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20:21:20

손기찬

성명 손기찬(孫基瓚)
본관 일직 손씨[1]#
생몰 1886년 12월 14일 ~ 1979년 6월 3일
출생지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면 반계리
사망지 경상북도 상주군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손기찬은 1886년 12월 14일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면 반계리에서 손경헌(孫慶憲)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고, 어릴 때 경상북도 상주군 화북면 중벌리로 이주했다. 그는 1913년 풍기에서 채기중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광복단(光復團)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활동 등을 수행했고, 1915년 광복단과 대구의 국권회복단(國權恢復團)이 연합하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하자 이에 가입했다. 이후 1916년 음력 6월, 그는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 지시에 따라 자신의 집에 권총을 보관하고 있다가 11월 7일 약목(藥木) 시장에서 채기중, 임봉주(林鳳柱), 유창순, 강순필 등에게 교부하여 이들이 친일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한 거사를 도왔다.

이 일로 동료들과 함께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18년 10월 1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치안 방해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1919년 9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화약류취체령 위반 혐의로 태형 90도에 처해졌다. 이후 상주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79년 6월 3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손기찬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7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2017년 3월, 손기찬의 외증손녀인 윤지인 생도가 육군3사관학교에서 최초로 배출된 여군 장교 17명과 함께 졸업했다. #


[1] 24세손 기(基)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