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90년 8월 15일 소련의 락밴드 키노의 리더 빅토르 초이가 사망한 사건. 일단 공식적인 사인은 졸음운전으로 인한 교통사고지만 수사 과정에서의 의문점과 경찰 측의 발표와 목격자의 주장이 어긋난다는 점 등 여러 가지 의문점 때문에 KGB가 빅토르 초이를 살해하고 사건을 은폐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사건 관련 영상
2020년 개봉한 영화 'цой' 의 예고편. 영화 제작을 위해 초이가 사고를 당했던 동일한 장소에서 보고서 자료를 토대로 교통사고씬을 연출한 장면이다.[1][2]
흔히 반파된 초이의 자가용으로 알려진 사진. 하지만 이 사진은 가짜다. 초이의 차량 번호는 Я 6832 ММ 혹은 УА 6832 MM였다고 한다.[3] 차량 잔해의 모습도 이상한데 초이의 차량은 버스와 정면 충돌을 해서 앞부분이 심한 손상이 있어야 할 텐데 오히려 사진 속 차는 앞은 비교적 형태가 온전하고 엔진룸-운전석 부분이 무언가로 내려찍은 듯 뭉개져 있다.
그리고 2022년에 '실제 사진'이라는 이름으로 초이의 자가용으로 추정되는 2장의 사진이 공개되었다. 현지 경찰 측에서 차량을 옮긴 후 찍어 둔 사진이라고 하는데 차량이 부서진 형태를 봐서 진짜 초이의 자동차일 확률이 높지만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어서 러시아 네티즌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초이와 충돌한 버스는 빨간색 이카루스 250으로 위 사진은 수리가 끝나고 한참 뒤에 찍힌 사진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후 러시아 웹상에서 빨간 마티즈 비슷한 일종의 밈이 되었다.
공식 보고서에 실린 사건 당시 차량의 경로. 이 자료에 따르면 현장은 왕복 2차선의 시골 도로였고 초이가 운전하던 방향의 전방에는 오른쪽으로 꺾인 커브가 있었다고 한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초이의 차는 갓길로 쏠린 채 불안정하게 달리다가 교량 난간에 측면을 스친 후 급격히 왼쪽으로 방향을 꺾어서 중앙선을 넘었고 때마침 반대 차선에서 달려오던 이카루스 250 버스와 충돌했다.[4] 충돌 직후 초이의 자가용은 튕겨져나가 도로에 나뒹굴었고 버스는 도로 옆의 개울에 빠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2. 사건 경위
사건은 1990년 8월 15일 오전 11시 28분경에 일어났다. 당시 빅토르 초이의 그룹 키노는 얼마 전에 모스크바의 레닌 스타디움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어 무려 6만 명의 관객을 끌어모았을 정도로 인기가 매우 높았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인 8월 14일에 빅토르 초이는 당시 소련의 공화국이었던 라트비아의 리가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다음 앨범 녹음을 마쳤고 상트페테르부르크[5]에서 다른 멤버들이 녹음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다음 날인 8월 15일에 빅토르 초이는 새벽 5시[6]에 일어나서 취미였던 낚시를 하기 위해 자가용인 Aleko Moskvitch-2141[7] 승용차를 몰고 숲 속의 호수로 가서 5시간동안 낚시를 즐겼다. 그 후 초이는 점심이 가까워졌을 무렵 낚시를 마치고 돌아가다가 라트비아 투쿰스 북쪽의 시골 도로에서 자신이 운전하던 차가 맞은 편에서 오던 이카루스 250 버스[8][9][10][11]와 정면충돌하는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차가 버스 밑에 깔려 버렸기에 빅토르의 승용차는 형태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져 고철 덩어리가 되어 버렸고 빅토르 역시 현장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당시 빅토르의 나이는 고작 만 28세였다.
빅토르 초이가 사망했다는 비보가 전해지자 소련 전역이 비통함에 빠졌고 계속되던 추모 열기 때문에 장례식이 수차례 연기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고 한다. 심지어 빅토르를 따라가겠다고 5명의 팬들이 투신자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빅토르의 팬 30여 명이 무려 4년 동안이나 시묘살이를 했다고 한다.
