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3 04:17:51

시라토리 요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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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초기 생애3. 탈옥
3.1. 첫 번째 탈옥3.2. 두 번째 탈옥3.3. 세 번째 탈옥3.4. 네 번째 탈옥
4. 그 후5. 기타6. 창작물에서

1. 개요

白鳥由栄 (しらとり よしえ)

1907년 7월 31일 ~ 1979년 2월 24일

시라토리 요시에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죄수로, 네 차례에 걸친 연쇄 탈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별명은 '쇼와의 탈옥왕(昭和の脱獄王)'. 그는 전설적인 탈옥수였으나 한편으로는 범죄자와 수형자의 인권을 경시했던 당시 일본 사법 시스템의 희생자이기도 했다.

2. 초기 생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가게일을 하다 러시아 고기잡이 선원으로 근무했다. 이때 모은 자금으로 결혼도 하고 사업도 했으나 대공황의 여파로 망하고 도박에 빠졌다고 한다.

3. 탈옥

3.1. 첫 번째 탈옥

1933년에 그는 도박 빚 때문에 동료 2명과 함께 아오모리의 가정집에서 도둑질을 했는데, 도둑질 중에 집주인에게 들켜 다투던 중 집주인이 살해당한다. 당장 체포되지는 않고 도주하였으나, 1935년에 잡힌다. 먼저 잡힌 동료가 시라토리가 집주인을 살해했다고 자백하였기에 그에게는 강도살인죄 혐의가 씌워져 있었다.

그는 아오모리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당시 수감자에 대한 인권의식이 부족했던 일본에서 형무소의 간수들은 수감자를 학대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죽어라" "넌 백조(白鳥)[1]가 아니라 파리잖냐" 따위 식의 언어폭력을 당했다고 한다. 그는 수감자에 대한 열악한 처우에 항의하기도 했으나, 오히려 괘씸죄로 징벌방에 수용되는 징계에 처해졌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이것이 그가 탈옥을 결심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1936년 아오모리 형무소에 수감된 그는 목욕 시간에 죄수들에게 지급되는 목욕탕 바가지[2]에 둘러져 있는 철사를 빼내서 즉석 락픽을 만들었고, 간수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감옥의 잠금장치를 해제하는데 성공한다. 밤중에 운 좋게 감옥을 탈출한 그는 해당 형무소 인근 지역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시라토리는 탈옥 전에 미리 마루바닥을 뜯어 이불 안에 사람 모양으로 쌓아두었고 간수들은 이불이 불룩한 것을 보고 그가 자고 있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형무소 측에서는 다음날 아침이 밝고 나서야 탈옥 사실을 인지했다.

3.2. 두 번째 탈옥

탈옥에 성공한지 3일 뒤, 병원에서 물건을 훔치려다 체포되었다. 그에게는 강도살인죄에 도주죄가 추가되었고, 지방재판소에서 행해졌던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그는 미야기 형무소를 거쳐 고스게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1942년에 그는 아키타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아키타 형무소의 간수들은 시라토리의 탈옥 전적을 알고 있었고, 다시는 탈출하지 못하도록 아주 열악한 곳에 가두었다. 그가 갇혀 있던 독방은 굉장히 좁고 천장이 높았으며, 난방도 안 되어 겨울엔 매우 추웠다. 물론 형무소에서는 두꺼운 옷같은 건 주지 않아서 혹독한 추위에 시달렸다. 문에 달린 쇠창살과 낮에만 햇빛이 들어오는 천장의 쇠창살 사이의 공간만이 유일한 환기구였다. 간수들은 시라토리가 늘 수갑을 차고 있도록 했으며, 수갑을 푸는 것은 목욕 시간에만 허락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7월 15일 한밤중에 간수가 시라토리의 방을 들여 보았으나 시라토리는 뜬금없게도 이미 사라지고 없었으며, 그의 방에는 그가 차고 있던 수갑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가 두 번째 탈옥을 성공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몰래 꽁쳐둔 와이어로 락픽을 만들어 수갑을 푼다.
  2. 좁은 독방의 구조를 이용해 양팔과 다리로 벽을 짚고 위로 올라가 쇠창살의 창틀을 흔든다.
  3. 다시 내려와서 수갑을 찬 뒤 아무 일도 없었던 척 한다.
둘째의 경우는 힘과 기술, 담력이 모두 요구되는 일이다. 자칫하면 천장 부근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거나 죽을 수도 있고, 간수들에게 들통나기도 쉽기 때문이다.

