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15:41:47

스티브 하이웨이

아일랜드의 축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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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 이름 스티브 하이웨이
Steve Heighway
출생 1947년 11월 25일 ([age(1947-11-25)]세)
아일랜드 더블린
국적
[[아일랜드|]][[틀:국기|]][[틀:국기|]]
직업 축구 선수 (윙어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 선수 리버풀 FC (1970~1981)
미네소타 킥스 (1981)
필라델피아 피버 (1981~1982)
감독 리버풀 FC 아카데미 (1989~2007)
리버풀 FC 아카데미 (2015~2022)
국가대표 35경기 (아일랜드 / 1970~1981)

1. 개요2. 선수 경력
2.1. 붉은 제국의 고속도로2.2. 국가대표 경력
3. 지도자 경력
3.1. 리버풀 유스 시스템의 핵심3.2. 베니테즈와의 불화로 물러나다3.3. 리버풀로 복귀하다
4. 대회 기록
4.1. 선수 시절4.2. 지도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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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붉은 제국의 고속도로
선수로도 코치로도 리버풀을 위해 헌신한 남자

스티브 하이웨이는 아일랜드 국적의 前 축구선수이다. 그는 선수 시절 붉은 제국의 일원으로서 엄청난 스피드와 탁월한 공격전개, 훌륭한 크로스 실력을 기반으로 하여 측면에서 탁월한 경기력을 뽐내 제국의 위용을 영국은 물론이고 유럽 대륙에 드러내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또한 선수 생활을 정리한 후 리버풀의 유스 아카데미 감독으로서 리버풀이 장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고 많은 어린 선수들을 길려내 리버풀의 새로운 스타로 발돋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2007년 베니테즈와의 권력 다툼에서 패해 리버풀을 떠나야 했고 이후 야인으로서 삶을 보내다가 2014년 리버풀로 복귀해 2022년까지 리버풀 유스팀 감독을 맡고 있다.

2. 선수 경력

스티브 하이웨이 스페셜

2.1. 붉은 제국의 고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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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웨이는 1947년 11월 25일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는 어린 시절 더블린에서 학교를 다니지 않고 셰필드에 위치한 Ecclesall Junior School에 입학해 교육을 이수했다. 이후 그는 잉글랜드 스토크포트의 모슬리 할 그래머 스쿨에 입학해 중고교 생활을 보냈다. 그는 이 학교의 축구 팀에 입단해 1966년 논 리그에 속한 워릭 대학 축구 팀과 맞붙어 2:1 승리에 기여했다.

그후 하이웨이는 1970년에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Skelmersdale United 에 입단해 본격적인 축구 선수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마침 리버풀의 전설적인 감독 빌 샹클리는 리버풀을 리빌딩하기 위해 잉글랜드 전역의 어린 선수들을 알아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리버풀 스카우터진이 그를 발견했다. 결국 그는 1970년 5월에 리버풀에 입단했다. 하이웨이는 리버풀 유스팀에서 자신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고 'Big Bamber'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이 시기 그와 함께 리버풀에 입단한 대학 동기 브라이언 할은 'Little Bamber'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하이웨이는 1970년 9월 22일 리그 컵 2라운드 맨스필드 타운과의 경기에서 프로 선수로서 데뷔전을 치렀다. 이후 1970년 10월 21일, 하이웨이는 번리를 상대로 데뷔골을 기록하며 팀의 2:0 승리에 기여했다. 이후 하이웨이는 빠른 발과 훌륭한 돌파 능력을 인정받고 얼마 안가 팀의 레프트 윙어로서 주전 자리를 꿰찼다. 특히 1970년 11월에 리버풀의 최대 라이벌 중 하나인 에버튼을 상대로 2:0으로 지고 있던 상황에서 골을 기록해 짜릿한 3:2 역전승에 기여한 것은 그의 입지를 확고히 하는 데 보탬이 되었다. 이후 하이웨이는 FA컵 준결승전에서도 에버튼을 격파하는데 기여해 팀을 FA컵 결승전으로 인도했다.

1971년 5월 8일, 리버풀과 아스날과의 FA컵 결승전에 출전한 하이웨이는 좋은 경기력을 보였지만 승부는 정규시간까지 갈리지 않아 연장전까지 진행되었다. 하지만 추가 시간 까지 0:0인 상황에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승부는 승부차기에서 결정되는 듯했다. 이때 하이웨이는 연장 전반전 2분에 아스날 선수들을 가볍게 따돌리고 페널티 에어리어로 침투해 들어갔다. 이때 아스날측 골키퍼 밥 윌슨은 직접 슈팅하기엔 각도가 좁고 거리도 꽤나 멀기 때문에 크로스를 올릴 게 분명하다고 여기고 하이웨이가 올릴 공을 낚아챌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이웨이는 돌연 기습적인 슈팅을 때렸고 공은 골대 안으로 절묘하게 들어갔다!

하이웨이의 이 같은 환상적인 골로 기세가 등등해진 리버풀은 이대로 FA컵 우승을 달성하는 듯 했다. 그러나 아스날은 조지 그레이엄의 동점골로 승부를 원점으로 되돌렸고 연장전 후반 찰리 조지의 강력한 슈팅이 골문을 가르면서 아스날이 역전에 성공했다. 리버풀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맹공을 퍼부었지만 아스날은 끝까지 우위를 지켜냈고 결국 아스날이 FA컵 우승을 달성했다. 이 경기는 FA컵 역사상 최고의 명경기 중 하나로 여전히 화자되고 있다.

