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23:33:59

호세 마누엘 모레노

EL Grafico선정
아르헨티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축구선수 5인
[1]
안토니오 사스트레 호세 마누엘 모레노 아돌포 페데르네라 알프레도 디스테파노 디에고 마라도나
호세 마누엘 모레노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파일: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엠블럼.svg

10대
클럽
}}} ||
호세 마누엘 모레노의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1947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MVP
호세 마누엘 모레노
}}} ||
아르헨티나의 前 축구 감독
파일:external/media.tumblr.com/tumblr_inline_miojylQOSf1qz4rgp.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호세 마누엘 모레노
José Manuel Moreno
본명 호세 마누엘 모레노 페르난데스
José Manuel Moreno Fernández
출생 1916년 8월 3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사망 1978년 8월 26일 (향년 62세)
아르헨티나 메를로
국적
[[아르헨티나|]][[틀:국기|]][[틀:국기|]]
신체 170cm | 체중 75kg
직업 축구 선수 (인사이드 라이트 / 은퇴)
축구 감독 (은퇴)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CA 리버 플레이트 (1935~1944)
레알 클루브 에스파냐 (1944~1946)
CA 리버 플레이트 (1946~1948)
CD 우니베르시다드 카톨리카 (1949)
CA 보카 주니어스 (1950)
CD 우니베르시다드 카톨리카 (1951)
데펜소르 스포르팅 (1952)
페로카릴 오에스테 (1953)
인데펜디엔테 메데인 (1954~1957)
인데펜디엔테 메데인 (1960~1961)
감독 CA 보카 주니어스 (1958~1959)
아르헨티나 대표팀 (1959)
CA 우라칸 (1961~1962)
인데펜디엔테 메데인 (1962)
콜로-콜로 (1962)
CA 우라칸 (1966)
국가대표 34경기 19골 (아르헨티나 / 1936~1950)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선수 생활2.3. 감독
3. 플레이 스타일4. 평가5. 뒷이야기6. 수상
6.1. 클럽6.2. 국가대표6.3. 개인

[clearfix]

1. 개요

“누군가 내게 누가 최고의 선수인지 물어본다면, 모레노를 비롯한 라 마키나의 공격 5인방을 말할겁니다. 그들은 진정한 크랙이었습니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아르헨티나의 前 축구선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우상이었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모레노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라보카 지역에서 태어났다. 모레노 역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외국 선원들을 상대로 하는 세탁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그 지역의 여느 다른 아이들처럼 어린 시절엔 보카 주니어스의 팬이었다. 모레노의 어릴 적 우상은 로베르토 체로도밍고 타라스코니였다. 모레노는 축구 외에도 권투도 좋아했던 소년이었고 권투 선수도 꿈꿨지만 축구 선수의 길을 택했다.

15살의 모레노는 자신이 응원하던 보카 주니어스 구단에 입단 테스트를 받으러 갔고 코칭스태프들 앞에서 2골을 넣었지만 보카 주니어스는 그를 입단시키지 않았다. 모레노는 이 결과에 좌절했지만 곧 마음을 추스르고 '그들을 후회하게 만들어주겠다'라는 결심을 했다. 그러다 보카의 최대 라이벌 리버 플레이트의 전설적인 공격수, 베르나베 페레이라의 눈에 띄었고 그의 설득에 리버 플레이트에 입단하였다.

2.2. 선수 생활

2.2.1. 클럽

2.2.1.1. 리버 플레이트 그리고 라 마키나
CA 리버 플레이트에 모레노가 입단했을 때의 나이는 18세, 그가 치른 공식전은 브라질 보타포구와의 친선경기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곧 플라텐세와의 리그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고 한 골을 넣었다.

그는 어렸지만 곧 카를로스 페우셀레, 베르나베 페레이라 등 리버에서 뛰던 선배 공격수들의 플레이에 녹아들어갔다. 그들이 팀을 떠난 후에는 새로 영입된 앙헬 라브루나, 무뇨스 등과 호흡을 맞추면서 팀의 핵심 선수가 되었고 리버의 공격은 그를 중심으로 행해졌다. 전설적인 공격편대 라 마키나의 멤버 모두가 뛰어난 선수들이었고 라브루나가 센터 포워드에 서면서 모레노의 직접적인 득점은 상당히 줄었음에도 핵심은 단연 그였다.

1939년에 모레노는 비신사적인 행위로 인해 리그 출전을 장기적으로 금지당하는 중징계를 맞았지만 선수 노조의 파업으로 큰 위기 없이 징계를 넘기기도 했다.
2.2.1.2. 저니맨
1944년, 제2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FIFA의 선수 등록이 느슨해진 틈을 타 모레노는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던 멕시코의 클루브 에스파냐로 이적했다. 여기에서 우승도 맛보고 멕시코의 팬들로부터 el charro[2]라는 별명도 얻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론 CA 리버 플레이트 소속이었던 그는 전쟁이 끝나고 다시 리버 플레이트로 돌아갔다. 그리고 팀에서 젊은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도 호흡을 맞추었다.

