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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클럽 경력
1.1. 레알 마드리드 CF
10대의 어린 나이에 레알 마드리드에 입성하여 화제를 모았으나 거의 대부분의 시즌을 다른 팀에 임대를 가거나 B팀에서 잠시 뛰는 등 레알 마드리드에서의 활약은 미미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1999-00 시즌까지 3시즌 동안 리그, UCL, 클럽 월드컵 통틀어 총 7경기 190분 정도만 모습을 비추며 레알 마드리드에서 자리잡지 못하고 시즌 도중 마요르카로 임대 이적하게 된다.1.2. RCD 마요르카
1999-00 시즌 겨울 이적시장을 통해 마요르카로 임대 온 에투는 리그에서만 13경기에 출전해 6골을 넣으며 가능성을 보여주게 된다. 그러면서 2000-01 시즌을 앞두고 레알 마드리드를 떠나 440만 파운드의 이적료에 마요르카로 완전 이적에 성공했다. 그리고 완전 이적 후 첫 시즌에 주전으로 자리잡아 리그 28경기 11골, 총 33경기 13골을 기록하며 알베르트 루케, 아리엘 이바가사와 함께 삼각편대를 구축하여 팀을 리그 3위 등극과 함께 챔피언스 리그로 이끌었다.2001-02 시즌에는 리그 16위로 추락한 팀과 함께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리그에서 30경기 6골에 그쳤지만, UCL에서만큼은 9경기 3골을 득점하는 준수한 성적을 거두면서 시즌 10골은 기록했다. 이후 2002-03 시즌에는 리그에서 30경기 14골, 총 36경기 19골을 기록하는 등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는 2골을 기록하며 마요르카에게 구단 역사상 첫 메이저 대회 트로피를 선사했다. 이어서 2003-04 시즌에는 리그 32경기 17골, 총 43경기 22골을 기록하면서 마요르카를 중위권 다크호스 팀으로 만들었다. 특히 친정팀 레알 마드리드에게 매우 강한 면모를 보여 레알 킬러로 불리게 된다.
이러한 활약과 레알에게 유독 강한 성향을 바탕으로 2004년 여름 이적시장 때 2,700만 유로[1]라는 거액의 이적료에 바르셀로나로 이적했다. 참고로 당시 레알 마드리드도 다시 에투를 데려올 의향은 있었으나, 이미 Non-EU 선수가 3명으로 가득찬 상태였기 때문에 레알 마드리드 복귀는 무산된다.
한편 에투가 마요르카에서 기록한 70골은 아직까지도 구단 역대 최다 골 기록으로 남아있다.
1.3. FC 바르셀로나
그리고 기대에 보답하듯 입단과 동시에 엄청난 활약을 이어간다.
2004-05 시즌에는 리그에서 34경기 25골로 득점 1위[3]에 올랐고, 팀에 6년 만에 라리가 우승컵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정작 피치치는 수상하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피치치 시상을 주관하는 마르카에서 에투의 1골을 무효 처리를 해버렸고 이에 따라 포를란이 단독 수상자가 됐기 때문이다. 즉, LFP[4] 공식 기록으로 득점왕은 맞는데 득점왕 '상'은 받지 못하는 촌극이 벌어진 것. 더구나 포를란이 유러피언 골든슈까지 가져가면서 에투는 졸지에 피치치와 유러피언 골든슈를 모두 강탈당한 셈이 되었다. 아무튼 이번 시즌 뛰어난 활약을 펼친 것을 사실이었기에 FIFPro 월드 XI과 UEFA 올해의 팀에 선정되고 FIFA 올해의 선수 3위에 이름을 올렸다.