비록 FA컵 우승에 실패하긴 했지만, 하이웨이의 활약상은 리버풀 팬들에게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이후 그는 리버풀에서 11년간 활동하며 많은 업적을 쌓았다. 1973년엔 첫번째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뒤이어 유로파 컵도 우승해 더블을 달성했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FA컵 결승에 진출해 뉴캐슬과의 결승전에서 16분에 골을 기록하며 팀의 3:0 완승을 이끌어냈다. 이로서 하이웨이는 3년 전의 아픔을 씻어내고 FA컵 우승을 달성했다. 이후 하이웨이는 붉은 제국의 당당한 일원으로서 리그에서 4번, 리그 컵 1번, 유로피언 컵 2번, 유로파 컵 2번, 유로파 슈퍼컵 1번을 우승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러다가 1981년 34세에 접어든 하이웨이는 주전에서 밀리자 리버풀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리버풀에서 444경기를 출장해 76골을 기록했다. 이후 하이웨이는 미국에서 1년간 지내며 말년을 보내다가 1982년 선수 생활을 정리하고 코치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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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웨이는 1970년 리버풀의 일원이 된 이래 1981년 리버풀을 떠날 때까지 줄곧 아일랜드 국가대표팀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다. 그는 1970년 9월 23일 폴란드와의 친선경기에서 국가대표로서 데뷔전을 치렀다. 그는 국가대표로서 34경기를 치렀지만 단 한골도 기록하지 못했고 아일랜드가 워낙 축구 약체팀이었던 지라 국가대표로선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다만 1978 월드컵 지역 예선전에서 불가리아를 상대로 골을 기록했으나 무효 처리가 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3. 지도자 경력

3.1. 리버풀 유스 시스템의 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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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제국의 슈퍼스타들의 고속도로

하이웨이는 선수 생활을 정리한 뒤 미국에서 코치 연수를 받으면서 새로운 인생을 살 준비를 했다. 그러다가 1989년 리버풀의 요청을 받아들여 유스 아카데미 감독으로 부임한 그는 그때부터 리버풀을 위해 수많은 슈퍼스타들을 양성해냈다. 대표적인 선수로는 스티브 맥마나만, 로비 파울러, 스티븐 제라드, 제이미 캐러거, 도미니크 마테오, 데이비드 톰슨, 그리고 마이클 오언을 들 수 있다. 또한 그는 1996년, 2006년, 2007년에 FA 유스 컵 우승을 달성하는 등 리버풀 유스팀을 리그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절대적으로 공헌했다.

3.2. 베니테즈와의 불화로 물러나다

그런데 2007년 5월, 하이웨이는 돌연 당시 리버풀 감독이었던 라파엘 베니테스를 비판했다. 그는 베니테스가 자신을 무시하고 FA 컵에서 우승하는 데 크게 기여한 선수들을 장악하려 한 시도들에 대해 "미친 짓"이라고 비판했다. 사실 하이웨이는 베니테스 이전 감독인 제라르 울리에와도 갈등을 빛은 바 있었다. 울리에는 하이웨이가 잉글랜드의 전통적인 방식대로 어린 선수들을 다루는 것에 불만을 표했다. 하지만 리버풀 이사회는 하이웨이를 지지해줬고 하이웨이는 이를 토대로 유스팀에서의 권력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베니테스와 정면 충돌한 것은 유스팀 선수들을 다루는 방식에 있었다. 베니테스는 유스 선수들이 아카데미를 떠나 리버풀 리저브팀에 들어와야 한다고 봤다. 그러나 하이웨이는 리저브팀은 시간과 재능을 낭비하는 것일 뿐이며 그가 키운 어린 선수들은 자신과 함께 있거나 1군으로 바로 올라와서 활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축구계가 "낡아빠진 리저브 축구제도"로 인해 어린 선수들이 입는 피해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해봐야 한다며 리저브 팀이 필요없음을 역설했다.

또한 베니테스는 어린 선수들에게 기회를 많이 주기 위해 경쟁력이 있는 리그, 특히 잉글랜드 챔피언십으로 임대를 보내 기회를 줘야 한다고 봤다. 그러나 하이웨이는 유스팀에서 대단한 재능을 선보인 선수들은 임대를 보내지 말고 1군으로 올려보내 기회를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제 입장은 매우 단순합니다. 감독과 제가 가치관이 다르다면 그가 아니라 제가 나가야 합니다. 확실히 우리 둘은 의견이 다릅니다."

하지만 당시는 베니테즈가 이스탄불의 기적을 일궈내며 리버풀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기에 결국 하이웨이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후 베니테스는 유스팀에 막대한 투자를 하며 어린 선수들을 길려내려 노력했지만 루카스 레이바만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을 뿐 그 외 많은 유망주들은 결국 포텐을 터트리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다. 하이웨이가 계속 남아 있었다면 이 중 적어도 몇몇은 성공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그와 베니테스가 불화를 빛은 것은 리버풀에게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3.3. 리버풀로 복귀하다

2014년, 하이웨이는 은퇴를 번복하고 리버풀 U-19 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4. 대회 기록

4.1. 선수 시절

4.2. 지도자 시절

  • FA 유스컵: 1996, 2006,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