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족보명 | 송권익(宋權翼) |
이명 | 송경(宋炅)·송백화(宋白火) |
본관 | 야성 송씨[1]# |
출생 | 1912년 1월 2일[2] |
경상북도 대구부 대구면 남산동 (現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 |
사망 | 1971년 2월 24일 (59세) |
경상북도 대구시 (現 대구광역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319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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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송명근은 1912년 1월 2일 경상북도 대구부 대구면 남산동(현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서 아버지 송인광(宋寅光)과 어머니 동래 정씨 정성태(鄭聖泰)의 딸 사이의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대구부 시장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으로 이주했다.그는 대구 사립 교남학교(嶠南學校)에 재학 중이던 1930년 아나키즘 사상을 수용하고 이상길(李相吉)·차태원(車泰元) 등과 함께 비밀결사 아나키즘연구그룹을 조직한 뒤 1931년 10월 학생운동을 주도하다 퇴학당했다. 이후 1931년 12월 대구 시내에 있는 일본제국 육군 병영에 반전(反戰) 격문이 살포되자, 그는 이에 호응하여 중국 동삼성으로 출병하는 일본 군용열차에 '타도 군국주의', '제국주의 침략전쟁 반대' 등의 격문을 지게꾼을 시켜 살포하는 등 활동하다가 또다시 체포되었다.
그 후 1932년 3월 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1932년 4월 1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공소 이유 없음으로 공소가 기각, 징역 8개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대구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71년 2월 2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송명근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4년 11월 18일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