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07:14:49

블라스티밀 코페츠키

파일:Vlastimil Kopecký.jpg
이름 블라스티밀 코페츠키
Vlastimil Kopecký
출생 1912년 10월 14일
사망 1967년 7월 30일 (향년 54세)
국적 파일:체코 국기.svg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지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빌레모프
포지션 센터 포워드, 아웃사이드 레프트 포워드, 하프백
신체조건 167cm / 69kg
소속팀 라피드 비노흐라디 (1927-1932)
SK 슬라비아 프라하 (1932-1951)
ChAFC (1952-1953)
감독 SK 슬라비아 프라하 (1959)
국가대표 26경기 8골 (체코슬로바키아 / 1932-1948)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선수 생활2.3.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뒷이야기5. 수상
5.1. 클럽5.2.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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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체코의 전 축구인.

2. 생애[1]

2.1. 어린 시절

코페츠키는 빌레모프(Vilemov)에서 태어났지만 코페츠키의 가족들은 그가 10살이 되던 해 프라하로 이사를 왔다. 그의 가족들은 루츠브루그스카야(Lutsburgskaya) 거리에서 살았으며 그의 아버지는 출판사에서 일했고 어머니는 체코의 러시아 성가대 가수였다. 코페츠키는 그의 어머니에게 피아노등 악기를 배우면서 라피드 비노흐라디(Rapid Vinohradi) 클럽에서 14살 무렵부터 축구를 처음 시작했다.

코페츠키는 당시에는 흔치 않은 가죽 축구공을 생일 선물로 받았는데 이 선물로 그는 축구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첫 경기부터 골을 넣는 등 축구에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2.2. 선수 생활

2.2.1. 클럽

코페츠키는 16살부터 라피드 비노흐라디 1군에 소속되었고 AC 스파르타 프라하에서 코페츠키를 주목해 영입하려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코페츠키의 아버지가 이 이적을 극렬 반대하여 영입은 성사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그의 아버지가 SK 슬라비아 프라하서포터였기 때문이었다. 1930년 4월, 코페츠키가 18살 때 슬라비아 프라하도 이적 제의를 했지만 코페츠키가 거절했다. 경영학 공부를 마쳐야 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의 아버지가 체격이 작은 코페츠키가 축구 선수로 살아가는 것에 우려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결국, 코페츠키는 20살이 되던 1932년 봄에 슬라비아 프라하로 이적했고 이 곳에서 남은 커리어를 보내게 된다. 그는 4월 1일 FC 빅토리아 플젠을 상대로 데뷔했고 다음 주에는 첫 골을 넣었다.

코페츠키는 레프트 하프백으로 데뷔했지만 클럽에서 공격수로 주로 활약했고 1937년, 요제프 비찬이 입단한 후에는 그를 보좌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럼에도 코페츠키는 리그 통산 252골을 넣어 역대 득점 2위에 자리하고 있다.[2]

그러다 1951년, 코페츠키는 추가 수입을 위해 슬라비아, 스파르타, 몇몇 하키 선수들과 친선 경기를 뛰었는데 이로 인해 체코슬라비아 축구계에서 퇴출되었고 결국 ChAFC에서 두 시즌을 보낸 뒤 은퇴하게 되었다.

2.2.2. 국가대표

SK 슬라비아 프라하로 이적한 코페츠키는 젊은 재능으로써 곧 체코슬로바키아 대표팀에 선발되었지만 데뷔전에서 스위스에 1대5로 대패하는 굴욕을 겪었다.

하지만 코페츠키는 대표팀에서 금방 자리를 잡지 못했고 그렇게 자신의 첫 월드컵을 맞이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코페츠키는 단 1분도 피치를 밟지 못했다.

코페츠키는 1936년부터 대표팀 주전으로 발돋움했고 1938년 월드컵에서 뛰어난 활약을 선보였다. 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는 8강에서 브라질월드컵 역사에 길이 남을 난투극[3]을 벌였다. 이틀 후의 재경기에서 코페츠키는 선제골을 넣었지만 후반에 브라질에 2골을 내주며 역전패를 당했고 체코슬로바키아는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 코페츠키는 브라질 선수에 의해 코뼈가 부러졌다.

코페츠키는 1948년까지 대표팀에 머무르면서 26경기에 출전, 8득점을 올렸다. 주장으로도 2경기 출전했다.

2.3. 이후

1959년 잠시 친정팀의 감독을 맡았던 코페츠키는 1967년 7월 31일, 슬라비아 프라하의 올드 멤버들과 축구 경기를 즐기다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고 프란티셰크 플라니치카가 같이 동행했지만 코페츠키는 끝내 일어나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체코 축구 역사상 손꼽히는 테크니션. 167cm로 키는 작았지만 헤딩에 능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왼발 사용에 능하고 수비력도 좋아 레프트 하프백으로도 뛸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1939년, 이탈리아의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는 코페츠키를 유럽 최고급 하프백으로 꼽기도 했다.

4. 뒷이야기

  • 코페츠키의 마지막 대표팀 경기는 1948년 8월 29일의 오스트리아전이었다. 코페츠키는 당시 나이 35세 319일로 체코슬로바키아 대표팀 역사상 최고령 출전 기록 보유자이다. 현재의 체코 대표팀까지 최고령 출전 기록의 범위를 넓혀도 얀 콜레르, 로만 후브니크에 이어 3위에 해당한다.
  • 코페츠키는 선수 시절에도 피뢰침 설치 기사, 운전 기사 등 여러 직업을 가지며 투잡을 뛰었고 은퇴 후에도 트럭 운전 기사, 영업 사원으로 일했다.

5. 수상

5.1. 클럽

  • 체코슬로바키아 1부리그 우승 5회: 1932–33, 1933–34, 1934–35, 1936–37, 1946-47(SK 슬라비아 프라하)
  • 보헤미아-모라비아 리그 우승 4회: 1939–40, 1940–41, 1941–42, 1942-43(SK 슬라비아 프라하)
  • 미트로파 컵 우승 1회: 1938(SK 슬라비아 프라하)
  • 체코슬로바키아 1부리그 준우승 4회: 1935-36, 1937-38, 1945-46, 1947-48(SK 슬라비아 프라하)
  • 보헤미아-모라비아 리그 준우승 2회: 1938-39, 1943-44(SK 슬라비아 프라하)

5.2. 국가대표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2] 1위는 바로 코페츠키가 보좌했던 그 선수다.[3] 이 경기는 보르도의 전투, 보르도의 난투극으로 유명한 경기로 월드컵 난투극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경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