수사를 맡은 소련 당국에서는 버스 기사의 증언에 따라 빅토르 초이가 당시 130km/h로 과속하며 졸음운전을 했기 때문에 사고가 난 것이라면서 수사를 종결했다. 하지만 소련 경찰의 이 같은 발표를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왜 그들은 빅토르 초이가 졸음운전으로 과속을 하는 바람에 교통사고가 났다고 한 경찰 측의 발표를 신뢰하지 않는 것일까?
3. 사건의 의문점
많은 소련인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던 유명 가수의 죽음이었기에 세간의 관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시 소련의 대통령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직접 "아무도 그의 죽음을 믿지 않는다. 아니 믿고 싶지 않다."고 애도 성명까지 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빅토르 초이의 명성과는 달리 당시 수사 상황은 매우 부실했다. 그 때문에 당시 소련 사람들은 빅토르 초이의 죽음에 대한 경찰 측 수사 발표 내용을 전혀 믿지 않았던 것이다. 이 사건에 얽힌 의문점은 다음과 같다.3.1. 부실한 수사
빅토르 초이가 사망할 당시 버스 기사는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증인이었다. 빅토르의 사인이 졸음운전 때문이라는 것도 이 버스 기사의 증언에 기반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경찰은 사고 현장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즉, 정말로 빅토르가 당시 졸음운전으로 인해 과속을 한 것이었다면 어떤 흔적이라도 현장에 남을 것인데 경찰은 그 현장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오직 버스 기사의 증언만 듣고 사건을 졸음운전에 의한 사고사로 결론을 내려 버렸다는 것이다. 버스 기사가 본인의 과실을 면피하고자 거짓말을 한 것일 가능성도 충분히 배제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이에 당연히 소련에서는 버스 기사에게 자세한 해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버스 기사는 사건이 일어난 직후 종적을 감추어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 (또는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상태)라고 알려졌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사건 이후 러시아 방송에서 몇 번 등장한 전력이 있으며 이름도 공개되어 있다(위 영상 참조). 왜 경찰은 왜 버스 기사의 일방적인 진술만 듣고 빅토르 초이의 사인이 졸음운전으로 인한 사고사라고 결론을 내린 것인가? 1995년 KBS 일요스페셜 취재팀이 수소문 끝에 라트비아 수도 리가에서 해당 버스 기사를 만나 인터뷰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12] 인터뷰 말미에 그 버스 기사는 "사례는 필요 없으니 내 신원과 주소를 절대 밝히지 말아 달라"는 말을 남겼다.[13]
3.2. 기각당한 목격자들의 진술
버스 기사의 증언과 경찰 측 발표 내용과 달리 사고를 직접 목격한 목격자들의 증언은 이와 전혀 달랐다. 빅토르 초이가 졸음운전을 하고 있었다는 버스 기사와 경찰의 말과 달리 사고를 목격한 목격자들은 하나같이 빅토르 초이는 신호를 준수하고 차선을 잘 지키며 가고 있었다고 한다. 오히려 버스가 반대 차선에서 갑자기 빅토르의 자동차를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했고 빅토르가 여러 번 경적을 울리며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버스가 그대로 빅토르의 차에다 들이받아 버렸다는 것이다.목격자들의 증언대로라면 사고의 과실은 전적으로 버스 기사에게 있으며 버스 기사 본인이 책임을 면피할 목적으로 사고의 책임을 빅토르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목격자들의 증언이 진실이라면 도대체 버스 기사는 무슨 이유로 빅토르의 차에 그대로 자기 버스를 갖다 박은 것인가? 이는 어떤 의도가 있지 않고서는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다. 어쨌든 목격자들의 이같은 증언은 빅토르 초이의 죽음이 단순한 교통사고로 인한 사고사가 아닐 가능성을 시사하지만 당시 수사에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도대체 경찰은 왜 버스 기사의 증언만 받아들이고 다른 목격자들의 증언은 기각한 것일까?
