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0 17:56:10

보탄판

1. 개요2. 역사
2.1. 설계와 특허2.2. 왜 이것을 사용하였나?2.3. 1차대전 이후
3. 장점과 단점
3.1. 장점3.2. 단점
4. 사용 총기
4.1. 실제 총기4.2. 가상 총기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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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탄판에 탄이 끼워진 모습. 일본군 92식 중기관총의 것이다.
보탄판을 사용하는 호치키스 기관총의 작동 영상.
비숙련 부사수의 연속 급탄 실패와 성공 영상.

Portative strips
프랑스의 호치키스 기관총, 일본의 3년식 기관총92식 중기관총 등에 쓰인 탄띠, 혹은 탄 클립의 일종. 개방 노리쇠 방식 기관총에서 주로 사용된 물건으로, 탄띠와 마찬가지로 연발 사격을 위해 만들어진 탄 공급 보조도구다.[1]

이는 호치키스 기관총에서 가장 먼저 채용되었는데, 실제로는 호치키스 기관총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이미 하이럼 맥심맥심 기관총부터 탄띠 급탄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 방식은 기관총의 개발자인 하이람 맥심이 프랑스에서도 특허권을 따낸 상태라, 호치키스 사에서는 해당 방식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라는 말이 한국을 중심으로 많이 떠돌고 있으나, 사실 이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 그 이유는 다음 문단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2. 역사

2.1. 설계와 특허

호치키스 사는 맥심 기관총이 최초로 등장하여 강한 인상을 남기자 자신들도 기관총을 개발할 결심을 하게 된다. 이때 자신의 설계를 팔기 위해 프랑스에 와 있던 오스트리아의 대령이었던 아돌프 오드콜렉 폰 우체다 공작이 개발한 신형 자동화기 설계안을 구매하게 되고, 본격적으로 신형 기관총 제작에 나선다.

오드콜렉은 맥심 기관총과는 다른 더 간단한 구조의 가벼운 기관총을 개발하고자 했다. 그는 기존 (반)자동화기의 아이디어에 주목했고 이를 응용하여 가스압 작동식 기관총을 설계한다. 따라서 이 총은 '소총' 베이스였고 그 때문에 처음부터 설계상으로 수랭 재킷을 부착하기 곤란한 물건이었다.[2] 그리고 알려진 바와는 달리 1891년 설계안까지는 벨트 급탄만 고려되었다.

이 물건의 벨트 급탄방법은 맥심과는 달랐다. 맥심 기관총은 탄벨트의 탄약을 뒤로 뽑아 약실까지 올린 다음 급탄이 이뤄지는 구조로 이미 존재했던 사수용 탄 벨트와 아주 유사했다. 반면 오드콜렉의 디자인은 탄약을 뒤로 뽑는 게 아니라, 벨트와 자연스럽게 분리되는 실 혹은 철사 고리 등을 이용하여 탄약을 사전에 분리하는 방법이었다. 따라서 노리쇠 설계가 간략화되므로 이론적으로는 맥심 기관총보다 훨씬 간단한 작동 방식이었다. 하지만 실제 테스트를 해보니 이 벨트 급탄방식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기어가 벨트를 물고 가면 탄약만 분리하는 경사로를 따라 벨트로부터 뜯기는 구조였기 때문에 무리가 있었다. 따라서 1892년 설계안에서는 더욱 클립 형태의 구조에 끼워지게 하여 경사로식을 버리고 그냥 밀고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 미국에 등록된 1892년 설계 특허

호치키스 사는 이 설계를 바탕으로 신형 기관총을 제작하였고, 로렌스 빈센트 베넷이 이를 더욱 보완하여 1896년 비로소 새로운 기관총의 설계를 완성하여 등록한다. 기존 설계안의 벨트는 천에 금속제 고리를 끼워 고정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내구성과 생산성에 문제가 있었으므로 반려되었고, 금속제 판에 끼우는 안으로 대체되었으며 최종 디자인을 특허로 제출하게 된다. 그리고 1898년 비로소 호치키스 M1898 기관총을 만들게 된다.

