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佐治敬三일본의 기업인. 산토리의 2대 CEO였다. 산토리의 CEO였던 경력보다 후술한 지역비하 사건으로 유명하다.
2. 생애
1919년 11월 1일 오사카부 히가시구에서 산토리 창업자인 토리이 신지로(鳥井信治郎)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932년경에 외가에서 입양하여 성이 '토리이(鳥井)'에서 '사지(佐治)'로 바뀌었지만 자신은 오사카의 친부모 밑에서 계속 살았다.
1940년 9월 23일에 친형 도리이 기치타로가 향년 31세로 사망했다.
오사카부 이케다 사범학교 부속 초등학교, 구제 나니와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1942년 4월에는 오사카 제국대학 이학부 화학과를 졸업했다. 재학 중에는 유기화학의 권위자인 코타케 나지오 교수를 사사[1]했다.
1945년 10월에는 산토리의 전신인 '고토부키야'에 입사했다. 1946년 2월에 고토부키야(현 산토리 홀딩스 주식회사)의 투자로 재단법인 식품화학 연구소(현 산토리 생명과학 재단)가 설립되었으며 그는 초대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무렵부터 효고현 카와베군 카와니시쵸(현·카와니시시)에 살게 되었는데 사망할 때까지 계속 카와니시시에서 살았다.
1961년에 그는 고토부키야의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1963년 3월 사명을 고토부키야에서 산토리로 변경했다. 1969년에는 도리이 음악 재단(현·산토리 음악 재단)을 설립해 이사장에 취임한다. 1971년에는 칸사이 공공 광고 기구(현재의 AC 재팬)를 설립했으며 1979년에는 식품화학연구소를 재단법인 산토리생물유기과학연구소로 개칭하고 같은 해에 산토리 문화 재단을 새롭게 설립해 「지역 문화상」, 「학예상」을 창설했다.
1980년 생물유기과학연구소 이사장으로 부임해 일본 최초의 박사후연구원이 되었다. 1985년에 오사카 상공회의소 회장에 취임했다. 1987년 오사카 바이오사이언스 연구소 설립에 자문위원으로 관여했다.
그러다가 그와 산토리에게 두고두고 남을 흑역사가 생겼다.
3. 도호쿠 지역비하 사건
자세한 내용은 사지 케이조 도호쿠 지역비하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4. 이후
사건 이후인 1990년에 그는 산토리의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했다. 1991년에는 산토리 생물 유기 과학 연구소 소장에 취임했다. 1999년 11월 3일 오사카부 스이타시의 오사카대학병원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향년 80세.5. 기타
1970년대 일본 최고의 게이샤였던 이와사키 미네코는 여러 유명인들을 손님으로 접대했는데, 그 중에 사지 케이조도 있었다. 사지와의 인연으로 그녀는 산토리 광고모델이 되기도 했다.[1] 스승으로 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