또 한편으로 음주운전 사고로 사망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3.3. 가족들에게도 공개하지 않은 시신
의문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당시 경찰은 빅토르 초이의 시신을 부인인 마리안나 초이[14]에게조차 공개하지 않았다고 한다. 경찰은 마리안나에게 여권과 반지 등의 유품만 건네줬을 뿐 끝내 시신 공개는 거부했다. 도대체 유족들이 알면 안 되는 사항이 뭐가 있기에 유족들에게마저 시신 공개를 거부한단 말인가? 이러한 경찰 측의 태도 역시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다. 사고 당시 빅토르의 시신은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었다고 한다.[15] 혹시 부인이 보면 쇼크를 받을까봐 소련 경찰 측에서 심하게 배려한 것인가?하지만 아무리 시신이 참혹하게 훼손되었다고 해도 부인에게는 자기 남편이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정도는 알 권리가 있지 않은가? 아무리 기본권이란 개념이 미흡한 소련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 경찰 측은 빅토르 초이가 졸음운전을 해서 사고가 났다는 사고 경위만 발표했을 뿐 시신 공개만큼은 죽어도 하지 않았다. 부인인 마리안나가 계속해서 시신 공개를 요구해도 경찰 측은 끝끝내 시신 공개를 거부하였다. 이 같은 경찰 측의 태도는 사건을 은폐하려 한다는 의심을 더욱 굳어지게 한다.
4. KGB가 빅토르 초이를 암살했다?
경찰 측의 이같은 석연찮은 태도 때문에 소련에서는 빅토르 초이의 죽음이 예사롭지 않다는 풍문이 돌았다. 이 풍문에 따으면 사실 빅토르 초이가 소련 정보국인 KGB에 의해 교통사고를 가장한 암살을 당한 것이라고 한다. 빅토르가 활동할 당시 소련은 경직된 체제를 개혁하자는 개혁파와 현상 유지를 고집하는 보수파의 대립이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또한 동유럽의 여러 소련 위성국에서는 계속해서 자유주의의 바람이 불기 시작해 사회주의 종주국이라는 지위마저도 흔들리고 있었다.이 때 빅토르 초이는 자유와 저항 그리고 반전(反戰)과 평화의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발표해 소련 사람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다.[16] 하지만 이 같은 모습은 소련 내 보수파 입장에서는 그저 젊은이들을 선동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이들의 입장에서 빅토르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셈이다. 때문에 소련 내 보수파들이 KGB를 사주해 빅토르 초이를 암살한 것이라는 게 이 풍문의 내용이었다.
더군다나 빅토르 초이가 죽은 시점도 뭔가 좀 묘했다. 빅토르가 죽은 그 날은 다음 앨범을 준비하던 중이었고 아시아 공연(일본 및 대한민국)을 한 달 앞두고 있었다.[17] 빅토르 초이가 여태껏 발표한 노래들을 볼 때 다음 앨범 역시 저항적인 메시지가 담긴 노래일 터. 그럴 바에는 아예 앨범이 나오기 전에 먼저 손을 써서 빅토르를 죽여 버리는 것도 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빅토르를 저세상으로 보내 버림으로서 아예 그의 앨범까지도 저세상으로 보내 버려 자유의 바람을 막아 버리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확히 빅토르 초이가 사망한 지 1년이 지난 뒤 소련은 스스로 자멸의 길을 걸으며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빅토르 초이가 죽은 지 17년이 지난 2007년에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빅토르 초이를 협박했다는 한 남자의 제보가 언론사를 통해 공개되었다. 빅토르 초이가 사실 타살당한 것이란 의혹이 더욱 커졌다. 하지만 경찰은 제보자의 말은 신빙성이 결여됐고 빅토르 초이의 수사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 재수사가 불가하다며 함구로 일관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암살설은 현지에서도 상당히 말이 많이 오가는 주제다. 의외로 팬들 중에도 암살설을 반대하는 이들이 많은데 브레즈네프 시절도 아니고 "개혁개방"을 외치던 고르바초프가 애써 슈퍼스타를 암살할 필요도 없으며 초이는 (최소한 표면상으로는) 정치적, 사회적 발언을 잘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그 유명한 "나는 변화를 원한다!"는 초이 본인이 이는 개인적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이지 사회적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며 선을 그은 바 있다. 게다가 초이는 당시 뮤지션들 중 온건한 편이었는데[18] 다른 사람이 아니라 굳이 초이를 암살할 이유도 없고...