2005-06 시즌에는 리그에서 34경기 26골로 다비드 비야를 한 골 차로 제치고 마침내 피치치를 수상했고, UCL에서도 11경기 6골을 득점하며 바르셀로나의 라리가 2연패와 14년 만의 UCL 우승을 견인하였다. 특히 아스날과의 결승전에서 상대 골키퍼 옌스 레만의 퇴장을 유도해내고 동점골을 기록하는 등 대활약을 펼치며 MOTM으로 선정된다. 이 업적으로 2년 연속 FIFPro 월드 XI 및 UEFA 올해의 팀에 선정되고 UEFA 올해의 공격수를 수상하였다. 다만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닌데 레알 사라고사와의 원정 경기 도중 사라고사 서포터들로부터 원숭이 흉내를 내는 인종차별을 당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사라고사 구단은 9,000 유로의 벌금을 물었으며, 한동안 축구계에 만연했던 인종차별 문제가 다시 이슈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2006-07 시즌에는 UCL 베르더 브레멘전에서 당한 무릎 부상으로 전반기를 통째로 결장했고, 2007-08 시즌에도 크고 작은 부상들로 결장하는 기간이 많았다. 에투가 부상으로 빠지고 호나우지뉴가 방탕한 사생활로 폼이 망가지자 바르셀로나는 부진을 거듭한다. 특히 이 시기에 에드미우송이 폭로한 '검은 양 사건'까지 터지면서 팀이 전체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리그에서 19경기 11골, 18경기 16골로 2시즌 모두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하며 클래스를 입증했다.
이렇듯 바르셀로나 시절은 에투의 커리어에 있어 최전성기라 할 수 있으며, 이 시기 팀의 챔피언스 리그 2회 우승, 라리가 3회 우승, 트레블 1회를 이끈 에투는 클럽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6]
하지만 에투의 화려했던 바르셀로나 시절도 끝을 보이고 있었다. 바로 과르디올라 감독과의 불화가 그 원인이었다.
결국 2009년 여름에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와의 스왑딜로 인테르 이적이 성사되었고,[7] 7월 7일 메디컬 테스트를 통과하면서 인테르에 입단, 5년간의 바르셀로나 경력을 마무리 짓는다.
2004-05 시즌: 45경기(선발 44경기) 29골 7도움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라리가 | 34 | 25 | 5 |
챔피언스 리그 | 7 | 4 | 2 |
코파 델 레이 | 1 | 0 | 0 |
합계 | 45 | 29 | 7 |
2005-06 시즌: 47경기(선발 47경기) 34골 11도움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라리가 | 34 | 26 | 7 |
챔피언스 리그 | 11 | 6 | 4 |
수페르코파 | 2 | 2 | 0 |
합계 | 47 | 34 | 11 |
2006-07 시즌: 27경기(선발 25경기) 13골 11도움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라리가 | 19 | 11 | 8 |
챔피언스 리그 | 3 | 1 | 3 |
코파 델 레이 | 2 | 1 | 0 |
수페르코파 | 2 | 0 | 0 |
UEFA 슈퍼컵 | 1 | 0 | 0 |
합계 | 27 | 13 | 11 |
2007-08 시즌: 28경기(선발 27경기) 18골 4도움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라리가 | 18 | 16 | 4 |
챔피언스 리그 | 7 | 1 | 0 |
코파 델 레이 | 3 | 1 | 0 |
합계 | 28 | 18 | 4 |
2008-09 시즌: 52경기(선발 46경기) 36골 8도움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라리가 | 36 | 30 | 4 |
챔피언스 리그 | 10 | 4 | 2 |
챔피언스 리그 예선 | 2 | 2 | 1 |
코파 델 레이 | 4 | 0 | 1 |
합계 | 52 | 36 | 8 |
1.4.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1.4.1. 2009-10 시즌
그 뿐만 아니라 코파 이탈리아 4강 2차전 결승골과 UCL 16강 1차전 선제골 어시스트·2차전 결승골, 결승전 추가골 어시스트 등 순도 높은 공격 포인트들을 많이 기록하며 인테르의 세리에 A 5연패와 45년 만의 UCL 우승, 그리고 이탈리아 클럽 최초의 트레블 달성에 적잖이 공헌하였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2시즌 연속 트레블과 2개 클럽 트레블이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도 세웠다.
반면에 UCL 우승을 위해 바르셀로나 이적을 단행했던 이브라히모비치는 후반기에 극도로 부진했던 경기력, 그리고 과르디올라와의 극심한 불화가 겹치며 밀란으로 쫓겨나듯 이적하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과르디올라와 이브라히모비치의 바르셀로나를 UCL에서 탈락시킨 팀이 다름 아닌 에투의 인테르였다는 것이다.
