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3:30:50

서주 전투


<colcolor=#000> 서주 전투
徐州之戰
시기 197년
장소 서주 일대
원인 원술의 서주 지배 야욕
교전 중(仲) 한(漢)[1]
황제 황제 원술 황제 유협
지휘관 대장군 장훈
대장군 교유
한섬
양봉
평동장군 여포
참모 진규[2]
병력 수 만 명 3,000여 명[3]+@[4]
피해 피해 규모 불명[5] 피해 규모 불명
결과 중나라의 대패 및 여포의 회남 침략
영향 중나라 몰락의 시작

1. 개요2. 정사
2.1. 발단2.2. 전개
3. 결과4. 평가5. 여담6. 삼국지연의7. 기타 창작물

1. 개요

원술이 그의 대장 장훈, 교유를 한섬, 양봉과 합세토록하여 보병과 기병 수만으로 하비의 여포를 향해 일곱 길로 공격했다.
袁術遣其大將張勳、橋蕤等與韓暹、楊奉連勢,步騎數萬趣下邳,七道攻布。
《자치통감》권 62

197년, 원술이 수 만의 대군을 일으켜 여포가 지배하는 서주를 일곱 갈래 길로 침공하여 벌어진 전투.

2. 정사

2.1. 발단

197년, 원술은 예언서의 내용을 명분 삼아 결국 스스로를 천자라고 칭했다. 국호는 중(仲)이었다. 동시에 원술은 여포에게 사신을 보내 자신이 황제를 칭한 것을 알리고, 정략결혼으로 딸을 보낼 것을 요구했다. 여포는 칭제가 역적질임을 알고도 딸을 순순히 원술에게 보내는데, 원술이 공식적으로 칭제를 발표하기 이전부터 진규가 원술을 만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보이듯 여포 또한 원술이 이미 조조와 허도 조정에 대항해 칭제할 계획이 있다는 것은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삼국지》와 《후한서》의 표현에 따르면 이때 진규는 원술과 여포가 손잡는다면 서주와 양주가 합종하는 것이라 국가적 혼란이 그치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다음과 같이 여포를 설득한다.
조공(조조)이 천자를 봉영(奉迎)해 국정을 보좌하고 그 위령(威靈)을 세상에 드날리고 장차 사해를 정벌할 것이니, 장군께서는 의당 그와 함께 힘을 모아 계책을 세워 태산 같은 안녕을 도모해야 합니다. 지금 원술과 혼인을 맺으면 천하에 불의(不義)의 이름을 덮어쓰게 되니 필시 누란지위가 있을 것입니다.
여포는 원술이 칭제할 것을 진작부터 알고 딸을 보냈음에도 진규의 말을 듣고 마음을 바꾸게 된다. 여포도 나름대로 원술이 예전에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은 일에 원망을 품고 있었으므로 딸에게 돌아오게 하고선 혼인을 끊고, 원술군의 사자 한윤을 묶어 조조에게 보내니 한윤은 허도의 저자거리에서 효수되었다.

여포 본인도 이미 조조가 황제를 옹립하고 원술이 칭제를 공식적으로 밝힌 시점에서 진규의 지적과 같은 너무나 당연한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굳이 딸을 보냈다가 진규의 설득에 결정을 물린 이유는 불명확하다. 이에 대해 사서상으로는 원술이 이전에 여포를 받아주지 않은 일을 비롯한 원술에 대한 여포의 개인적 원한이 결정적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는데, 이미 사서상 나타나는 상황에서도 원술은 진궁과 학맹을 부추겨 여포를 죽일 것을 사주해 놓고 이 시도가 실패하자 뻔뻔하게 혼담을 제의하는 모습을 보였으므로, 여포는 나름의 이해득실을 고려해 원술과 혼약을 맺긴 했으되 원술에 대한 개인적 감정이 상당히 복합적이었을 것이고, 원술과 오랜 개인적 친분이 있기도 했던 진규는 아마 이런 측면을 부추겼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여포의 행동에 원술은 대노하여 한섬, 양봉과 세력을 연결하고 장훈과 교유를 대장으로 삼아 수 만명의 군사를 일으켜 서주를 친다.