5. 키노의 마지막 앨범과 해체
빅토르 초이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녹음했던 그 앨범이 곧 키노의 마지막 앨범이 되고 말았다. 기타리스트였던 유리 카스파랸의 차에 보관되어 화를 면했던 보컬 트랙의 마스터 테이프가 레닌그라드로 보내졌고[19] 여기서 남은 멤버들이 연주 트랙을 녹음한 뒤 합쳐 밴드의 마지막 공식 앨범인 '초르니 알봄(Чёрный альбом, 검은 앨범)'을 발매했다. 발매 직후 키노는 해체했고 장례는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치러질 예정이었지만 수만 명에 달하는 팬들이 운집해 사실상 시민장 형태로 진행되었다. 유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보고슬롭스코예 묘지에 안장되었고 빅토르 초이와 키노의 팬들에게는 성지로 여겨지고 있다.6. 만약 암살이 아니라면?
러시아 웹을 중심으로 해당 사건이 암살이 아닌 단순한 사고라는 설도 돌고 있다. 의외로 사고설 또한 인지도가 높은 편. 정말로 졸면서 운전했다는 설[20]도 있고 위 트레일러에 나왔듯 카세트를 교체하는 등 한 눈을 팔다가 앞을 못 보고 사고를 당했다는 설도 있다. 덤으로 초이는 과속을 즐기는 위험천만한 운전 습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과속하던 중 사고를 당하지 않았냐는 주장도 종종 제기된다.사실 초이는 사고 당시 운전 면허를 받은지 3개월도 안된 초보였다고 한다. 1989년부터 초이에게 운전을 가르치던 강사[21]도 "수업에 성실히 참여하는편이 아니었으며 속도감에 대한 이해와 집중력이 부족하다"고 평했고 초이가 더 어렸을때 직접 운전을 체험시켜준 그의 아버지조차 "초이는 운전과 천성이 맞지않다."라고 말하는걸 봐서 운전이 대단히 서툴렀던 모양. 낚시 여행을 위해 라트비아에 입국했을때도 가벼운 접촉사고가 있었지만 원만히 해결되었고, 이때가 초이의 첫 장거리 운전이였다. 초이는 콘서트때마다 주최 관계자들의 도움으로 고급 승용차와 승합차를 빌리거나 동료들의 차를 얻어타고 다녔다. 그러나 초이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어딜가든 그의 팬들이 몰려다니다보니 관심을 덜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가 운전을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22]
더 마이너하긴 하지만 해당 사건이 초이의 자살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초이의 노래에 죽음이라는 주제가 자주 등장하긴 했지만 자살을 선택할 이유가 없었던지라 해당 설은 잘 지지받지 못하는 편.
7. 기타
- 1995년 KBS 1TV 일요일 오후 8시에 방영되던 일요스페셜에서 빅토르 초이에 대한 에피소드가 방영된 적이 있었는데 전반부는 주로 빅토르의 일생과 음악 세계, 유가족인 어머니, 아내, 아들과의 인터뷰를 다루었고 후반부는 빅토르의 사망에 대한 의문 및 사후에도 그를 추모하는 팬들의 회고를 다루었다.
- 당시 초이가 사고를 당했던 현장에는 추모비와 조각상, 사진이 붙은 벽보가 단촐하게나마 세워져 있으며 팬들이 찾아와서 헌화하고 가기도 한다. 아르바트 거리의 초이 벽보다 덜 알려진 곳이지만 또 하나의 성지다. 라트비아 수도 리가에서 서쪽으로 약 60km 떨어져 있는 P128 도로인데 주변은 숲과 민가 몇 채만 있는 인적 드문 시골이다. 외진 곳이라 차가 없다면 찾아가기 힘들지만 라트비아를 여행하려는 초이의 팬이라면 한 번쯤 둘러보는 것도 좋다. 자세한 위치는 여기를 참고하면 된다.
- 그의 사망 30년 후 그의 사망을 목격하였다는 증언이 나왔다.
