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기에 고구려 요동성에서 태어났다. 승랑의 생몰년도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그 주위의 여러 저작들을 통하여 유추해볼 수 있을 뿐이다. 승랑의 탄생년도는 그가 태어난 곳에서 그의 스승인 법도(法度 437~500)의 탄생년도와 그가 요동을 떠난 시기(476년 전후)를 통하여 유추한 값이고, 사망연도 역시 각종 기록으로 유추해서 522~540년 (대략 530년대) 사이 정도로 추정될 뿐이다. [1]
또한 그에 행적에 대한 자료도 부족하여 그의 정확한 행적을 파악하는 것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 하지만, ‘삼론조사전집’등의 저서로 비추어서 그의 행적을 추측하여 한번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승랑이 성장할 당시, 고구려에는 불교가 막 퍼지기 시작했다. 372년(소수림왕 2) 남북조시대 직전인 (이 시대는 정확히는 5호16국시대 중후반기다.) 북중국의 전진(前秦, 351~394)에서 온 순도 스님이 불상과 불교 경전을 전해 주었고, 순도 스님과 374년 고구려에 온 아도 스님을 위해 375년 소수림왕이 초문사와 이불란사를 지어주어 불교를 신앙하도록 했다. 고구려 사람들이 불교를 알게 된 것은 공식적인 불교 전래 이전인 4세기 초부터라고 할 수 있지만, 5세기 초에도 여전히 불교는 널리 퍼지지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불교 교리에 대한 연구나 이해도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따라서 비록 그가 태어난 요동성 일대가 고구려의 다른 지역에 비해 불교가 발전된 지역이었고, 그 또한 불교에 대한 이해능력이 뛰어나서 많은 불교 경전들을 섭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구려에서 배운 불경에 만족하지 못했다. 마침내 승랑은 더 넓고 깊게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결심했다고 볼 수 있다.
승랑은 마침내 30세 무렵인 대략 476년 즈음에 고향을 떠나 북중국으로 건너가 여러 도시를 다니며 불교를 공부했다. 특히 장안(長安)에서 불교의 중요 이론인 반야사상과 화엄사상, 그리고 삼론의 이치를 담은 중도사상을 배웠고, 479년경 둔황(敦煌)에 가서 담경(曇慶) 법사에게 삼론(三論)[2]을 배운 후 교화 활동을 시작했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많다. 그 어느 문헌에도 승랑의 스승에 대해서 구체적인 언급이 없는 것이다. 다만, 삼론조사전집을 둘러볼 때 승랑의 스승이 특정인이 아니고, ‘황룡의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구마라습 문하 팔숙(八宿)의 제자에게 배운 제자에게 배움을 청하여 무의무소득의 대승법문을 터득한 뒤 강을 건너 양주에 왔다.’라고 기록한 점을 비추어 볼 때,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많은 스승에게서 삼론을 배운 것으로 추정된다. 담경은 승랑이 가르침을 받던 시기와 생존연대가 비슷하고 그에게 영향을 준 바도 높기에 그의 스승 중 한명으로 추측된다. [3]
당시 북중국의 서쪽 끝인 둔황은 장차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될 석굴사원이 한참 만들어지는 등 불교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는 곳이었다. 둔황에서 삼론학을 배운 승랑은 삼론종을 중심으로 자신의 공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484년 이전에 승랑은 둔황을 떠나 불교가 번성하던 남북조 중 남조의 남제의 수도 건강(建康, 난징)으로 간 것으로 추측되고 그곳에서부터 차츰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공부한 삼론학을 가르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후에 종산(鍾山)에 있는 초당사(草堂寺)에서 주옹(周顒)이란 선비가 승랑을 스승으로 모시고자 간절히 청을 했다. 승랑은 그에게 삼론학을 가르쳐 주었고, 주옹은 승랑에게 배운 바를 삼종론(三宗論)이라는 책으로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다. 주옹의 노력 덕분에 승랑의 업적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승랑의 마지막 행적은 섭산의 서하사가 중창되어 그곳으로 거처를 옮기고 주지를 맡으며 오래 머무르게 되어 설교를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서하사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추측된다.
[1] 김성철 『승랑 – 그 생애와 사상의 분석적 탐구』 2011 지식산업사 pp67~69, pp159~163[2]중관학파의 대표 경전들인 《중론》, 《십이문론》, 《백론》이 처음 중국어로 번역되었을 때의 명칭이다.[3] 김성철 『승랑 – 그 생애와 사상의 분석적 탐구』 2011 지식산업사 pp9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