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346년, 전연과 부여 간에 벌어진 전쟁.2. 상세
부여 - 모용선비 전쟁을 겪고 타격을 받은 부여는 국가의 중심지를 기존의 지린성 일대에서 서쪽의 농안 지역으로 옮겨 살고 있었다.하지만, 숨돌림 틈도 잠시, 346년, 전연의 태조 문명제 모용황(333~348 재위)의 침입으로 부여왕 현을 포함한 무려 50,000여 명이 포로로 끌려가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게 된다. 이 전쟁으로 부여는 사실상 붕괴하게 된 것이다.[1] [2]
[1] 이때 끌려간 인구가 50,000명이 아니라 50,000호로 알려져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구당서》를 《신당서》로 옮겨 적을 때, '구'(口)를 '호'로 잘못 적은 부분이 많았던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2] 여담으로, 이보다 좀 더 이른 시기인 미천왕(제15대, 300~331 재위)이 다스리던 고구려와 이전에 부여를 침공했던 모용외의 모용선비(훗날의 전연)가 요동 지역을 두고 전쟁을 벌이던 시기에 고구려의 속국으로 전락한 것으로 보인다. <모두루 묘지명>에 미천왕 다음 왕인 고국원왕(331~371 재위) 시기에 대형 관직을 맡은 염모라는 인물이 전연이 북부여를 침공하자 이를 격퇴하여 '북부여 수사'라는 관직에 임명되고, 제19대 광개토대왕(391~412재위) 시기의 그 후손인 모두루까지 대대로 북부여 수사의 관직을 맡아왔다는 내용이 적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