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학과 함께 대승 불교의 중요한 학파 중의 하나로 용수(나가르주나)가 인도에서 세웠으며, 인도에서 약 800년간 세력을 떨친 후 11세기가 지나서는 인도에서 사라졌다. 이 학파는 180년 이래 중국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론적 배경이 된 불경은 반야바라밀다경이며, 용수(나가르주나) 자신이 지은 중관론(중론)[1]도 전해지고 있다.
중관(中觀)이란 '치우치고 그릇된 미망(迷妄)'을 여읜 법의 진실한 이치, 곧 절대이성(絶對理性)을 관(觀)[2]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보통 언어에 의한 개념화를 통해 세계를 구별하기 때문에 모든 존재가 서로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면 따라서 특정 존재에 대해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거기에 집착하게 된다. 그러나 용수(나가르주나)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타자와 관계를 맺으면서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존재도 외따로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이 공(空) 사상이다.[3] 말과 글은 대상에 대한 '지시어'일 뿐인데도 우리는 이 말과 글에 의존하여 지식을 얻으며, 그렇게 해서 얻은 지식의 바탕 위에서 행동한다. 중관학파에서는 대상에 대한 지시어로서의 '언어'와 그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 자체에 대한 관계를 바로 정립하려고 하였다.
중관학파는 '공'의 이론을 바탕으로 '자아'나 '열반'과 같은 개념을 새롭게 해석했다. 중관학파에서 말하는 열반은 존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관찰한 결과 얻을 수 있는 정신적 평화이며, 그러므로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존재'의 참모습을 올바로 이해하면 바로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다. 각 종파에서 모두 중관의 관점을 가지고 불교의 도(道)를 직관하는 것을 극칙(極則) 즉 궁극적인 법칙으로 삼는데, 삼론종에서는 '제법은 나지도 멸하지도 않고 오고 감도 없다'고 관하는 것을, 천태종에서는 3천의 제법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절대(絶待)[4]라고 관하는 것을 중관이라 본다. "불법의 진리나 이치에 대해 제3, 제4자가 언어로 정의해 놓은 필터에 의지해서는 그 자체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으니, 언어라는 '필터'에 의지하지 말고 나 자신의 관점에서 직관하라"는 것이라서 동아시아의 선사상이 형성되는데 중요한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
여담으로 초기 중국 중관학파의 유명한 학자들 중 상당수는 한반도로부터 건너간 사람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6세기경 중국에서 활동한 고구려의 승려 승랑은 중국에서 이 학파의 제4대 조사가 되었다. 그리고 625년에는 혜관 등 한국 승려에 의해 일본에도 전해졌다.
그러나 중관학파는 모든 것은 '공'하여 선과 악에 대한 구분도 할 필요가 없다는[5] 해석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윤리적 문제점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존재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강조한 나머지 구체적 현실에 대한 분석이 부족했다. 중관학파가 가진 이 약점에 착안하여 나타난 학파가 유식학파이다.
인도 불교의 중관학파는 공 사상에 주석을 다는 과정에서 설명 방식에 차이가 발생해 자립논증(Svatantrika) 중관학파[6]와 귀류논증(Prasangika) 중관학파[7]로 양분되었다. 티베트 불교는 귀류논증 중관학파를 근간으로 체계화되었으며, 티베트 불교 내에서 귀류논증 중관학파는 바라밀승(현교)의 최상위 견해라고 취급된다.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견해는 티베트 불교/중관학 항목 참조.
[1] 산스크리트어로는 마다야마카 샤스트라(Madhyamaka-Śāstra)라고 한다. 『중론』이라 불림. 27품 446게(偈)로 되었고, 구마라집은 여기에 범지(梵志) 청목(靑目)의 해석을 붙였다. 『십이문론(十二門論)』ㆍ『백론(百論)』과 함께 삼론종(三論宗)의 소의론(所依論)이 되고 있다. 그 내용은 가장 철저한 중도(中道)를 주장하여 공(空)과 가(假)를 파하고, 다시 '중도'에 집착하는 견해도 파하여, 팔불중도(八不中道) 곧 무소득(無所得)의 중도를 말한다. 중국에는 쿠마라지바가 한역하면서 처음으로 전해졌고, 길장이 10권의 주석을 썼다. 이밖에 임법사, 석법사(碩法師), 원강(元康) 등이 주석을 붙였다.[2] 여기서 관이라는 단어는 '본다', '이해한다', '직관한다', '인지한다'라는 의미로 쓰인다.[3] 공 사상은 존재하는 실존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된 견해를 바로 잡아 존재의 참모습을 바르게 보기 위한 것이다. 모든 존재는 늘 변화하며 불변의 실체가 없기 때문에 '공'하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삶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데 세계에 대한 인식주체인 '나'와 객체로서의 인식대상인 '세계'의 본래 모습은 '공'한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4] 서로 대립하는 대상이 아니다.[5] 어떤 사물에 대해서 느끼는 '선'이나 '악'이라는 분별이 내가 얻은 지식이나 주위로부터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면 선악이라는 분별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자칫 아노미에 빠질 소지가 있지 않겠는가.[6] 대표적인 논사로 청변(Bhavaviveka), 적호(Santaraksita), 연화계(Kamalasila) 등이 있다.[7] 대표적인 논사로 불호(Buddhapalita), 월칭(Candrakirti), 적천(Santideva)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