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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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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BDFB9><colcolor=#000> 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낭
Charles Ferdinand, Duc de Berry
파일:Charles-Ferdinand_d'Artois,_duc_de_Berry.jpg
이름 샤를 페르디낭 다르투아
(Charles-Ferdinand D'Artois)[1]
출생 1778년 1월 24일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궁전
사망 1820년 2월 14일 (향년 42세)
프랑스 왕국 파리
배우자 나폴리시칠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2] (1816년 결혼)
자녀 루이즈 엘리자베트, 루이, 루이즈[3], 앙리 5세, 샤를로트(사생아), 루이즈(사생아), 샤를(사생아), 페르디낭(사생아), 페르디낭(사생아), 샤를(사생아), 루이즈(사생아), 알릭스(사생아)
아버지 샤를 10세
어머니 사보이아의 마리아 테레사
형제 루이 19세, 소피, 마리 테레즈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샤를 페르디낭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부르봉 왕정복고 이후2.2. 암살
3. 가족
3.1.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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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왕자로 프랑스 국왕 샤를 10세의 차남이자 명목상 국왕 루이 19세의 친동생이며, 마찬가지로 명목상 국왕 앙리 5세의 아버지이다.

2. 생애

샤를 페르디낭은 1778년 1월 24일 당시 아르투아 백작이었던 샤를 10세사보이아의 마리아 테레사 사이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베르사유 궁전에서 태어났다. 당시 프랑스 국왕이었던 큰아버지 루이 16세와 큰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직 자녀가 없었으므로 동생들인 루이 18세샤를 10세를 임시 후계자로 삼아서 샤를 페르디낭 역시 베르사유 궁전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친사촌이자 형수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가 태어났고, 1781년 드디어 아들인 루이 조제프, 1785년 루이 17세가 태어나서 왕위 계승 서열이 밀려나 이대로 방계 왕족으로 살아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10대 때 프랑스 뿐만 아니라 전 유럽을, 나아가선 전 세계를 뒤흔들어 놓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영국으로 피신해야만 했고, 큰아버지 루이 16세가 처형되고 친사촌 루이 17세가 탕플 탑에서 어린 나이에 옥사함으로서 샤를 페르디낭은 부르봉 왕당파의 핵심 인사가 되었다.

1792년부터 1797년까지 반혁명군으로 복무하였고, 1801년부터 1814년까지 영국에 망명자 신분으로 거주하였다. 그가 10대~30대였던 1789년~1814년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으로 대변되는 격동기였기 때문에 결혼 적령기임에도 오랫동안 결혼하지 못하고 1814년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부르봉 왕정복고가 이뤄지면서 샤를 페르디낭과 부르봉 왕가가 프랑스로 귀환한 이후에야 1816년에 당시로선 매우 늦은 나이인 38세에 양시칠리아 왕국 국왕 프란체스코 1세의 장녀 마리아 카롤리나와 결혼할 수 있었다. 샤를 페르디낭과 결혼한 마리아 카롤리나는 이후 프랑스식인 마리 카롤린으로 불리며 차례대로 루이즈 엘리자베트, 루이, 루이즈 마리 테레즈, 앙리 등, 2남 2녀를 낳았지만 이중 장녀 루이즈 엘리자베트와 장남 루이는 출생 직후 요절했고 막내이자 차남 앙리는 유복자로 탄생했다.

2.1. 부르봉 왕정복고 이후

마리 카롤린은 1798년생으로 샤를 페르디낭과 무려 20살 연하였으니 결혼생활은 처음부터 삐걱거릴 수밖에 없었다.[4] 샤를 페르디낭은 특유의 활달하고 매사에 적극적인 인싸 기질로 왕실의 지지도를 높였지만 동시에 그 때문에 수많은 여성들과 자주 어울리고 염문설까지 붙었다.