시라토리는 이 짓을 한두 번도 아니고 몇 날에 걸쳐 밤중에 간수들이 자리를 비울 때마다 반복하며 끊임없이 창틀을 흔들어 점점 약화시켰고, 인내심 끝에 창틀이 떨어지며 탈출에 성공했다. 마침 탈옥하는 날 밤에 폭우가 쏟아져 간수들이 천장의 발자국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3.3. 세 번째 탈옥

2차 탈옥 후 3개월 뒤, 시라토리는 고스게 형무소에 있었던 시절에 자신을 담당했던 간수 중 '코바야시'(小林良蔵)라는 이름의 간수를 찾아간다. 그는 유일하게 시라토리를 학대하지 않고 챙겨줬던 간수였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 그에게 찾아갔던 것.

코바야시는 그를 들여보내 식사를 대접했고, 시라토리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시라토리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은 별로 개의치 않았으나 간수들의 고문과 학대로 지쳐 탈옥을 결심한 것이고, 그는 당시 일본 형무소의 야만적이고 부패한 시스템을 만천하에 밝혀내고 민사소송을 통해 자신의 법적 자유를 얻는 것이 목표라고 코바야시에게 털어 놓았으나, 코바야시는 그가 화장실에 간 사이 그를 경찰에 신고했으며, 시라토리는 결국 다시 체포되었다.

결국 경찰에게 다시 체포된 시라토리는 일본 홋카이도 최북단에 위치한, 악명 높은 아바시리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최북단에 있는 감옥인 만큼 굉장히 추운 날씨를 자랑했고, 죄수들에게 난방도 절대 허가해주지 않았다. 간수들의 학대도 또 다시 이어졌고, 24시간 수갑 착용도 여전했다. 시라토리는 최소한 수갑만은 채우지 말아달라고 간수들에게 애원했고, 간수들이 무시하고 수갑을 채우자 간수들의 눈 앞에서 수갑을 맨손으로 부수기까지 했다. 그러자 간수들은 시라토리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대신, 열쇠나 락픽으로는 아예 열 수 없고 철물 기술자가 중장비를 동원해야 겨우 열 수 있는, 총합 20kg에 달하는 특수 수갑과 족쇄를 각각 시라토리의 팔과 다리에 채웠다. 이전 감옥에서와 마찬가지로 목욕 시간에만 이를 풀어주는 것이 허가되었다.

겨울을 지나 1944년 봄까지 겨우겨우 살아남은 시라토리는 마침내 탈옥을 결심하게 되는데, 이번에도 기상천외한 탈옥 방식을 선보인다. 그가 갇힌 아바시리 형무소의 독방 구조는 천장이 높지도 않고, 사람 어깨 넓이보다 작은 크기의 쇠창살이 박힌 창틀만이 있었다. 그마저도 팔다리에 20kg 수갑이 채워져 제대로 움직이기는커녕 밥 한 끼도 고개를 처박고 개처럼 먹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힘이 부족하면 인내심으로 승부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시라토리는, 매 끼니마다 제공되는 미소시루를 조금씩 남겨 감옥문의 창틀에 뿌렸다. 이 짓을 몇 달 동안 꾸준히 한 결과 미소시루의 염분이 창틀을 부식시키다가 창틀의 나사가 빠졌고, 다음 해 봄에는 똑같은 방식으로 수갑과 족쇄까지 풀어버린 것이다.

쇠창틀, 수갑, 족쇄까지 모두 제거한 그에게 남은 마지막 관문은 그의 어깨 너비보다 작은 정문의 구멍이었다. 무슨 수를 써도 어깨가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결국 스스로 어깨를 탈골하여 구멍을 빠져나간다. 그리고 마침 복도 천장의 창문 중 하나가 깨져 있었고, 그곳으로 탈출하는 데에 성공한다.

경찰은 형무소 인근 지역을 샅샅이 수색했으나 도시에서는 그를 찾을 수 없었고, 시외로 도주했다면 홋카이도의 살인적인 추위와 곰 등의 맹수들이 들끓는 상황 속에서 살아남았을 리 없다는[3] 결론을 내리고 수색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3.4. 네 번째 탈옥

지옥의 아바시리 형무소에서 탈출한 시라토리는 홋카이도의 버려진 광산에서 비밀 거처를 마련해 살고 있었다. 나무열매와 토끼, 너구리 등의 식량으로 2년간 숨어살고 있던 그는 근처 마을로 내려갔고, 이때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미군과 신문기사를 통해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알게 된다.

