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07 23:23:08

프란티셰크 플라니치카

체코의 前 축구선수
파일:external/m.blog.hu/Planicka.jpg
이름 프란티셰크 플라니치카
František Plánička
출생 1904년 6월 2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라하 지슈코프지구
사망 1996년 7월 20일 (향년 92세)
체코 프라하
국적 체코 파일:체코 국기.svg
신체 172cm | 체중 68kg
직업 축구선수 (골키퍼 / 은퇴)
소속 선수 SK 슬라비아 프라하 (1923~1939)
국가대표 73경기 (체코슬로바키아 / 1926~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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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프라하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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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수상
4.1. 클럽4.2. 국가대표4.3.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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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체코의 前 축구선수. SK 슬라비아 프라하에서만 뛴 원클럽맨이다.

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프라하에서 태어난 플라니치카는 어렸을 때 여러 클럽을 전전했고 성인팀 데뷔 직전 무렵에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팀이던 AC 스파르타 프라하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스파르타 수뇌부에선 플라니치카가 키가 작다는 이유로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19세부터 고향 프라하를 연고로 하는 팀들 중 명문 클럽이자 스파르타의 라이벌인 SK 슬라비아 프라하에 정착했다. 이 정착 과정도 복잡했는데 원래 슬라비아 프라하 입단 직전에 플라니치카는 SK 부베네치(Bubeneč) 소속이었지만 부베네치의 허락 없이 슬라비아 프라하의 리저브 팀 훈련에 참가했고 시합에까지 참가했다. 결국 가명을 쓰면서까지 슬라비아 프라하의 경기에 출전하던 플라니치카는 이 일로 300 코루나의 벌금을 물게 되었다. 슬라비아 프라하는 결국 플라니치카를 800 코루나의 이적료를 주고 부베니치에서 데려왔다.

지금에서야 슬라비아 프라하는 방황을 멈추고 체코 리그를 다시 주름잡고 있지만 30년대에는 플라니치카, 체코슬로바키아 대표팀 역대 최다 득점자 안토닌 푸치 등을 앞세워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지금보다 더 강한 맹주로 군림했었다. 플라니치카는 이 클럽에서만 16년을 뛰면서 골문을 든든히 지켰고 슬라비아 프라하는 그의 활약에 힘입어 30년대 체코슬로바키아 리그 최강팀으로 역사에 남았다.

슬라비아 프라하의 위세는 체코슬로바키아 밖에서도 대단했는데 1932년 미트로파 컵에서 당시 이탈리아 최강팀 유벤투스 FC를 만나 유벤투스를 4대0으로 꺾어버린 적도 있었다.[2] 하지만 이는 슬라비아 프라하, 유벤투스 모두에게 흑역사인데 초반에 2골을 먼저 넣은 슬라비아 프라하는 훼방과 시간 끌기로 남은 시간을 보내버렸다. 이에 화가 난 유벤투스 팬들은 쓰레기를 슬라비아 프라하 선수들에게 투척했고, 이 과정에서 골키퍼 플라니치카가 유벤투스 팬들이 던진 물건에 맞아 큰 부상을 입었다. 이 때문에 슬라비아 프라하는 2차전을 포기했고, 주최측에서는 이 일에 책임을 물어서 두 팀을 모두 탈락시켜버리고 말았다.

그는 슬라비아 프라하에서 16년간 거의 천 경기 가까이 뛰었고 그 과정에서 73%의 승률을 올리면서 리그 우승만 8회를 차지했다. 그리고 아쉬움이 남았던 미트로파 컵 우승도 1938년에 마침내 달성했다.