따라서 맥심의 특허를 피하려고 저렇게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더 정확한 표현은 가스압 설계구조와 새로운 급탄구조를 살리다 보니까 보탄판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리고, 최종 설계안은 보탄판이었으나 당연히 탄띠보다 지속 사격에 손이 많이 가는 구조이다 보니 보탄판 구조를 응용한 250발 들이 탄띠도 곧 개발되었다. 실제로 호치키스 기관총의 고객 중 하나였던 노르웨이의 경우 보탄판보다 탄띠를 사용한 사진이 많이 보인다.

2.2. 왜 이것을 사용하였나?

호치키스사는 이 기관총을 만들었지만, 맥심 기관총만큼의 재미는 보지 못했다. 공랭식이었기 때문에 쉽게 과열되고, 장전수가 없다면 탄띠보다는 지속 사격능력에서 밀렸기 때문에 주 고객층들에게 어필하기에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 외에는 딱히 장점이 없었다. 그런데 유독 프랑스는 1차대전 중 이 급탄장치를 열심히 사용한다.

프랑스가 보탄판을 선호한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당시 맥심 기관총의 한계 때문이었다. 1차대전이 발발하기 전 열강들은 식민지의 저항군을 소수의 인원으로 획기적으로 제압하기 위하여 기관총을 들였는데, 보호해야 할 지역이 크고 넓거나 밀림과 같은 극단적인 환경이 대부분이었던 프랑스는 다른 열강들과 달리 특정 위치에 고정된 기관포탑으로 저항군을 제압하기 힘들었다. 따라서 기동성과 경량화를 중시하였고, 그 때문에 맥심 기관총에서 비롯된 냉각 재킷의 단점과 기존 캔버스제 탄띠의 단점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맥심 기관총의 단점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 냉각 재킷
    냉각 재킷은 내구성이 너무 약해서 총알구멍이 쉽게 나곤 했고, 잘못 맞아 물이 다 빠져나가 버리면 총에 전혀 문제가 없더라도 사용할 수 없었다. 1차대전 당시 독일군은 이 문제 때문에 자국산 MG08에 냉각 재킷용 방탄판을 증설할 정도였다. 또한, 총 자체를 사용하는데 탄약과 함께 물도 같이 이동해야 했으므로 보병들의 무게 부담이 심해져 기동성이 떨어졌다.
  • 캔버스제 탄띠
    캔버스제 탄띠는 급탄에 복잡한 구조가 필요하여 총을 경량화 설계할 수 없었다. 당시 사용되던 하이럼 맥심식 탄띠는 기존 사수들이 허리에 차고 다니던 탄띠의 개량형에 지나지 않았다. 긴 캔버스제 띠에 탄약이 하나 들어갈 포켓이 일정 간격으로 있었기 때문에(원활한 공급을 위해 금속제 가이드가 추가로 달려 있긴 했다.) 이를 잘라 그냥 사수용 탄띠로 사용해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렇기에 기관총에 탄 공급을 하기 위해서는 탄약을 뒤로 잡아 뽑아 약실로 올린 뒤 노리쇠로 밀어 넣어야 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지금 와서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당시 맥심 기관총이 주목받았던 이유가 이 부분 설계를 가장 완벽하게 해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당시 맥심 기관총 계열은 복잡한 구조가 필수였고, 총 자체의 무게와 부피를 개선할 수가 없었다. 또한, 천 재질이다 보니 습기에 약해 수축하면서 탄약을 조여 급탄을 방해했다. 그리고 당시 캔버스제 탄띠는 기본적으로 200~300발 이상의 대용량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걸리적거렸다.# 한글 자막[3]

보탄판은 이러한 단점들을 간단하게 해결했고, 이에 프랑스군이 보탄판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보탄판은 탄약을 그냥 밀고 들어가도록 설계되었으므로 기존 탄창식 경기관총의 구조와 별 차이가 없어 저렴한 가격과 가벼운 무게가 덤으로 딸려왔다. 금속제였으므로 환경에 매우 강했으며, 20~30발의 적은 장탄 수로 걸리적거리는 문제가 없었기에 기동성이 높았고, 지속 사격이 필요하더라도 교환 방법이 간단하여[4] 부사수가 옆에서 잘 밀어 넣어주기만 하면 충분한 지속 사격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또한 더 강한 지속 사격 능력이 필요할 때도 있기 때문에, 2~3발의 작은 보탄판을 관절로 연결하여 200~300발도 무리 없이 소화하는 탄띠도 제작하였고, 이를 보병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50발 들이 관절식 탄띠 테스트 영상[5][6]