미군정이 들어섬에 따라 자신을 추적하는 경찰들이 없다는 생각에 그는 자신의 가족이 있는 고향 땅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약 15일간의 걸음 끝에 삿포로에 도착한 그는 배가 고픈 나머지 한 농부의 밭에서 몰래 서리를 하다가 농부에게 발각되었고, 가뜩이나 기승을 부리던 서리 도둑에 혈안이 되어있던 농부가 농기구를 들고 그를 공격하자 의도치 않게 농부를 살해해 버린다.

결국 그는 1947년에 또다시 살해 혐의로 체포되었다. 삿포로 지방재판소에서 이뤄졌던 형사재판에서 그는 정당방위를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고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는 바로 항소했지만, 시라토리는 삿포로 형무소에 수감되고 말았다.

이번 형무소에서는 그야말로 간수들이 작정하고 있었다. 6명의 무장간수들이 교대로 그를 24시간 감시하고, 쇠창틀 너비도 아바시리의 것보다 더 작게 설계가 되었으며[4] 무장간수들 또한 이러한 보안 수준에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시라토리 또한 매번 천장을 바라보며 탈옥 계획을 세워 보려 했으나 절망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라토리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고, 무장간수들이 이를 괘씸하게 여겨 강제로 이불을 들추었으나, 첫 번째 탈옥 때와 마찬가지로 그곳엔 마루바닥 더미들만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바닥을 왜 콘크리트로 안 만드는 거냐

그가 탈출한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땅굴.

창문이나 천장의 철창을 통해 탈출한 것은 간수들에게 익히 알려진 탈옥 경로였고, 이를 예상한 시라토리는 천장을 바라보며 천장으로 탈출 계획을 세우는 척하다가 몰래 꽁쳐둔 국그릇으로 땅굴을 파서 탈출한 것이다. 무장간수들은 시라토리가 씻으러 갈 때마다 방을 점검했으나, 워낙 감옥의 구조와 보안에 대해 큰 의심을 가지지 않았고 시라토리는 늘 천장을 보며 탈출할 궁리를 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기에 미처 바닥을 점검할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다.

4. 그 후

세월이 흘러 1948년, 시라토리 요시에는 40살의 중년이 되었고 4번의 탈옥과 끊임없는 도망자 인생으로 지쳐 있는 상황이었다. 여전히 삿포로에서 지명수배자 생활 중이었던 그는 잠시 앉아서 쉬던 와중 한 경찰관이 자신의 옆에 앉았으나 자신의 얼굴을 모르는 듯하여 별 개의치 않고 있었다.

경찰관은 그에게 말을 걸었고, 그는 침착하게 의심을 받지 않도록 상황을 해결하려 했으나, 갑자기 경찰관이 그에게 담배 한 대를 권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담배가 굉장히 귀한 물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선뜻 담배를 권하자, 그동안 간수들에게 받은 갖은 고문과 학대, 오랜 도망자 신세로 인해 마음이 무너져 있던 시라토리는 눈물을 흘렸다.

결국 긴 도망자 인생에 지칠대로 지쳐버린 시라토리는 그 자리에서 그 경찰관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자수했다.

삿포로 고등재판소에서 행해졌던 항소심에서, 재판부는 사건을 다시 조사하고는 그가 삿포로의 농장에서 농부를 살해한 것을 정당방위로 인정하고, 총 네 번에 걸친 탈옥에서 단 한 번도 형무소의 간수를 해치거나 살해한 적이 없으므로[5] 그의 살인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대신 상습적인 탈옥 혐의에 대해서는 유죄가 인정되어 탈옥 1회당 5년형으로 총 20년형을 선고받았다. 시라토리 입장에선 목숨을 건진 셈이었다.

시라토리는 도쿄의 형무소인 후추 형무소[6]로 이송해달라고 요청하였고, 이 역시 받아들여저 후추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후추 형무소에서도 탈옥 경력만 4번인 그를 어떻게 대우해야 할지에 대해 고심하였는데, 당시 형무소장이었던 스즈키(鈴木良蔵)는 그에게 일반 수감자와 같은 대우를 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형무소 생활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는 따뜻한 봄 시기에 도쿄로 이송되었고, 쌀쌀한 날이면 난방이 제공되었으며, 수감시에 수갑 같은 것도 채우지 않았다. 간수들 또한 그들의 통제에 잘 따라주기만 한다면 먼저 폭력을 쓰거나 모욕적인 언행을 내뱉지 않았다.