이 시즌의 에투는 득점보다는 팀을 위해 여러 포지션에서 공격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고 수비적인 기여도 완벽하게 해내면서 트레블의 숨은 공신으로 활약했다. 비록 밀리토와 스네이더가 대부분의 스포트라이트를 가져갔으나 에투의 헌신이 없었다면 인테르의 이런 성공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2009-10 시즌: 48경기(선발 43경기) 16골 10도움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세리에 A | 32 | 12 | 8 |
챔피언스 리그 | 13 | 2 | 2 |
코파 이탈리아 | 2 | 1 | 0 |
수페르코파 | 1 | 1 | 0 |
합계 | 48 | 16 | 10 |
1.4.2. 2010-11 시즌
2010-11 시즌 초반 인테르는 베니테스의 삽질과 밀리토, 스네이더, 마이콘 등 주전들의 부진이 겹치며 리그에서 7위까지 추락하고 만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에투는 리그에서 35경기 21골 10어시스트, UCL에서 10경기 8골 5어시스트, 총 53경기 37골 16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인테르의 에이스로서 팀을 멱살캐리했다. 비록 스쿠데토는 밀란이 가져갔으나 자칫 나락으로 떨어질 뻔 했던 시즌을 코파 이탈리아 우승, 세리에 A 준우승, UCL 8강으로 비교적 선방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에투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에서 2골, 클럽 월드컵에서 1골 1어시스트, 코파 이탈리아에서 5골을 기록해 팀에 우승컵을 3개나 안겨주었고, 바이에른 뮌헨과의 UCL 16강 2차전에서도 1골 2어시스트로 원맨쇼를 펼치며 인테르를 8강에 올려놓았다.2011년 8월 12일 인테르에서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의 안지 마하치칼라로 이적료 3,500만 유로(약 541억원)에 연봉 2,000만 유로(약 310억원)로 이적,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 선수가 되었다. 호날두의 연봉이 1,200만 유로(약 186억원)라는 것을 감안할 때 가히 엄청난 액수.
참고로 인테르는 다음 시즌에 세리에 A 6위와 UCL 16강이라는 저조한 성적을 냈는데 새삼 에투의 공백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2010-11 시즌: 53경기(선발 53경기) 37골 16도움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세리에 A | 35 | 21 | 10 |
챔피언스 리그 | 10 | 8 | 5 |
코파 이탈리아 | 4 | 5 | 0 |
수페르코파 | 1 | 2 | 0 |
UEFA 슈퍼컵 | 1 | 0 | 0 |
클럽 월드컵 | 2 | 1 | 1 |
합계 | 53 | 37 | 16 |
1.5. 안지 마하치칼라
그런데 최근 350만 유로, 한화 수십억을 탈세한 혐의로 스페인 당국에 고발되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최고 5년형까지도 받을 수 있어서 진위 여부에 따라 에투의 커리어가 끝장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구단주인 슬레이만 케리모프의 사업실패로 인해 구단이 긴축재정에 돌입해 2013년 8월 30일 자유계약으로 팀을 떠났다.#
1.6. 첼시 FC
1.6.1. 2013-14 시즌
PL 4R 에버튼전에서 첼시 소속 데뷔전을 가졌다. 다만 경기 내내 마타와 포지션이 겹쳤으며, 썩 만족스럽지 못한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이어서 5R 경기에서도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경쟁자인 토레스가 좋은 폼을 보여준 지라 주전 경쟁이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PL 7R 노리치 시티전에서도 전성기의 폼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다.
PL 8R 카디프 시티전에서는 후반 20분에 드디어 에투가 득점에 성공했다! 아자르의 패스를 받고 그대로 때린 슛이 골대 안으로 들어간 것. 이날 해설을 맡은 장지현 해설위원은 드디어 최전방 공격수가 득점을 했다고 말했다. 그만큼 최전방 공격수의 부진이 너무 길었다. 여기에 도움까지 기록하면서 1골 1어시스트로 팀의 4-1 완승에 기여했다.