또 하나 프랑스가 탄띠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8×50mmR 르벨 탄의 급격한 테이퍼각 때문이었다. 8mm 르벨 탄을 개발할 때 개발 기간이 짧게 주어지는 바람에 그라 소총에 사용되던 기존의 11×59mmR 그라 탄을 넥다운했는데, 이 때문에 목과 바닥의 직경차가 커져서, 7.92×57mm 마우저의 목과 바닥의 직경차가 약 2mm, .303 브리티시가 3mm 정도 차가 나는 것과 달리 르벨 탄의 경우 무려 5mm나 되었다. 따라서 탄피가 사실쌍 원뿔형이 되어 일반적인 캔버스제 탄띠에 잘 고정되지 않아 그대로 뒤로 빠져버리기 때문에, 구조상 탄약을 측면에서 잡아주는 보탄판을 선택해야 했다.[7]

2.3. 1차대전 이후

1차대전이 끝나고서도 프랑스군은 이 보탄판 시스템에 별 불만이 없었다. 1차대전기 급부상한 탄창식 경기관총은 성능은 우수했으나, 그놈의 비싸고 커다란 탄창이 문제였기 때문에 아직 전 군에 보급되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실제로 탄창은 설계하기도 힘들고 프레스 기술이 충분히 발전되지 않은 1차대전기에는 대부분 절삭 후 용접으로 제작하여 생산비도 비싼 데다 전장에서 망실되기도 쉬웠다. 게다가 1차대전 경기관총격으로 사용한 쇼사에 크게 데여 신형의 7.5×54mm French 탄[8]을 제작하고 나서야 FM 24/29를 도입하게 된다. 이후 프랑스는 전쟁 중 우수한 성능을 보였던 미국의 M1919 기관총을 들였고, 대부분의 기관총을 경량 탄창식으로 바꾼다. 그러나 빠른 리타이어로 완전한 교체는 이루어지지 못했고, 일부 M1914를 비시 프랑스에서 사용하게 된다.

따라서 2차대전 중 기관총에[9] 이 방식을 사용한 군대는 일본군이 유일하다시피 했다. 일본군은 기존 철제 보탄판을 황동으로 교체하여 내구성이 더욱 뛰어나도록 했지만, 그 외에는 별 개조 없이 그대로 사용하게 된다. 문제는 상대가 탄띠식 경기관총/중기관총을 사용하던 미군이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존 브라우닝이 개량한 탄띠 시스템은 기존 맥심식 탄띠의 단점을 상당수 해결했다. 탄 간격이 좁아져 길이 대비 탄 수가 획기적으로 늘었고, 그의 천재적인 설계로 구조도 더 간단하고, 무게도 더 가벼웠다. 탄 길이는 기존에서 100발 들이로 줄여 거치적거림이 덜했고, BAR이 함께 사용되어 기동전에서도 전혀 무리가 없었다. 그래서 단점이 두드러진 것이지 딱히 보탄판 문제로 밀린 것은 아니었다. 당장 과달카날에서 노획한 일본의 보탄판식 기관총들을 미군은 잘만 사용했기 때문이다.

2차대전 중 기존 캔버스제 탄띠의 단점을 해결한 금속 링크식 탄띠를 사용한 기관총이 독일에서 등장하게 된다. 실제 금속제 탄벨트는 영국에서 먼저 만들어졌고, 1차대전 중 각국에서 항공용으로 종종 사용했다. 하지만 모두 포켓식이었기 때문에 맥심 기관총의 벨트를 천에서 금속으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았다.[10] Push Through 방식의 금속 탄벨트는 독일이 최초이다. 환경에도 강하고 지속사격능력도 우수한 데다, 밀어 넣기만 하면 되는 간편한 구조의 이 물건은 보탄판과 캔버스제 탄띠보다 훨씬 진보된 물건이었고, 대전 이후 프랑스도 이 물건을 사용한 기관총을 사용하게 된다. 재미있게도 보탄판식 기관총의 급탄 메커니즘은 현대 금속 벨트식 기관총의 급탄 메커니즘의 조상 격으로 유사성이 매우 많다. 후손이 조상을 밀어내면서 완벽히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셈이다.