2.2. 전개

원술이 무려 수만의 대군을 일으켜 일곱 길로 밀고 올라온다는 소식에 여포는 두려움에 떨며[6] 진규를 책망했지만 진규는 원술의 부장인 한섬, 양봉이 원술에게 붙은 지 얼마 되지 않으니 전리품을 모두 그들에게 준다는 약속을 하면 넘어올 것이라고 여포를 설득했다.
여포: 지금 원술 군이 쳐들어온 것은 경 때문이오. 이 일을 어찌해야 되겠소?
진규: 한섬, 양봉과 원술은 졸지에 합해진 군사일 뿐입니다. 책략이 평소에 정해져 있던 것도 아니니 능히 서로 유지할 수 없습니다. 제 아들인 진등이 이미 이를 헤아렸으니, 가히 뿔뿔이 흩어질 것입니다.
여포가 진규의 계책을 옳게 여겨 사람을 보내 한섬과 양봉을 설득하길, 자신과 힘을 합해 원술 군을 공격하고 빼앗은 군자금은 모두 한섬과 양봉에게 준다고 했다. 《구주춘추》에 따르면 여포가 한섬, 양봉에게 서신을 보냈다.
지금 원술이 반역하니 함께 토벌해야 하는데, 어찌 힘을 합해 도리어 이 여포를 공격하시오? 나는 동탁을 죽인 공이 있어 두 장군과 더불어 공신이오. 함께 원술을 공격해 공을 세울 만하니,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되오.
한섬, 양봉이 이 서신을 받고 계획을 바꿔 여포를 따랐다. 여포가 진군하여 장훈 등의 둔영과 백보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 한섬과 양봉의 군사들이 동시에 원술의 군사들을 공격해서 열 명의 장수를 참수하고, 살상되고 물에 떨어져 죽은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이때 교유는 여포에게 사로잡혔으나, 곧 풀려나 원술에게 돌아갔다.

《영웅기》에 따르면 위의 대승을 거둔 여포는 한섬과 양봉의 2군과 함께 가는 곳 마다 노략질을 하며 회수건너 양주 구강군 수춘현까지 이른다. 물과 뭍으로 아울러 진격하며 지나는 곳마다 노략했으며, 양주 구강군 종리현에 이르러 크게 노획하고 되돌아갔다고 한다. 여포는 실컷 노략질을 하고 다시 회수를 건너 그 북쪽에 도달한 뒤 원술에게 다음과 같은 조롱하는 글을 남겼다.
귀하는 군이 강성한 것을 믿고 늘 호언하기를, 맹장, 무사들을 억제한다고 하셨소. 내가 회수 남쪽에서 한 때의 시간동안 거닐으나 귀하는 수춘에 쥐새끼처럼 숨어 있고 고개를 내미는 자 조차 없으니 맹장, 무사들은 모두 어디에 있단 말이오? 귀하는 큰소리 쳐서 천하를 속이는 것을 좋아하지만 어찌 천하인들을 모두 속일 수 있겠소?
이 편지를 받은 원술은 대노하여 친히 보병과 기병 5천을 일으켜 이를 이끌고 회수 가에 이르렀으나, 여포의 군사들은 모두 회수를 건넌 뒤였고, 여포군은 회수 북쪽에서 다시 한 번 크게 원술을 비웃은 뒤 되돌아갔다.

3. 결과

원술의 서주 원정이 낳은 결과는 대단히 처참했다. 이 전투의 여파로 중나라가 입은 피해는 이루 헤아리기 어려운 수준이었을 것이다. 힘껏 동원한 수만 대군은 여포에게 짓밟혔는데, 대장군인 교유가 사로잡힐 정도였으니 그 군세가 완전히 무너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승세를 탄 여포가 수륙으로 병진하며 도적 출신인 한섬과 양봉이랑 함께 중나라의 수도이자 원술의 본거지인 수춘까지 와서 마음껏 노략질을 했기때문에 이때 중나라는 정말 초토화가 되었을 것이다.

4. 평가

한마디로 중나라 버전 이릉대전이다. 원정의 여파로 군사력과 인재풀에 미친 손해는 측정하기 어려울 정도였겠지만, 처참하게 실패한 원정으로 초대 군주로서 원술의 명망은 크나큰 타격을 입게 된다. 더불어 신생 제국으로써 개국 초기의 하늘을 찌를 듯했던 중(仲)의 기세도 1년을 채 못 가서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히고 만다.