UCL 조별 리그 4차전 샬케전에서는 전반 30분에 중계진이 존 테리를 카메라로 포착하고 있을 즈음에 갑작스레 에투가 골을 넣었다. 다시 확인해보니 힐데브란트 골키퍼가 골킥하려는 것을 에투가 막은 것이 그대로 골대 안으로 굴러들어가면서 선제골이 된 것이다. 이로서 에투는 이번 시즌에만 두 번의 거대한 예능을 보여주며 수많은 축구팬들을 웃음짓게 만들어주었다. 그 뒤 별다른 일 없이 전반이 종료되고 후반, 절박함이 느껴질 정도로 공격적으로 밀고 올라오는 샬케에게 에투는 후반 8분 만에 윌리안의 스루패스를 받아 추가골을 선사했다.
PL 11R WBA전에서는 전반 종료 직전 아자르의 슈팅이 골키퍼의 손을 맞고 나온 것을 상대 수비수 리지웰이 머뭇거리는 사이 에투가 재치있게 슈팅하여 선제골을 넣으면서 리그 2호골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후 경기내용은 썩 좋지 못했고, 팀도 2-2 무승부를 거두었다.
하지만 에투가 첼시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다. 전성기 때에 비해 스피드가 상당히 느려졌고, 무엇보다 1대 1에서의 득점을 못 하고 있다. 덕분에 첼시는 올 시즌에도 제대로된 공격수 하나 없이 보내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에투가 다른 공격수들보다는 폼이 괜찮다는 것과 골 감각은 조금이나마 살아 있어서 가끔씩은 골을 넣어준다.
PL 15R 스토크 시티전에서 후반에 들어온 에투는 자신은 선발로 뛸 만한 선수가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 증명하는듯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1월 이적 시장에서 보강이 필수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각인시켰다. 단지 원톱 뿐만 아니라 3선 역시 보강이 필요하다고 팬들은 부르짓고 있다. 팀은 1-0 패배를 당했다.
PL 18R 스완지 시티전에서는 간만에 선발출전했지만 무리뉴 감독이 대놓고 경기 후 공격수의 골 결정력 부진을 언급할 정도로 답답했던 경기였다. 무수히 많은 찬스가 나왔으며 특히 마타는 두 번이나 결정적인 찬스를 에투에게 떠먹여 주었으나 에투가 날려먹었고 경기는 쉽게 풀리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에투가 그나마 움직임이 가장 좋다는 것이며 그 대체자들은 더 답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2선이 탐욕을 부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선이 볼 키핑 부족, 골 결정력 부족, 연계력 부족으로 버벅거리기만 하며 상대팀에게 역습 찬스를 줄 기회를 제공하기까지 하는데 2선이 알아서 할 수 밖에 없다.
PL 19R 리버풀전에서는 지난 경기에서 부진했는데도 불구하고 선발출전하여 결정적인 찬스에서 골을 넣으면서 지난 경기의 까임을 어느 정도 해소시켰고, 동시에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은 에투가 가장 잘하니까 계속 선발로 나오는 거다"라는 주장에 신빙성을 얻게끔 하였다. 그리고 리그만 3골 밖에 안되는 거지 챔스, 리그, FA컵, 리그컵 모두 합쳐 스트라이커 자원 중 가장 공격 포인트가 높은 선수는 에투다. 2013년까지 총 5골 5어시스트이다.[8]
그러던 중 PL 22R 맨유전에 선발 출전하여 전반 16분에 에투가 때린 슈팅이 절묘하게 캐릭의 발에 맞고 굴절되어 들어가면서 첼시가 선제골을 넣었다. 운과 슈팅 감각이 모두 제대로 겹친 훌륭한 골. 이후 전반 종료 직전 코너킥 찬스에서 케이힐의 땅볼 패스를 절묘한 위치에 서 있던 에투가 툭 하고 찬 것이 데 헤아를 맞고 들어가면서 첼시가 2골차로 앞서나갔다. 그리고 후반 4분 만에 또 다시 에투가 코너킥 찬스에서 케이힐의 헤딩을 데 헤아가 막고 흐른 볼을 그대로 밀어넣으면서 2012년 4월 29일 토레스의 해트트릭 이후 거의 1년 9개월 만에 첼시 공격수가 해트트릭을 하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여기에 개인 통산 14년 연속 두 자릿 수 골을 기록하면서 개인적인 기록도 제대로 쌓았다. 여담으로, 이 때 해트트릭을 하고 세리머니를 하는 중에 첼시 편 볼보이의 손을 잡아줬는데, 당시 볼보이였던 소년이 현재 첼시에서 노팅엄 포레스트로 이적한 캘럼 허드슨오도이라고 한다.