2.1.2. 국가대표팀

플라니치카는 1926년부터 국가대표 생활을 했는데 그의 첫 대표팀 경기는 1926년 1월 17일의 이탈리아전이었다. 이 경기에서 체코슬로바키아는 이탈리아에 1대3으로 패했다. 그 이후 플라니치카는 12년의 국가대표팀 생활 동안 무려 73경기를 뛰었다.[3] 또한 그는 그가 대표팀에서 뛴 73경기 중 37경기를 주장으로서 참가한 1930년대 체코슬로바키아 대표팀의 간판이자 대체 불가능한 자원이었다.
2.1.2.1. 1934년 월드컵
체코슬로바키아 대표팀의 주장으로 월드컵에 참가한 플라니치카는 매 경기마다 실점은 있었지만 인상적인 방어를 선보이며 팀을 결승에까지 올려놓았다. 그리고 결승전은 이탈리아잔피에로 콤비와의 골키퍼 대전. 이 혈투에서 플라니치카는 이기지 못하면 죽는다는 마음으로 뛰던 이탈리아 선수들의 투지에 결국 무릎을 꿇었다. 2골 다 플라니치카조차 막을 수 없는 훌륭한 골들이었지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2.1.2.2. 1938년 월드컵
1라운드에서 연장에만 3골을 넣어 네덜란드를 따돌린 체코슬로바키아의 다음 상대브라질이었다. 보르도에서 만난 두 팀은 월드컵 역사에 길이 남을 난투극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플라니치카는 어떻게 경기는 마쳤지만 경기 중에 오른팔이 부러져 재경기를 뛸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체코슬로바키아는 브라질에게 재경기에서 패배하여 8강에서 짐을 쌌고, 그것이 플라니치카의 마지막 A매치가 되었다.

팀 성적은 아쉬웠지만 240분간의 경기에서 단 한골만을 허용한 플라니치카에게[4] 그 대회에서 베스트 골키퍼의 영광이 돌아온 것은 그나마 그에게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2.2. 은퇴 이후

은퇴 후에도 금욕적인 생활과 함께 축구를 즐기며 건강관리를 잘해서인지 꽤나 오랫동안 정정한 모습을 보였다. 1996년, 자신의 친정팀 SK 슬라비아 프라하가 48년만에 체코 리그 우승을 차지했을 때도 91세의 노구를 이끌고 축하연에 참석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두 달 후 플라니치카는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장례식에 대표팀의 먼 후배였던 카렐 포보르스키도 참석했는데 그는 원래 그 날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와의 입단 계약일이었지만 입단 계약을 미루고 플라니치카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화제가 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172cm의 작은 키였지만 빠른 반사신경을 통한 뛰어난 슈팅 방어 능력을 갖고 있었고 아크로바틱한 플레이를 선보였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별명이 프라하고양이였다.[5] 그러면서 용기와 대단한 근성, 신사적인 매너 또한 가지고 있었다.

후대의 선수와 비교하면 이케르 카시야스와 비슷할 듯 싶다. 골키퍼 치고는 작은 키, 왼발잡이, 소속팀과 국가대표팀에서 주장으로서의 리더십, 아크로바틱한 세이브 그리고 관중의 물건투척 사건까지..

그리고 이보 빅토르, 페트르 체흐와 체코의 역대 골키퍼들 중 탑을 다투는 선수이기도 하다.

4. 수상

4.1. 클럽[6]

  • 체코슬로바키아 1부리그 우승 8회: 1925, 1928–29, 1929–30, 1930–31, 1932–33, 1933–34, 1934–35, 1936–37
  • 미트로파 컵 우승 1회: 1938
  • 보헤미안 컵 우승 6회: 1926, 1927, 1928, 1930, 1932, 1935

4.2. 국가대표

4.3. 개인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2] 당시 유벤투스는 제1차 전성기를 맞이하던 팀으로 세리에 A 5연패(경기 당시에는 3연패)의 업적을 쌓았고 유벤투스 선수들이 주축이 된 이탈리아 대표팀2년 뒤에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우승시켰다.[3]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 그보다 A매치를 더 많이 뛴 선수는 스위스의 수비수 세베리노 미넬리밖에 없다. 그리고 라디슬라프 노바크에 의해 그의 대표팀 최다 출전 기록이 깨지는 데에는 28년이 걸렸다.[4] 출전 시간 대비 실점률로 따지면 당시 우승팀의 골키퍼 알도 올리비에리보다 더 좋았다.[5] 요즘은 골키퍼들에게 고양이라는 별명이 잘 안 붙지만 옛날에는 반사신경이 좋은 골키퍼들에게 흔히 고양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플라니치카 외에도 마라카낭의 고양이 안토니 라마예츠, 안칭의 고양이 제프 마이어가 그 예이다.[6] 플라니치카는 SK 슬라비아 프라하원 클럽 플레이어이므로 팀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