재질 같은 경우 프랑스, 이탈리아는 철을 사용했지만, 일본은 황동을 사용했다. 보탄판을 꽂은 모습을 보면 알겠지만, 일본은 황색이고 보탄판이 아래로 처지는 정도가 프랑스, 이탈리아 것에 비해 크다. 황동제는 어디 찍혀서 찌그러지고 작동 불량이 나기도 쉬웠다고 한다. 현대에 밀덕들을 위해 스프링강을 쓴 강철제 리프로덕션 보탄판을 만들어 써 보니, 내구도가 매우 짱짱해서 가장 좋다는 평가를 받았다.

3. 장점과 단점

3.1. 장점

  • 내구성
    전 금속제로 제작되어 내구성이 캔버스제 탄띠에 대해 월등했다. 특히 캔버스제 탄띠는 수분에 의한 팽창 및 수축으로 급탄 불량을 일으켰다. 또한, 1차대전 중 사용한 쇼사는 탄창식이었지만, 탄창의 열악한 내구성 때문에 악평에 시달려야 했고, 이 또한 프랑스군의 평가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기도 했다.
  • 무게와 길이
    보탄판은 짧게는 5발에서 많아 봐야 50발로 제작되었고, 일반적으로 20~30발을 사용했다. 그래서 탄띠보다 무게 면에서 유리했고, 사격 후 이동하더라도 그냥 총 째로 들고 이동하면 되었기에 기동성이 좋았다. 또한, 직선형이라 차곡차곡 쌓으면 되기에 탄통 내에 적재하기도 유리했다. 하지만 탄띠 식은 200~300발, 많게는 500~1,000발 들이도 있었기 때문에 매우 무거워 기동성이 형편없었고, 말아 넣어야 하기에 부피도 컸으며, 지나치게 뻣뻣하여 부사수가 잡아줘야 원활한 급탄이 가능했다. 게다가 맥심식 탄띠는 탄 사이사이에 금속제 가이드가 부착돼서 같은 탄 숫자라도 현대식 탄띠보다 2배는 더 길어 걸리적거림이 상상을 초월했다. 그래서 기관총 사수들은 걸리적거리는 가이드를 사용한 탄띠를 칼로 잘라버리곤 했다.
  • 가격
    보탄판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로, 판 하나만 가공하면 되기에 제작방식이 매우 간단하여 탄 클립 수준으로 저렴했다. 따라서 전장에 유기하더라도 큰 문제가 없어 그냥 마구마구 찍어내기 편했다.
  • 화기 설계의 간편성
    앞서 언급한 바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탄띠는 기존 탄피를 배출하고 탄띠에서 탄을 분리한 후 약실로 밀어 올려서 노리쇠로 공급을 해야 한다. 따라서 맥심 기관총과 같이 거대한 노리쇠에 상하 전후로 노리쇠가 왔다 갔다 해야 했다. 이렇게 하면 구조가 매우 복잡해지고, 이에 비례하여 무게도 무거워진다. 반면 탄창식은 노리쇠가 후퇴 전진만 하면 추출 공급이 한 번에 진행되기 때문에 매우 간편하여 설계 여유가 컸다. Mle 1909가 괜히 가벼운 것이 아니다. 보탄판은 메커니즘 상 탄창식과 유사했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서 자유로웠고, 장전속도는 탄창보다 빨랐기 때문에 어차피 부사수가 있다면 추가공급에 의한 지속 사격능력은 거의 유사해진다.