PL 25R 뉴캐슬전에서는 후반 17분에 첼시의 코너킥 찬스에서 윌리안이 코너킥을 올렸을 때 에투가 음비와와의 몸싸움 과정에서 페널티킥을 유도했다. 이를 아자르가 성공시키면서 득점에 일조했지만, 전체적으로 이 날도 골 결정력은 별로였던지라 살짝 아쉬웠다.
이상하게 첼시 이적 뒤에 굉장한 예능을 자주 보여주고 있다.### 이들 중 카디프 시티전에서의 행동은 반칙이다. 즉 오심이다.
PL 29R 토트넘전에서 에투는 전후반 내내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주었고 그것은 1골 1어시스트로 나타났다. 팀도 4-0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선제골을 넣고 한 노인 세리머니는 백미 중의 백미였다. 이후 UCL 16강 2차전 갈라타사라이와의 홈 경기 선제골, PL 31R 아스날전 선제골을 넣으며 3월에만 3경기 3골이라는 대활약을 펼쳤으나 아스날전 선제골 이후 6분 만에 햄스트링 부상을 당하고 토레스와 교체되어 나갔다.
무리뉴 감독의 무리한 언플로 폼이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컸으나 오히려 선발 출장할 때마다 득점포를 터뜨리며 첼시 스트라이커 중에서 믿을 만한 건 에투밖에 없다는 의견에 힘을 넣어주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UCL 4강 2차전 홈 경기에서는 무리뉴 감독이 후반에 총공세를 펼치면서 교체 투입되었다. 그런데 후반 14분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디에고 코스타가 에투의 발에 걸려 넘어졌고 주심은 곧바로 페널티킥을 선언한다. 이후 키커로 나선 코스타가 강력한 슈팅으로 골망을 흔들며 경기를 뒤집었다. 이후 아르다 투란에게 한 골을 더 내줬고 결국 첼시는 3-1로 패하면서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2013-14 시즌 종료 후 첼시와의 계약이 만료되었고, 자유계약으로 2014년 8월 27일 (한국시간) 에버튼으로 이적하였다.#
2013-14 시즌(첼시 기록): 35경기(선발 26경기) 12골 5도움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21 | 9 | 3 |
챔피언스 리그 | 9 | 3 | 2 |
FA컵 | 3 | 0 | 0 |
풋볼 리그컵 | 2 | 0 | 0 |
합계 | 35 | 12 | 5 |
1.7. 이후
그러나 2014-15 시즌 도중 세리에 A의 삼프도리아와 2년 반 계약에 동의했다는 기사가 떴다.
2015년 1월 27일 (한국시간) 삼프도리아 이적이 확정되었다. 등번호는 99번.
삼프도리아로 이적한 지 1주일도 안 되어서 감독인 시니샤 미하일로비치와 추가 훈련을 놓고 대판 싸웠고, 퇴단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화해한 듯 하다.
그리고 안탈리아스포르의 구세주로 자리잡았다. 리그 15경기에서 13골 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 득점 1위를 기록 중이다. 하위권팀이던 안탈리아스포르는 그의 활약 덕분에 7~9위 정도 중위권 성적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유수프 심세크(Yusuf Şimşek) 감독이 물러나 공석인 팀 감독까지 임시로 맡게 되었다. 2015-16 시즌 기록은 31경기 20골 6어시스트.