부르봉 왕정복고 이후 샤를 페르디낭은 둘째 큰아버지 루이 18세, 아버지 샤를 10세, 형 루이 19세 다음가는 왕위 계승권자였으며 특히 큰아버지와 형이 자녀가 없으므로 샤를 페르디낭이 더 오래 생존하고 프랑스 혁명 이외의 더 이상의 혁명이 없었다면 큰아버지, 아버지, 형의 뒤를 이어 샤를 페르디낭이 자동으로 왕이 되어 샤를 11세가 되었을 것이다.[5]

2.2. 암살

1820년 2월 13일, 샤를 페르디낭은 파리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을 관람하고 다른 곳에 가려고 마차를 타려다 말 안장 제작자인 루이 피에르 루벨(1783 ~ 1820)의 칼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샤를 페르디낭은 즉시 응급 치료를 받았으나 상처가 너무 깊어 다음날인 1820년 2월 14일 사망했다. 이때 아내인 마리 카롤린도 샤를 페르디낭의 암살 당시 현장에 있었고, 마차 안에서 남편이 습격당하는 장면을 눈앞에서 목격하였다. 이 때 마리 카롤린은 임신 초기였는데, 아이는 왕실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으로 유산되지 않고[6] 출생 때까지 꿋꿋이 자라 1820년 9월 29일 앙리 5세로 무사히 태어났다.

샤를 페르디낭의 죽음은 부르봉 왕조가 또다시 프랑스 혁명 이전의 절대왕정을 추구하고 공화 혁명을 일으키려는 지하 혁명 세력은 물론 온건한 입헌군주제 주장 세력까지 모조리 색출해서 없애려고 마음먹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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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arie Caroline of Bourbon-Two Sicilies.jpg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아내는 양시칠리아 국왕 프란체스코 1세의 장녀 마리아 카롤리나이며 샤를 페르디낭과 결혼한 뒤에는 프랑스식인 마리 카롤린으로 불리게 되었다. 샤를 페르니당과의 사이에서 차남이자 유복자인 샹보르 백작 앙리를 포함하여 루이즈 엘리자베트, 루이, 루이즈 마리 테레즈 등, 2남 2녀를 낳았지만 이중 장녀 루이즈 엘리자베트와 장남 루이는 출생 직후 요절했다.

마리아 카롤리나는 1820년에 남편 샤를 페르디낭이 암살당한 이후 유복자인 아들 샹보르 백작 앙리를 낳고, 이탈리아로 망명해 자신의 아들 앙리를 프랑스 왕으로 옹립하고자 왕당파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1832년루이필리프 1세가 재위 중인 프랑스에 잠입해서 반란을 선동하다가 실패한 뒤 체포되어 수감되었는데, 그 이듬해에 감옥에서 남편이 13년 전에 죽었을 터인 진짜 기적의 아이(...)를 출산하는 대형 사건을 일으켰다.

물론 남편 샤를 페르디낭이 10여년 전에 죽었으니 오늘날 기준으로는 불륜은 아니지만, 당시는 19세기인데다가 혼외정사를 인정하지 않는 카톨릭 교도로써 이는 심각한 죄악이었다. 마리아 카롤리나는 결국 이탈리아 출신의 귀족인 에토레 카를로 루케시팔리[7]와 1831년에 비밀 결혼을 했으니 혼외정사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설령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해도 당시 마리아 카롤리나는 태후의 자격으로 아들 샹보르 백작 앙리를 왕위에 올려, 그의 섭정을 맡겠다며 자처했는데 그런 사람이 외국 출신 非 왕족 남성의 아이를 낳아버렸으니 당시로서나 지금으로서나 굉장히 심각한 문제였다. 결국 마리아 카롤리나의 권위와 인기가 땅바닥까지 떨어져 더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프랑스 정부는 곧 그녀를 방면했으나, 이탈리아인과 결혼하게 된 그녀는 더이상 섭정은커녕 프랑스 국적자조차 아니게 되었고 결국 시가인 부르봉 왕조에서도 쫒겨나고 말았다. 아들인 샹보르 백작 앙리도 마리 카롤린보다 당고모이자 큰어머니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8]를 어머니처럼 따랐다.

결국 마리아 카롤리나는 풀려난 이후 루케시팔리와 시칠리아로 건너가 감옥에서 출산한 첫째딸을 포함 총 1남 4녀를 낳았다.[9] 이 부부는 이탈리아에서도 궁전과 예술품을 사들이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지만, 1860년대에 이탈리아에서 통일운동이 펼쳐지자 결국 다 처분하고 오스트리아로 이주해 그곳에서 사망했다.

