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거창 신씨[1] |
출생 | 1898년 2월 7일 |
경상남도 거창군 동부면 동동 (現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대동리 동동마을)[2] | |
사망 | 1959년 5월 13일 (향년 61세) |
경상남도 거창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797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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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98년 2월 7일 경상남도 거창군 동부면 동동(現 거창군 거창읍 대동리 동동마을)에서 아버지 신명재(愼名縡, 1865 ~ 1917. 1. 27)와 어머니 거창 유씨(居昌 劉氏, 1873 ~ ?. 8. 8)[3] 사이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거창면 하리(現 거창읍 중앙리 하동마을)로 이주하였다.1919년 8월 거창면에서 이덕생(李德生)·김태연(金泰淵) 등이 국권회복운동에 필요한 군자금과 의용병을 모집하여 중화민국 동삼성 소재 만주군정서에 송금 및 파견할 계획을 세우자 이에 호응하여 군자금 모금액 813원을 제공하였으며 『신한별보(新韓別報)』를 배부하던 중 이른 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1년 1월 8일 거창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검사국에 송치되어 1년 5개월여에 걸쳐 구류된 후에야 석방되었다.
그 후에도 항일활동을 계속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1935년 2월 10일 이른 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금고 8개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이후 1959년 5월 13일 거창군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199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1999년 11월 2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