- 2018년 11월엔 초이의 자동차 번호판[23]이 경매에서 200만 루블에 판매된 적이 있으며, 2023년 9월엔 부서진 대시보드 파편이 25만 루블에 경매에 올라왔다. 이렇게 초이의 유품들이 경매에 출품된 사례가 이전에도 여러번 있었는데 많은 팬들과 초이의 주변인들은 고인의 유품을 금전적 이익과 개인의 수집욕을 위해 사고 판다는 점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24]
[1] 실제로는 영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에서 충돌했다. 해당 트레일러에서는 "초이가 운전 중 한눈을 팔았고 그 때문에 사고가 났다"는 썰을 채용했다. 실제로 러시아 웹에서 도는 썰 중 하나인데 트레일러에 나왔듯 카세트를 교체하다가 사고를 당했다는 주장도 있고 과속하던 중 한눈팔다 사고를 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해당 테이프는 "검은 앨범" 테이프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2] 해당 영화는 알렉세이 우치텔 감독의 작품으로, 초이는 그가 찍은 영화에 출연한 바 있다. 다만 영화 'цой'는 큰 반향 없이 망했다.[3] 위 사진에 나온 것과 같은 차량 번호는 당시 소련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해당 번호판은 소련 말기에서 옐친 초기까지 사용된 번호판이다. 옐친 집권기 중반부터 현재의 번호판 체계가 되었다.[4] 설령 마주오던 버스가 없었을지라도 속도가 너무 빨랐기에 커브길 바깥의 나무와 충돌하여 큰 부상을 입었을거란 추측이 있다.[5] 당시 지명은 레닌그라드였다.[6] 원래는 아들 사샤와 함께 가려고 했으나 자던 사샤가 따라가지 않겠다고 말해서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7] 초이는 1990년 1월에 대리점에서 32,500루블을 주고 신차로 구입했으며, 사고 당시 트렁크엔 배낭과 낚싯대, 물고기 몇마리, 음악 페스티벌의 포스터가 놓여있었다고 한다. 사고 직후의 주행거리는 3,400km정도였다고 알려져있다.[8] 버스 기사의 이름은 Янис Карлович Фибикс (야니스 카를로비치 피빅스, 1946년생), 사고 당일 오전에 엔진 수리를 마치고 공항까지 관광객들을 태워준후 차고지로 돌아가는 길이였다고 한다. 마침 이 날은 자신의 아내와 결혼 20주년 기념일이였기에 저녁에 축하 파티가 예정되어 있었던터라 선물과 꽃을 사기 위해 평소에 가지않던 길로 운전했던게 화근이 되었다고 밝혔다. 초이가 사고를 당했던 도로는 시야를 가리는 울창한 나무들이 많고 도로 선형이 나빠서 현지인들도 기피하는 도로였다고 전해진다.[9] 버스 기사는 커브길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초이의 차를 피하려고 핸들을 급하게 꺾었지만 충돌을 피하기엔 너무 늦은 시점이였다. 그는 사고의 충격으로 잠시 정신을 잃고 타박상을 입었으며 사고 직후 박살난 차 안에서 피범벅이 된 초이를 발견하고 인근의 민가에서 전화를 빌려 경찰에 신고했다.[10] 버스 기사는 이후 인터뷰에서 "사고 이후에도 계속 버스기사로 일했지만 예전같은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누구도 친적이 없었고 평생 무사고 운전을 꿈꿨어요. 인생의 흑역사입니다."라고 말하며 죄책감에 종종 초이의 사고 장소에 추모하러 간다고 밝혔다.[11] 정작 그는 락 음악에 관심이 없어서 초이의 유명세를 전혀 모르고 있었던터라 사고 후에야 초이가 누군지 알게 되었다.[12] 지금이야 유튜브 등에 영상을 올리면 세계 어디에서나 조회 가능하지만 당시로서는 해당 프로그램을 녹화한 비디오 테이프를 해외로 공수해 가지 않는 이상 한국에서 방송된 프로를 외국에서 조회하는 게 어려웠다. (게다가 러시아 등 구 소련권은 한국과 TV 송출 방식이 달라 설령 비디오로 녹화했다고 해도 VTR까지 같이 가져가지 않는 이상 재생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 버스 기사는 취재팀이 한국 방송사에서 나왔고 한국에서만 방영된다기에 인터뷰에 응했다.