하지만 이 때의 멕시코 이적으로 아르헨티나 팬들의 상당수가 모레노에게 등을 돌렸는데 한번은 시합 중 CA 티그레 팬들이 던진 돌에 맞아 다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 상황에도 치료 받기를 거부했는데 티그레의 관중들이 치료받는 모습을 보면서 그를 다치게 했다는 만족감을 얻지 못하게 하려 일부러 그랬다고 술회했다.

1947년에는 아돌포 페데르네라가 팀을 떠났고 이런 사건까지 일어나자 모레노는 리버에서 정이 완전히 떨어져버렸고 칠레의 카톨리카로 이적해버렸다. 그 이후로 리버의 철천지 원수이자 모레노의 어릴 적 드림 클럽이었던 보카 주니어스에서도 잠시 뛰기도 하다 다시 카톨리카로 돌아가는 등 복잡한 커리어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의 실력까지 어디 가는건 아니라서 이적하는 팀마다 항상 우승컵을 들고 다녔다. 모레노는 세계 최초로 4개국 1부 리그에서 챔피언이 되는 진기록을 세웠다.

우루과이에서 뛰기도 한 모레노는 선수 생활의 황혼기를 콜롬비아에서 보냈다.

2.2.2. 국가대표

제2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중단되기도 하고 아르헨티나가 출전을 거부하기도 하는 등 월드컵과 모레노는 영 인연이 없었지만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는 그의 실력을 발휘했다.

1941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으로 모레노는 첫 국제 대회에 참가했고 그를 포함한 라 마키나 멤버들의 맹활약으로 아르헨티나는 전승 우승을 달성했다. 모레노는 4경기 3골을 득점하였는데, 이중 페루를 상대로 2골을 넣어 2:1승리를 이끌었다.

1942년 대회에서 모레노는 에콰도르를 상대로 5골을 넣어 12:0 대승을 이끌었다.[3] 모레노는 페루를 상대로 2골을 더 넣어 총 7골로 득점왕을 차지하였지만 정작 아르헨티나는 준우승에 그쳤다.

이후 모레노가 멕시코로 떠난 동안에는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지 못하다가 1947년에 국가대표에 복귀, 1947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 출전한다. 이때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대회 기간 동안 6골을 넣으며 맹활약했고, 모레노 역시 3골을 넣으며 아르헨티나의 우승을 이끌었다. 1947년 대회 MVP는 모레노의 차지였다.

2.3. 감독

선수 생활을 쉴 때 여러 클럽의 감독직을 맡던 모레노는 1959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 아르헨티나를 이끌고 참가했다.

3. 플레이 스타일

모레노는 공격수로서 필요한 모든 것에 뛰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키는 170cm로 당시 기준으로 평범했지만 머리로 75골을 넣는 등 몸싸움에서 쉽게 밀리지 않는 피지컬과 뛰어난 헤더 실력을 보유했고 양발 사용에 능하면서 기술도 뛰어났다. 하지만 그의 능력 중 특히 대단한 것은 시야로 경기를 풀어나가는 능력이 일품이었다고 전해진다.

포지션은 공격수지만 수비 가담도 잘해서 동료들에게 항상 든든한 존재였다.

4. 평가

모레노는 월드컵에서의 활약이 없어서 축구팬들에게 이름이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지지뉴와 더불어 1940년대의 남미 축구계를 대표하는 두 명의 공격수 중 한 명이다. IFFHS의 평가에서 모레노는 모든 20세기의 선수 중 25위에 꼽히기도 했다. 그 평가에서 아르헨티나 출신 선수 중 그보다 위에 있는 선수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디에고 마라도나 둘 뿐이었을 정도. 후대의 선수들을 추가해도 모레노보다 확실히 위라고 평할 만한 아르헨티나 선수로는 리오넬 메시만 추가된다.

라 마키나의 일원으로 CA 리버 플레이트에서 300골 가까이 넣은 앙헬 라브루나와 디 스테파노가 가장 존경하던 선배 아돌포 페데르네라보다 위의 평가를 받는 선수이자 라 마키나의 에이스라는 것에서 그의 위엄을 알 수 있다.

5. 뒷이야기

  • 모레노는 술, 담배를 즐기고 다소 불성실한 훈련 참여 태도를 지닌 게으른 천재였다.

6. 수상

6.1. 클럽

6.2. 국가대표

6.3. 개인



[1] 1980년 후반 선정[2] 한국어로 기병 또는 카우보이.[3] 이는 엑토르 스카로네, 후안 마르베시와 함께 갖고 있는 코파 아메리카 역대 1경기 개인 최다 득점 기록이며 코파 아메리카 역대 최다 득점차가 나온 경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