이릉대전과 마찬가지로 결과가 나빠서 그렇지, 중나라 입장에서는 이 서주원정이 전략적으로 아예 틀린 선택도 아니었다. 만약 여포를 격퇴시키고 서주를 얻는 데 성공했다면, 진규가 우려했던 대로 서주와 양주가 합종하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에, 후한 입장에서는 장차 크나 어려움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칭제에서 오는 역적질이라는 이미지를 희석시키고 오히려 지지세력을 결집하는 전환점이 되었을 수도 있다. 도참사상을 통해 원술 자신 지배의 당위성을 세우고, 대명문가 원(袁)씨의 적통이라는 브랜드 파워에 더해 이름난 군웅인 여포를 격퇴했다는 군사적 실력까지 검증함으로써 후한의 시대는 끝났고, 원술이 세운 중나라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주유는 원술의 휘하에 있었는데, 급진적인 시각에서는 주유 역시도 황제 원술과 중나라 건국 이념의 열렬한 지지자였다고 볼 수도 있다. 만약 원술이 처참한 행보를 이어가지 않고 군사적 성공을 거두며 양주, 서주를 굳혔다면 주유같은 인재들이 이탈하지 않고 모여들어 더욱 강성해질 수 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 만약은 없다고, 원술의 처참한 군재 덕분에 사실상 동네북 신세에 이미지는 역적, 양아치, 폭군으로 박히게 된다. 애초에 이 승부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한섬과 양봉의 이탈 원인을 분석해보면 칭제가 얼마나 리스크가 큰 짓인지 가늠해볼 수 있다. 한섬과 양봉이 배신하게 된 표면적인 동기는 원술이 참칭한 것이 원인이었는데, 깊게 들여다보면 이들은 헌제의 수레를 호송하는데 공을 세운 자들로 한실에 협력한 충신들인데 천자를 자칭한 원술에게 붙어 역적의 누명을 써서야 되겠는가라는 명분에 마음이 움직여 진규에게 넘어갔을 가능성이 크다.

5. 여담

후일담으로, <선주전>에 따르면 이 전투의 향방을 결정짓는 데 큰 기여를 했던 한섬과 양봉은 이후에도 서주와 양주 일대에서 도적질을 자행했는데, 유비가 이를 격퇴하고 모두 참수한다.

6. 삼국지연의

삼국지연의에서도 황제를 칭한 원술이 여포와 혼사를 이어가다가 여포가 원술의 사자인 한윤을 조조에게 보내 한윤이 참수당하자 원술이 분노해 대군을 일으켜 여포를 친 것까지는 정사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삼국지연의에서는 진규가 낸 책략이 진등이 낸 것으로 바뀌었고, 원술의 군세가 20만대군이라고 과장하여 명시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연의에서는 원술의 칠로침공과 여포군의 대응에 대해 꽤나 자세히 다루고 있다. 원술군 입장에서는 정사에서 원술 밑에 있었던 모든 장수들이 등장하는 이른바 원술군 버전의 올스타전이라 할 수 있겠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원술의 칠로침공군을 다음과 같이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원술군 교전 장소 여포군
제1군: 대장군 장훈 서주 평동장군 여포
제2군: 교유 소패 고순
제3군: 진기 기도 진궁
제4군: 뇌박 낭야 장료&장패
제5군: 진란 갈석 송헌&위속
제6군: 한섬 하비 -
제7군: 양봉 준산 -
본대: 7로도구응사[7] 기령 서주 평동장군 여포
본대: 황제 원술[8] 서주 평동장군 여포
결과는 실제 역사처럼 원술군의 대패로 묘사된다.

7. 기타 창작물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 삼국지 11에서는 197년에 해당하는 시나리오는 없고, 198년 여포토벌전이 존재하는데, 이때 여포와 원술은 동맹상태라서 사실상 원술의 칠로침공이 구현되어있지 않다. 여포로 플레이한다면 실제 역사처럼 동맹을 파기하고 또 다시 회남지방을 침략하는 것이 가능하긴 하다
[1] 여포가 후한 조정에 충성을 바쳤는지 여부와는 별개로 여포는 명목상 후한 소속의 관리였다. 당시 여포의 직위 중에서 서주자사는 자칭이긴 했지만, 천자를 옹립한 조조가 황실의 이름을 빌어 평동장군에 임명했기 때문이다.[2] 지휘관은 아니었지만, 승부에 큰 영향을 미쳤다[3] 자치통감에 따랐을 때[4] 한섬과 양봉의 군세[5] 대패 및 궤주[6] 자치통감에 따르면, 당시 여포의 군세는 병력 3천에 말 4백필뿐이었다고 한다.[7] 일곱 갈래 군사를 지원하는 관리[8] 이풍, 양강, 악취를 진군을 재촉하는 관리인 최진사로 삼아 대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