가 요새의 중심축에 설치되었고, 이 포탑의 우측과 좌측에는 관측소가 배치되었다. 장갑 관측소 2개가 추가로 설치되었다. 해자의 대응면에는 3개의 방어시설이 신설되었는데, 북서쪽의 이중 방어시설, 북동쪽의 단일 방어시설, 그리고 요새 후방을 방어하는 단일 방어시설이 그것이다. 북서 방면과 북동 방면에 위치한 첫 두 개의 대향벽 방어시설은 해자 아래를 지나는 콘크리트 통로를 통해 인접한 관측소의 본체와 연결되었다. 이 통로들은 1.25m 두께의 철근 콘크리트 상판으로 덮여 보호되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 시기까지도 관측소들이 콘크리트로 강화된 중앙 병영과는 직접 연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같은 시기에 두 개의 부르주 포좌(Casemate de Bourges)가 건설되었는데, 각각 75mm 포 2문씩을 장착했다. 이 포좌들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왼쪽 포좌는 두오몽 요새(Fort de Douaumont) 주변 지역, 포스-코트 협곡(Ravin de la Fausse-Côte), 카이예트 협곡(Ravin de la Caillette), 바질 협곡(Ravin du Bazil), 그리고 카이예트 숲(Bois de la Caillette)을 사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오른쪽 포좌는 담루프 포대(batterie de Damloup) 방향과 담루프(Damloup), 아보쿠르(Abaucourt) 마을을 사격할 수 있는 위치에 설치되었다. 이러한 배치를 통해 요새는 거의 모든 접근로를 화력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1910년부터 1912년까지는 요새 내부의 모든 시설을 연결하는 지하 통로가 완성되었다. 콘크리트로 강화된 병영은 150명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지하에는 2개의 물탱크가 설치되었다.
3. 제1차 세계 대전
3.1. 베르됭 전투 초기 상황
1916년 2월 25일, 독일군이 두오몽 요새를 점령하자 프랑스군은 보 요새의 방어를 강화했다. 하지만 요새는 1915년 법령으로 주요 화기가 철거된 상태였고, 2월 26일에는 독일군의 420mm 포격으로 75mm 포탑이 폭발했다. 요새에 배치된 4문의 75mm 포는 1915년에 이미 철거되어 기관총으로 대체된 상태였다.3.2. 전투 이전 상황
1916년 5월 24일, 실뱅 외젠 레날(Sylvain Eugène Raynal) 사령관이 요새 지휘를 맡았다. 레날은 49세의 노장으로, 알제리 제7보병연대장으로 전쟁을 시작해 1914년 9월 기관총에 어깨를 맞아 부상을 입었고, 12월에는 지휘소가 직격탄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 10개월의 입원 후 1915년 10월 1일 전선에 복귀했으나 며칠 만에 다시 다리에 부상을 입어 레지옹 도뇌르 장교 훈장을 받았다. 1916년 초 아직 회복 중이었으나, 전쟁부 장관이 부상으로 전선 복귀가 어려운 장교들을 요새 사령관으로 임명할 수 있다고 발표하자 자원했다.당시 요새의 원래 주둔 병력은 약 250명으로, 각 병과별 전문성을 고려해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 보병: 제142보병연대에서 제6중대(120명 규모)와 제3기관총중대(50명 규모) 파견
- 포병: 75mm 포의 운용을 위해 제5보병포병연대 제34포대와 제6포병연대에서 각각 25명씩 분견대 파견
- 공병: 요새 시설 관리와 폭파/건설 작업을 위해 제2, 9공병연대에서 20명의 전문인력 파견
- 의무병: 제101보병연대 소속 의무대에서 10명의 의무병 파견
6월 2일부터는 독일군의 공세로 인해 주변 진지에서 밀려난 부대들이 요새로 피신해 들어왔다:
* 제53보병연대 제3기관총중대[1]
* 제142보병연대 제5, 7, 8중대[2]
* 보급이 바닥난 제101보병연대의 일부 병력들도 6월 1일 오후 보 연못에서 후퇴해 옴
이로 인해 요새가 포위되었을 때 레날 사령관은 500명 이상의 병력과 4마리의 전서구 비둘기, 그리고 한 마리의 코커 스파니엘[3]을 지휘하게 되었다. 식량은 부족했으나 5,000리터의 물탱크가 있어 용수 공급은 괜찮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3.3. 보 요새 전투(1916년 6월 2일-7일)
두오몽 요새에서의 전투 경험을 바탕으로, 독일군은 플뢰리 마을(Fleury-devant-Douaumont)과 수빌 요새(Fort de Souville) 방면 진출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보 요새를 새로운 돌파구로 지목했다. 6km 전선에 4:1의 병력 우위를 확보했으며, 포병력도 압도적이었다.주요 전투 경과:
- 6월 1일: 독일 제39보병연대 4개 중대가 맹렬한 포격 지원 하에 요새로 접근, 프랑스군은 지하실로 피신했으나 이미 식량과 의약품이 부족한 상황
- 6월 2일: 북쪽의 이중 대향벽 진지에서 독일군이 화염방사기로 공격, 프랑스군은 병영으로 후퇴, 북동쪽에서는 격렬한 백병전 끝에 독일군이 단일 대향벽 진지를 점령하고 지하 연락갱도 침투, 프랑스군은 손에 잡히는 모든 것으로 임시 방벽을 설치해 저항, 좁은 통로(높이 1.70m, 폭 1.20m)에서 수류탄, 화염방사기, 총검, 참호삽 등을 이용한 치열한 근접전 전개, 600명 이상의 프랑스군이 지하 병영에 밀집, 더위가 극심해지고 지하폭발로 물탱크가 파손되어 갈증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
- 6월 4일, 6일:독일군이 서쪽 통로를 통해 공격, 북동쪽 단일 대향벽에서 출발해 프랑스군을 더 깊은 지하실로 밀어냄, 일부 프랑스군이 콘크리트 틈새로 탈출 시도
- 6월 6일:프랑스군의 구원 공격이 시도되었으나 신속히 독일군에 의해 저지됨, 고립된 수비대는 이제 자신들의 힘으로만 버텨야 함을 깨달음
- 6월 7일 오전 6시 30분:물 부족으로 부상병들의 육체적, 정신적 붕괴가 시작, 레날은 마지막 전서구로 "우리는 아직 요새를 지키고 있다. 적의 독가스와 매캐한 연기로 상황이 위험하다"는 메시지 전송, 전서구마저 죽고 더 이상의 저항이 불가능해지자 250명의 생존자들이 항복
그렇게 레날과 그의 부하들은 포로가 되었다. 레날은 독일 황태자의 사령부로 호송되어 용맹한 저항에 대한 찬사를 받았다. 황태자는 레날의 군도를 찾으려 했으나(실제로는 부상으로 지팡이를 짚느라 휴대하지 않았음), 독일 공병용 단검을 존경의 표시로 하사했고, 10시간 후에는 프랑스 장교용 검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