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성혁명(性革命, sexual revolution) 또는 성해방(性解放, sexual liberation)은 서양 사회에서 성적 행동이 공개적으로 일반화된 19세기 빅토리아니즘에 선전 포고한 성행위의 사회적인 쿠데타를 말한다.미국에서는 196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성과 개인들 간의 관계에 관한 행동의 전통적 태도에 대하여 도전한 사회 운동이었다.
성해방은 전통적인 이성간, 일부일처제의 결혼관계를 벗어난 성관계를 받아들이자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것은 산아제한의 일반화와, 산아제한을 위한 약물복용, 공적인 노출, 포르노그래피, 혼전 성관계, 동성애, 자위행위, 소아성애, 낙태 합법화와 같은 일들을 포함한다.
캐나다, 서독과 달리, 미국에서는 68운동 자체가 정치적으로 지지율이 낮아 철저하게 실패하다시피했기때문에, 정치적인 주도권을 얻어서 추진된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1946년부터 1964년까지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들은 피임약의 복용비중이 높고 이전 세대에 비해 다산가구가 적었으며, 또한 1970년대에 낙태권에 대한 이슈제기가 적극적으로 제기되어 낙태가 미국 대법원에 의해 합법화되는 영향이 있었으며, 또한 오일쇼크로 인한 경기침체까지 겹친 결과 1960년대 중반까지는 인구과잉이 우려될정도로 높았던 미국의 출산율이 1970년대 중반에는 인구대체수준 아래로 떨어졌다. 이후 약간의 반등은 있었지만 베이비붐 시대에 비하면 출산율이 현저히 낮은것은 여전했다.
2. 최초의 성혁명
서구 문화에서는 1960년대의 혁명이 두 번째이며 첫번째로 이 성혁명이 사용된 시기는 1920년대 후반으로 추정된다.1929년에 "섹스는 필요한가? 아니면, 왜 당신은 그런 식으로 느끼는가?"이 제임스 터버와 E.B. 화이트에 의해 출간되었다. 이 책의 한장에서 '성 혁명: 모든 성행위 장면에 완전한 설문조사를 하는 편이 낫다'라는 제목이 적혀있었다. 콘스탄틴 두셴코는 러시아에서 1925년에 이미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성혁명 역사가들은 1870년에서 1910년까지를 최초의 성혁명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빅토리아시대의 도덕이 세계의 관심을 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프랑스의 인구정체가 발생했고 영국, 독일 등 유럽 여러국가에서 출산율이 서서히 떨어지는 현상이 발생하여[1] 인구증가율이 점차적으로 낮아졌다.
- 프로이드 학파
비엔나의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의 행동이 무의식의 충동, 주로 리비도 또는 '성에너지'에 의해 동기부여가 된다고 믿었다. 프로이드는 이러한 무의식적 충동이
어떻게 억압받고 또 다른 문화적 출구를 통해 표현되는지를 알아내었다. 그는 이러한 치료를 "정신분석학"으로 불렀다.
- 플레이보이 문화
1953년에 시카고에 살았던 휴 헤프너는 플레이보이 잡지를 창간해하였다. 최초의 출판물에는 마릴린 먼로를 섹스 심볼로 표현하였다. 그 이후 이 잡지는 큰
성공을 이루었다. 1960년에 휴 헤프너는 시카고에 플레이보이 클럽을 열었고, 이것은 오늘날 나이트클럽 같은 문화의 원조가 되었다.
- 에로 소설
1959년에서 1966년까지, 미국 정부는 지나치게 선정적인 내용을 담은 세가지의 서적 출판을 금하였다.
1959년에는 그로브 출판에서 D. H. 로런스의 <차타레 부인의 사랑>을 출판하였다. 미국의 우편국에서 우편물에 있는 이 서적을 압수하였다.
[1] 한국과 대만 등 동아시아 국가와 다르게 급속하게 진행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