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22:04

습진(삼국지)

習珍
? ~ 221년?/2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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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로 《양양기》에 의하면 형주 양양군 사람이다. 습굉(習宏)의 형이고, 습온의 아버지며, 습우의 할아버지다. 동시대에 활약한 습정과의 관계는 불명이나 같은 습씨 가문 사람에 고향도 같으니 친족이었을 것이다.

2. 생애

형주의 대성(大姓)인 습(習)씨 일족으로 유비의 형주 통치에 기여했으며, 유비의 입촉 후에는 관우와 함께 형주를 지켰다. 영릉북부도위가 되어 비장군을 지냈는데, 손권이 형주를 차지할 때 영릉의 모든 현이 오나라를 따르는 와중에 홀로 유일하게 저항을 하다가 무너진 백성을 몰아 승세를 탄 적을 싸우기 어렵고, 갑옷은 정비되어 있지 않으며, 병사는 정예하지 않으니 불리하다. 잠시 절개를 굽혔다가, 후에 한실에 보답하여 큰 공을 세우자는 동생 습굉의 설득으로 손권에게 항복한다. 사실상 거짓 투항이었으며, 은밀히 번주(樊伷) 등과 약속을 정하여 거병하였는데, 손권에게 격파당하였다.[1] 그러나 습진은 일곱현을 들어, 스스로 소릉태수(邵陵太守)라 자칭하며, 촉을 섬기며 이(夷)의 경계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유비가 참패한 후에도 영릉계양 각 군에서는 여전히 서로 두려워하고 동요되어 있었으며, 곳곳마다 무력을 기대고 있었다. 유비가 동쪽으로 내려오고 무릉만이가 준동할 때 손권의 명으로 교주의 1만 군사를 이끌고 익양에 있던 보즐이 유비가 패퇴한 후 이 지역을 두루 돌면서 토벌하여 모두 평정되었다.

손권은 반준을 보내 습진을 격파했다. 습진은 거기서도 굴하지 않고 수백의 군사를 이끌고 산 속으로 들어가 저항했는데 반준은 수차례 편지를 써서 항복하도록 회유하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반준은 단지 좌우의 사람만 거느리고 스스로 산 아래로 가서, 대화를 나누길 청하였다. 습진은 "나는 반드시 한나라의 귀신이 될 것이고 오나라의 신하는 되지 않을 것이니 핍박하지 마시오."라는 말을 하고 반준의 부절을 화살로 맞혔으며, 오군과 싸우다가 수개월이 지나서 화살과 식량마저 다 떨어지자 "한(漢)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으니, 죽음으로써 보답하지 않으면 아니되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오?"라고 말한 후 칼을 들어 자살했다. 유비는 습진의 전사를 듣고 발상하며 그를 소릉태수로 추증했다.

관우가 오나라의 습격으로 형주를 빼앗겼을 때, 지역 호족 대부분이 오에 항복하거나, 번우처럼 도주를 택했지만, 유독 이 습진만큼은 저항하는 모습을 보인다. 본인은 유명인물이 아니라서 온갖 인물이 알려진 삼국지에서도 인지도가 낮은 편이지만, 가문의 후손 중에선 유명인들이 꾸준히 배출되었다. 습진의 선조인 습울의 후손이자 습진과 같은 친족으로 추정되는 습정의 후손으로 동진시대 역사가, 정치가인 습착치가 있고[2] 습착치의 먼 후손 가운데 하나가 바로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시진핑(습근평)이다.#

3. 창작물에서

3.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파일:습진.jpg
삼국지 14 일러스트

삼국지 14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일러스트는 100만인의 삼국지의 제갈첨을 재활용했으며 능력치는 통솔 64, 무력 68, 지력 51, 정치 42, 매력 58이다. 개성은 일심, 주의는 왕도, 정책은 방원강화 Lv 2, 진형은 방원, 전법은 격려, 경파, 구축, 친애무장은 유비, 혐오무장은 없다. 별개로 습진을 주부 관직에 임명하면 기분이 요상해진다... 또한 후손이 시진핑이라 유저들에게 자주 처형당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3.2. 진삼국무쌍 시리즈

클론 무장으로 등장하고 그의 역할은 닫은 성 안에서 촉의 원군이 오면 그에 호응해서 문을 여는 역할이다.

3.3. 토탈 워: 삼국

그저 그런 클론 무장으로 등장한다.

3.4. 삼국지 마행처우역거

주인공에게 조루(趙累)와 더불어 "한 것이 없어도 잘 해주고 싶은 두 사람"이라 불린다. 본인들의 능력과 원래 역사에서 검증된 충성심 덕분에, 고관이 된 주인공과 꾸준히 인연 닿으며 역할을 해나가는 인물이다.


[1] 《양양기》에는 번주가 군사를 일으킨 것이 관우가 죽은 후로 되어있으나 《자치통감》에는 관우가 죽기 전에 일로 반준이 항복하자마자 취한 행동으로 되어있다.[2] 《한진춘추》를 저술하여 그 유명한 촉한정통론의 시초가 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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