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의 10대 제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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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가지가 없는 큰 나무와 같다. 사리풋타와 목갈라나가 열반에 든 것은 큰 나무에 가지가 잘려나간 것 같다. 대중들을 살펴보니 마치 텅 빈 것 같구나. 그들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두 사람이 있었으면 이렇게 쓸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증일아함 18권 사의단품(四意斷品) 제9경
증일아함 18권 사의단품(四意斷品) 제9경
그 분은 제2의 부처님이라고 할 만큼 법을 잘 받들었습니다. 능히 여래를 따라 법륜(法輪)을 굴릴 수 있었으니, 부처님의 제자 중에 지혜가 제일이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지혜를 그 분의 지혜에 견주면 16분 중의 1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오직 여래만을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우파급다 존자가 아쇼카 대왕에게, 『아육왕경』 2권(ABC, K1013 v30, p.357a01)
우파급다 존자가 아쇼카 대왕에게, 『아육왕경』 2권(ABC, K1013 v30, p.357a01)
석가모니의 십대제자 중 필두인 인물. 그가 사망하기 전까지 석가모니의 제자들을 '사리풋다와 나머지'라고 해도 될 정도로 존재감이 압도적이었다. 이 때문에 남방불교 경전에선 물론이고 대승경전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금강경과 함께 널리 알려진 반야심경은 사리자 즉 사리뿟따를 향해 석가모니 부처가 설법하는 내용이다.
산스크리트어로는 샤리뿌뜨라(Śāriputra), 팔리어로는 사리뿟따(Sāriputta)라고 하는데, 이 명칭을 한역하여 '사리불(舍利佛)' 혹은 '사리자(舍利子)'라고 한다. '샤리뿌뜨라'는 '샤리의 아들'이란 뜻인데, 샤리는 그의 어머니 이름이다. 어머니 이름으로 아들을 부른 것이다. 그래서 한자로 아들 자(子) 자를 넣어서 '사리자'라고도 옮긴 것이다. 그의 원 이름은 우빠띠샤(Upatiṣya), 팔리어로는 우빠띳사(Upatissa)이다.
마가다 왕국 출신의 브라만 가문의 후예로 우빠띳사(또는 날라까) 마을에서 태어났다. 16세에 친구 목갈라나(목건련)와 함께 산자야라는 수행자의 교단에 출가했는데, 그는 '진리는 확정 불가능하다.'는 불가지론을 주창하던 육사외도였다. 사리뿟따는 이러한 가르침에 "그러면 '확정불가능하다.'는 것은 어떻게 확답할 수 있는가?" 하며 번민하던 중에 석가모니를 만났다.
사리뿟따는 석가모니의 설법을 듣고 감복하여 친구 목갈라나, 자신들을 따르는 수행자 250여 명을 이끌고 불문에 귀의했고, 석가모니도 그들을 특별히 아껴 사리뿟따를 자신의 오른쪽에, 목갈라나를 왼쪽에 앉혀 그들을 자신의 수제자임을 분명히 하였다.[1] 사리뿟따도 석가모니와 그 교단에 헌신하여, 훗날 데바닷타[2]가 일부 비구들을 이끌고 교단을 이탈하려 하자 목갈라나와 함께 나서서 비구들을 조리있게 설득하여 돌아오게 하는 등 활약하였다.
사분율에는 기수급고독원을 세울 때의 일화로, 수닷타 장자가 기타 태자로부터 원림을 사서 공사를 시작할 때에 불교와 대립하던 육사외도(六師外道)가 사위국의 왕에게 찾아가, 불교 승도들과 자신들이 도술로 겨뤄서 그쪽이 이기면 세우기를 허락하고 자신들이 이기면 공사를 중지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수닷타가 이에 집에 와서 근심하고 있는데 사리불이 다음날 수닷타의 집에 탁발하러 왔다가 이를 듣고 걱정하지 말고 가서 도전을 받아들이겠다고 전하라고 했다. 이레 뒤에 왕을 포함해서 사위국 사람들이 모두 넓은 처소에 왔는데, 육사외도의 도술사들이 모두 모였지만 사리불이 오지 않자 도술사들은 "자기도 기술이 없는 줄 알아서 겁 먹고 안 오는 것"이라고 비웃었다. 왕이 수닷타를 시켜서 사리불을 찾아오게 했고, 그때까지 선정에 들어 있던 사리불은 수닷타가 온 것을 보고 일어나 가사를 입고 길을 나섰다. 육사외도 쪽에서 나선 도술사는 노도차(勞度差)였다. 이후 도술 겨루기를 보면,
- 육사외도의 한 사람인 노도차(勞度差)가 대중 앞에서 주문으로 한 그루의 나무를 만들자, 저절로 자라고 넓어져 그늘이 대중의 모임을 덮으면서 가지와 잎은 울창해지며 꽃과 열매가 맺혔다. 이에 사리불이 곧 신통의 힘으로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그 나무의 뿌리를 뽑아 땅에 거꾸러뜨리고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 노도차가 다시 주문으로 연못 하나를 만들었는데, 연못의 사방 변두리는 모두가 일곱 보에, 수면에는 온갖 꽃이 피었다. 사리불은 변화를 부려 큰 어금니가 여섯 개 있는 한 마리의 흰 코끼리를 변화로 만들었는데, 코끼리의 어금니마다 일곱 송이 연꽃이 피었고, 그 연꽃 위에는 일곱의 옥녀(玉女)가 있었다. 그 코끼리가 천천히 못가로 다가가 그 물을 들이마시니, 못은 이내 바짝 말라 버렸다.