3.2. 단점

  • 지속 사격능력
    보탄판은 지속 사격능력이 좋아져 봐야 탄창 수준이었다. 부사수가 숙련된 사람일 경우 탄띠에 근접한 사격능력을 낼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거나 혹은 부사수가 없으면 탄창보다 약간 나은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거치식 중기관총을 이런 물건으로 쓰게 되면 탄띠식 화기보다 당연히 화력에서 밀리게 된다. 따라서 여러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캔버스제 탄띠보다 대중화되는 데 실패하게 된다. 따라서 무게 문제가 해결되면서 보탄판식은 탄띠식에 비해 나을 것이 없었고, 맥심 탄띠에서 개선된 브라우닝식 탄띠가 보급되며 프랑스 또한 보탄판을 버리고 탄띠식으로 간다.
  • 화기 무게 밸런스
    측면공급식 탄창과 유사한 문제인데 판이 좌우로 움직이기 때문에 총의 좌우 흔들림이 심해진다. 삼각대나 좌우가 고정된 양각대를 사용하는 기관총이면 큰 문제가 없을지 모르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명중률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때문인지 프랑스는 호치키스 M1909 기관총을 보병용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 탄창의 보급
    기술이 발전하면서 탄창이 저렴해지고 많이 보급되어 더는 보탄판의 저렴함이 탄창의 장점을 완전히 덮기 힘들어졌다. 환경 내구성은 탄창이 훨씬 월등하고, 설계만 잘할 경우 급탄 불량도 적고, 교환과 보급도 쉽다.[11] 따라서 1925년 프랑스는 BAR 베이스의 탄창식 FM 24/29 경기관총을 도입하여 쇼사와 Mle 1909와 같은 보탄판식 경기관총을 모조리 교체하려 한다.
  • Push Through식 금속 탄띠의 보급
    그보다도 근본적인 문제가 등장했는데, 바로 새로운 금속 탄띠가 등장한 것이다. 금속 탄띠는 기존의 캔버스제 탄띠의 단점을 모조리 해결하여 유지관리가 쉬웠다. 부피도 그리 크지 않아 탄 통 안에 쌓아 넣기도 편했고, 캔 안에 말아 넣기도 편했다. 보탄판은 금속 탄띠의 조상 격인 물건이었기에 나을 것이 전혀 없었고, 곧이어 대부분의 국가가 모조리 금속 탄띠를 사용하게 된다.

4. 사용 총기

4.1. 실제 총기

4.2. 가상 총기


[1] 참고로 일부 대공포나 연발 박격포 등에 비슷한 방식이 사용되었지만 이것들을 보탄판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2] 존 브라우닝이 설계한 M1895 콜트-브라우닝 기관총 또한 가스압 작동식 기관총이었고, 수랭식 재킷이 장착되지 않았다.[3] Forgotten Weapons의 질의 문답 영상.[4] 보탄판은 장전된 탄약을 다 쏘게 되면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그래서 비었다 싶으면 부사수가 대기하고 있다가 다음 것을 밀어 넣기만 하면 되었다. 그리고 보탄판이 배출되면 다음 보탄판을 재장전해서 사격해야 한다고 오해할 수 있지만, 실제 운용 시에는 탄이 다 떨어질 때쯤 이미 장전된 보탄판에 다음 보탄판을 연결하는 식으로 연속 사격을 했기 때문에 재장전을 하느라 사격을 중단할 필요가 없었다.[5] https://smallarmsreview.com/french-feed-devices-and-strip-loader-for-hotchkiss-model-1914-machine-guns/https://www.forgottenweapons.com/light-machine-guns/hotchkiss-aerial-gun/심지어 2,3발짜리 보탄판을 엮은 관절씩 탄띠뿐 아니라 1발씩 연결되는 탄띠도 사용했다.[6] 하지만 관절식 보탄판의 지속 사격능력과 호치키스 기관총의 낮은 발사속도로 인한 화력 문제로 항공기의 주 무장으로는 프랑스군도 영국의 빅커스 기관총을 이용했다.[7] 이러한 르벨 탄의 큰 직경차는 쇼샤 탄창이 반원형이 되게 하는 등 자동화기 설계에 어려움을 더했다. 프랑스군에서도 이 탄약의 구조적 불리함을 인지하고 있어서 A6 뫼니에와 함께 7×57mm 탄을 개발했다가 1차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소총과 함께 사장되었으나, 전간기에 7.5×59mm 프렌치 탄을 거쳐 7.5×54mm 프렌치를 채용했다.[8] 정확히는 7.5×57mm MAS 탄약으로 르벨 탄약을 대체하려 했으나, 탄피 길이가 7.92 마우저와 같아 탄의 혼동 가능성이 제시되어 탄피 길이를 54mm로 줄이게 된다.[9] 기관총이 아닌 대공 기관포의 경우에는 2차대전기에도 보탄판을 사용한 경우가 좀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이탈리아의 브레다 20/65.[10] 이런 형태의 탄띠는 지금도 PKM이 사용한다.[11] 보탄판은 보기보다 탄약을 하나하나 끼우기 힘들다. 탄창은 요령만 있으면 주르륵하고 한 번에 삽탄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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