2016-17 시즌에도 30경기에서 18골 6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2018년 1월 30일 안탈리아스포르와 상호계약해지를 했고 다음날 오후 3시 코니아스포르와 계약 정식 서명을 하였다. 등번호는 81번. 8월 4일 코니아스포르와의 계약을 해지하였다. 이유는 높은 임금 때문이라고 추측. 2018년에는 카타르 SC로 이적했다. 등번호는 81번이다.
2019년 9월 8일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2. 국가대표 경력
에투는 국가대표팀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2000 시드니 올림픽 금메달을 시작으로 2000ㆍ2002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우승을 이끌었고 2006ㆍ2008년 대회에서는 득점왕을 차지하는 등 눈부신 성과를 거뒀다. 또한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통산 29경기 18골로 대회 최다 골 기록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월드컵에서는 총 4회 출전[9]하여 8경기 3골 1어시스트를 기록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1997년 3월 9일 코스타리카와의 친선 경기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른 에투는 카메룬의 1998 프랑스 월드컵 엔트리에 포함되었고 조별 리그 2차전 이탈리아전에서 교체 출전하기도 한다. 참고로 에투는 이 대회에 출전한 모든 선수들 중 가장 어린 나이였다.
2002 한일 월드컵에도 출전하여 조별 리그 1차전 아일랜드전에서 파트리크 음보마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하고 2차전 사우디아라비아전에서는 결승골을 득점하는 등 제 몫을 다하였으나 팀은 1승 1무 1패 조 3위로 탈락했다.
2003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는 조별 리그 브라질전에서 멋진 발리슛으로 결승골을 기록하는 등 팀의 준우승에 공헌하였다.
2006 독일 월드컵 아프리카 예선에서는 코트디부아르에 밀려 본선에 오르지 못하였다.
8년 만에 나선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에투는 주장으로 참가하게 된다. 그리고 조별 리그 2차전 덴마크전과 3차전 네덜란드전에서 각각 한 골씩 득점하며 제 몫을 다하였지만 팀은 3전 전패 조 4위로 탈락했다.
2011년 3월 26일 2012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예선 원정에서 세네갈한테 깨지고 6월 4일 안방에서 설욕전을 벌이려고 했는데 0:0 무승부 상태에서 종료 직전에 얻은 페널티킥을 에투가 허무하게 실축해서 무재배 모드가 되었다. 때문에 결과적으로 1경기 남겨놓고 조 1위 세네갈에 승점이 5점이나 밀려서 본선 직행은 안드로메다로, 게다가 조 2위 추가진출도 물 건너갔다. 만일 그 페널티킥이 들어가서 1:0 승리를 거두었더라면 승점 차이가 2점으로 좁혀져 그나마 희망이 있었을 것이다.
2012년에는 2013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예선 최종전에서 본선 진출을 위해 대표팀에 복귀했지만 팀은 2:1로 승리하고도 골득실에 밀려 카보베르데한테 본선 진출권을 내주고 만다.
이후 2014 브라질 월드컵에 출전해서 조별 리그 1차전 멕시코전에서 풀타임을 뛰었지만 무릎 부상으로 나머지 2경기를 결장했고, 팀도 3전 전패 조 4위로 탈락하였다.
2014년 8월 27일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다.
[1] 마요르카 역대 최고 이적료 방출 기록이다.[2] 또한 포르투에서 데쿠를 데려온 데 이어 리오넬 메시의 재능이 만개하면서 바르셀로나는 향후 열 시즌 동안 클럽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맞게 된다.[3] 디에고 포를란과 동률.[4] Liga de Fútbol Profesional(스페인 프로축구연맹)[5] 메시 38골, 에투 36골, 앙리 26골.[6] 루이스 수아레스와 1, 2위를 다툰다.[7] 세부적인 계약 내용은 이브라히모비치 ↔ 에투 + 4,000만 유로[8] 문제는 무리뉴가 인테르에서 트레블을 할때도 에투를 스트라이커로 사용한 적은 없다. 당시 무리뉴는 에투를 오른쪽 윙포워드로 기용했다.[9] 1998, 2002, 2010,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