사형 위기를 벗어나고, 살해 혐의 또한 무죄 선고를 받았으며 인간적인 대우를 해주는 형무소 내에서 그는 더 이상 탈옥할 이유가 없어져 모범수로서 착실하게 복역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14년 뒤인 1961년, 시라토리는 가석방을 인정받아 출소했고 마침내 자유인이 되었다. 아오모리에 돌아간 그는 수소문 끝에 자신의 딸을 찾는 데에 성공했지만, 아내는 평생 그를 기다리다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출소 후 건설작업원으로 근무하던 시라토리는 1979년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는데 무연고 시신이 될 뻔했으나 어릴 적 지인이었던 여성이 인수해 매장했다.

그의 이야기는 뒤늦게 현대 일본에서 널리 알려졌고 대중들은 그가 일본의 사법체계에 영향을 준 안티히어로쯤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한다.

5. 기타

온 몸의 관절을 자유자재로 조절하고 탈구도 수시로 할 수 있는 특이한 체질이었다. 탈옥 방법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수갑을 맨손으로 부수거나 녹슬었다고는 하지만 창틀을 손으로 잡아뜯을 수 있을 정도로 괴력의 소유자였으며, 하루 120km 정도 뛸 수 있을 정도의 초인적인 지구력을 갖췄고, 붙잡히면 무조건 사형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탈옥을 시도할 정도로 근성과 담력 또한 대단했다. 게다가 간수들조차 수색을 포기할 만큼 살인적인 폭설을 자랑하는 홋카이도 최북단의 겨울을 몇 번이나 동굴에서 혼자 버틸 정도로 생존력도 끈질긴 인물이었다.

워낙 탈옥으로 명성을 떨친 인물이다 보니, 수감 당시 간수들이 "제발 내 당직이 아닐 때 탈옥해주길" 하면서 빌었다고 한다. 실제로 징계 처분을 받은 간수가 방송에 나와서 회고를 하기도 했다. 분명 교대 이후 탈옥을 했는데 신입이라는 이유로 자신이 뒤집어 써서 시말서 작성과 감봉을 당했다고 한다.

시라토리 요시에가 탈옥왕으로 유명해지고 그에 대한 대중의 시선이 보다 온정적으로 바뀌면서, 현재는 박물관이 된 구 아바시리 형무소 옥사에는 그가 탈옥하는 장면을 재현한 마네킹이 설치되어 있다.

4번이나 탈옥에 성공했지만 일본 최다 탈옥 기록을 가진 건 아니다. 그보다 한 시대 앞선 메이지의 탈옥왕 니시카와 토라키치(西川寅吉)는 무려 6번 탈옥에 성공했다. 대신 시라토리처럼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탈옥한 게 아니라 동료 재소자들의 도움을 받거나, 야외 작업 중 경계가 소홀한 틈에 도망치기, 복도에서 간수를 습격한 다음 탈출 등 탈옥 스킬(...)면에서 시라토리보다 떨어진다. 허나 근성과 체력은 시라토리 못지 않은데, 두 번째 탈옥 당시, 발에 5치(약 15cm) 길이의 쇠못이 박혔는데 이 상태로 약 10km를 달려 도주에 성공한 경력이 있다. 그래서 별명은 5치 못의 토라키치. 아바시리 감옥에서 탈출한 시라토리와 달리, 니시카와는 아바시리 감옥에서 형기를 마치고 만기 출소했다. 이후 극단을 만들어 활동하다가 1941년 사망하였다. 니시카와 토라키치의 마네킹도 아바시리 형무소 박물관 앞에 있다.

6. 창작물에서

골든 카무이의 등장인물 시라이시 요시타케는 시라토리 요시에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이다. 탈옥왕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으며, 몸의 관절을 자유자재로 탈골시키는 능력이 있다.


[1] '시라토리'라고 읽는다. 그의 이름을 이용한 말장난이다.[2] 일본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보이는 그 나무 바가지이다.[3] 비록 탈출 시기가 봄이기는 하지만 이 동네는 4월까지 폭설이 내린다.[4] 사람 머리도 들어갈 수 없는 수준의 작은 구멍이었다.[5] 자신을 그나마 동정적으로 대하던 간수들의 징계를 막기 위해 그들의 휴일에만 탈옥을 했다.[6] 일본에서 가장 엄격한 슈퍼맥스 형무소이다. 이런 곳인데도 이전 형무소들보다 훨씬 대우가 인격적이었다는 점은 그만큼 태평양 전쟁 이후 일본 사회와 문화가 많이 바뀌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