[13] 다만 이건 누가 사주한 일이 아니더라도 버스 기사 입장에서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말이다. 수많은 팬을 가졌던 빅토르가 죽은 지 5년밖에 안 됐는데 기사의 신상이 전부 까발려진다는 것은 보복당해 죽을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그는 이후에 팬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긴 했지만 신변의 위협을 받은적은 없었다고 말한다. 사고를 낸것만으로도 충분히 트라우마로 남았는데 수시로 언론에서 취재를 와서 사고에 대해 캐묻는게 괴로웠다고. 한편 오늘날 초이의 팬들은 대체로 그를 비난하기보단 그저 불운한 사고를 겪은 한사람으로써 동정하는 편이다.[14] 빅토르보다 3살 연상인 1959년생으로 1990년 사고 당시에는 별거 상태였다.(1987년부터 초이는 기자였던 나탈리야 라즈글라노바와의 관계를 이유로 마리안나와 별거하기 시작했다.) 2005년에 4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한다. 빅토르 초이의 아버지 로베르트 초이는 현재도 생존해 있는데 결국 아들과 며느리 둘 다 먼저 세상을 떠난 셈이다.[15] 확인되지 않은 소문에 의하면 '가슴팍에 핸들이 찍혀 있었다'고 한다.[16] 다만 초이의 노래에는 직접적으로 자유나 저항을 외치는 가사는 일단 없다. 본인도 (그게 자의인지 타의인지는 불명이지만) 여러 방송이나 인터뷰 등에서 자신의 가사를 정치, 사회적 문제와 연관짓지 말라고 몇 차례나 언급했다. 유명한 '변화' 또한 초이가 직접 정치나 사회를 비판하거나 그런 노래는 아니라고 선을 그은 바 있다. 이를 압박을 피하기 위한 거짓말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가 속했던 레닌그라드 투소프카(언더그라운드 음악 업계) 자체가 정치적 문제와 노래를 연관짓지 않았으며 초이 또한 이러한 모습을 보인 걸 생각하면 실제로 이런 정치적 문제와 연관되고 싶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17] 당시 소련 신문에도 실린 내용이며 1991년 초이의 앨범 일부를 카세트로 발매한 '예당 엔터테인먼트' 측에서도 카세트와 동봉한 쪽지에서 자신들이 키노의 내한 공연을 추진하고 있었다고 서술한 바 있다.[18] 유명세만 따지면 초이보다 덜 유명하긴 했어도 소련 체제를 간접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비판하던 음악가들과 노래가 넘쳐나던 것이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의 소련이었다. 데데테, 알리사, 텔레비조르,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 등이 그 예시.[19] 이 마스터 테이프가 빅토르의 차에 실려 있었지만 구사일생으로 무사했다는 말이 있는데 카스파랸은 마스터 테이프는 자신이 보관하고 있었다며 이를 부인했다.[20] 초이가 느긋하게 낚시를 즐기다 오긴 했지만 야간도 아니고 한낮이였다는 점과, 그의 모스크비치 알레코는 썩 조용하고 부드러운 차가 아니기도 했고, 당시 운전하던 도로의 포장 상태가 불량했던 점을 이유로 들어서 '그 낡은 시골길을 고속으로 달렸다면 차가 굉음을 내고 심하게 덜컹거렸을텐데 어떻게 졸수가 있었느냐'는 반론도 있다.[21] 그도 록 음악의 팬이였던지라 수업이 끝나면 음악에 대해 온갖 질문을 던지는등 초이가 자신의 수강생이 된것을 기뻐했다고 한다.[22] 80년대 후반부터 초이는 하늘을 찌르는 유명세에 굉장한 부담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불안감을 느껴서 거주지에 경호원까지 고용하게 됐다.[23] 사고 조사를 위해 보존된걸로 추정.[24] 이렇게 경매로 팔려버리게 되면 낙찰자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아서 행방이 묘연해지는 경우가 흔하다. 그의 아버지에게 돌려주거나 관련 단체에 기증되어도 모자랄 판에 귀중한 초이의 유품을 분실하는것과 다름 없게 되니 괜히 사람들이 분노하는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