3.1.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나폴리시칠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Marie Caroline of Naples and Sicily)
1녀 파르마 공작부인 루이사
(Louise, Duchess of Parma)
1819년 9월 21일 1864년 2월 1일 파르마 공작 카를로 3세
슬하 2남 2녀[10]
1남 샹보르 백작 앙리[11]
(Henri, Count of Chambord)
1820년 9월 29일 1883년 8월 24일 오스트리아에스테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대공
살아생전 얼마나 여색을 밝혔으면 암살당한 이후 같은 해에 아내 마리아 카롤리나가 낳은 적자 앙리 5세 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들에게서 태어난 유복자들 4명 더 태어났다. 그래서 훗날 앙리 5세가 슬하에 자녀가 없어서 부르봉 본가의 직계 남계는 끊겼지만, 적녀인 루이즈 마리 테레즈의 자손들과 수많은 내연녀들에게서 낳은 사생아들의 후손들은 아직도 남아있다.

[1] 망명 당시 아버지가 아르투아 백작이었기에 아버지의 작위명에 따라 성씨를 다르투아로 개명했다. 루이 16세루이 18세, 샤를 10세 모두 정식 직계 남계가 다 끊겼기에 역사적 가정일 뿐이지만 만약 루이 16세의 직계 남계(루이 17세)가 끊기지 않고 오랫동안 왕위를 유지하고 루이 18세샤를 10세의 직계 남계 역시 끊기지 않았다면 루이 18세의 직계 남계는 프로방스를 사실상의 성씨로 사용하고, 샤를 10세다르투아를 사실상의 성씨로 사용했을 것이다. 본인들의 시조 역시 본래는 카페 왕조여서 본래 성은 카페지만 루이 9세의 막내아들 로베르의 장남 루이가 부르봉 공작위를 하사받은 이후 그 후손들이 카페 대신 부르봉을 사실상의 성씨로 오랫동안 사용해왔기에 사실상의 성씨로 굳어진 것이다. 부르봉 왕가에서 갈라진 먼 친척 오를레앙 왕가 역시 마찬가지. 이 때문에 루이 16세가 사형선고를 받을 때 루이 카페라는 이름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2] 양시칠리아 국왕 프란체스코 1세의 장녀.[3] 파르마 공작 카를로 3세의 아내.[4] 오히려 장인인 양시칠리아 왕국 국왕 프란체스코 1세가 1777년생으로 사위인 샤를 페르디낭보다 겨우 1살 많았다. 장모 역시 장인과 동갑이다.[5] 실제로 샤를이란 이름은 루이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부르봉 왕조 정통파 후손들이 자주 애용하는 이름으로, 외아들인 앙리 5세 사후 부르봉 왕조 정통파를 계승했다는 부르봉앙주 가문에서는 이후 프랑스 왕위 요구자로 자칭 샤를 11세, 샤를 12세도 있었다. 반면 먼 친척이자 적대적인 부르봉-오를레앙 가문은 필리프란 이름을 선호하고, 마찬가지로 프랑스 왕위(황위) 요구자인 보나파르트 가문은 그냥 수장들마다 나폴레옹이라는 이름만 고수하고 있다.[6] 아무리 남편과 처음부터 사이가 안 좋았다지만 눈앞에서 암살 현장을 목격한 이상 자칫하면 그 충격으로 유산할 수도 있었다. 왕당파에서 괜히 앙리 5세기적의 아이라 부르며 칭송한 것이 아니다.[7] 8대 델라 그라치아 공작이다.[8] 큰아버지 루이 19세의 아내이자 아버지 샤를 페르디낭의 친사촌.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와 루이 19세가 사촌간 혼인을 하면서 촌수가 이렇게 꼬였다.[9] 막내 아돌포는 1840년생으로 당시 마리아 카롤리나는 40대의 노산이었다. 특히 아돌포는 요절한 이부누나 루이즈 엘리자베트와 부모자식 수준인 23살간의 나이 차이가 난다.[10] 파르마 공작 로베르토 1세[11] 명목상의 프랑스 국왕 앙리 5세지만 샹보르 백작이라는 호칭으로 더 많이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