- 노도차가 다시 하나의 산을 만들었는데, 칠보로 장엄되고 뭇 못과 나무, 꽃 열매가 아름답고 소담스러웠다. 사리불도 금강역사(金剛力士)를 변화로 만들어냈는데, 금강역사가 금강저(金剛杵)로 산을 가리키자 산이 무너지며 흔적조차 없어졌다.
- 노도차가 다시 머리 열 개 달린 용 한 마리를 만들어 공중에서 갖가지 보배를 비처럼 내리며 뇌성벽력으로 땅을 진동시켜 대중들을 놀라게 하자, 사리불은 변화로 한 마리 금시조(金翅鳥)를 만들어냈고, 금시조는 용을 갈가리 찢어 씹어 먹어 버렸다.
- 노도차가 다시 한 마리 소를 만들자 몸뚱이가 우람하고 살찌고 힘이 센데, 굵은 다리와 날카로운 뿔로 땅을 후벼 파면서 크게 으르렁거리며 앞으로 돌진해 왔다. 사리불은 또 변화로 사자를 변화로 만들어 소를 잡아 먹게 하였다.
- 노도차가 다시 야차(夜叉)로 변신했다. 그 야차는 형체가 장대하고 머리 위에는 불이 이글거렸으며 눈은 피처럼 붉고 네 어금니는 길고 날카로우며, 입과 눈으로 불을 뿜어내면서 뛰어올라 내달아 왔다. 그 때 사리불은 스스로 몸을 변화시켜 비사문왕(毘沙門天王)으로 변했다. 야차는 질겁하며 도망가려 했지만 사면에서 불이 일어나 갈 데가 없고 사리불 곁에만 시원하고 불이 없는 것을 보고 이내 굴복하며 오체투지로 살려 줄 것을 애걸하여 수치스런 마음을 내자, 불은 절로 꺼져 버렸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모두 사리불의 승리를 외쳤고, 외도들도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10대 제자 중에서 '지혜제일'이라고 불렸다. 성품이 온화하고 자비로워서 주로 대중들을 교화하는 일을 맡았는데,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깨달음을 가장 잘 이해하여 다른 비구들은 그에 비하면 지혜가 16분의 1도 미치지 못한다고도 하였고, 간혹 석가모니를 대신하여 설법한 일도 있다. 또한 외법(불교 외의 교단)에도 밝아 위의 데와닷따의 얘기처럼 이들 교리의 헛점을 논파하는 데에도 능했고, 한편으로는 방대한 지식을 살려서 불교 교리를 대중이 쉽게 이해하게끔 정리하는 데에 일조하여 오늘날 대승 불교의 기초를 마련했다고도 말한다.
목갈라나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사망했는데, 정확하게 시기가 언급된 것은 아니나, 석가모니가 사망한 후에 경전 편찬을 당시 두 사람이 아닌 3인자 위치였던 마하깟사빠(가섭)가 주도했으므로 석가모니보다 먼저 죽었음은 확실하다. 그들이 사망한 후에 석가모니는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보이지 않는 모임은 어쩐지 텅 빈 것만 같구나."라며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사리뿟따가 태어나고 입적한 날란다 지방의 사원에는 사리뿟따를 기리는 기념탑이 있다. 나중에 여기에 세계 최초이자 최고의 불교 대학이 설립되었고 한때는 불교학의 중심지였다.
자이나교의 경전 <이시바샤임>에는 '붓다 아라핫트 선인인 사리뿟따의 가르침'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는 불교의 대표자를 사리뿟따로 본 것이다. 초기 불교 승단에서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1] 이들보다 먼저 들어온 비구도 많았기 때문에 불만의 목소리가 있었으나 석가모니는 둘의 전생 이야기까지 하면서 설득했다.[2] 여담으로 사리뿟따는 한때 '데바닷타는 신통과 위력이 뛰어난 비구'라고 칭찬한 적이 있었다. 물론 데바닷타가 석가모니의 교단을 떠나 자기 교단을 세우려 들면서 교단의 분열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