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6-03-18 23:36:38

신렴


고려 밀직부사
연저수종공신 · 수복경성공신
신렴
辛廉
<colbgcolor=#fedc89><colcolor=#670000> 출생 미상
사망 미상
본관 영월 신씨(寧越 辛氏)[1]
관직 소부주부(小府注簿), 대호군(大護軍)
한양윤(漢陽尹), 밀직부사(密直副使)
서훈 연저수종(燕邸隨從) 3등 공신
수복경성(收復京城) 2등 공신
가족 아들: 신희(辛喜)
손자: 신이(辛頤)
증손: 신영손(辛永孫)
현손: 신중거(辛仲琚), 신계거(辛季琚)

1. 개요2. 생애
2.1. 두 차례의 녹훈2.2. '봉졸(烽卒)' 강등2.3. 양백연 사건 연루와 은퇴
3. 가족 관계4. 평가5. 여담


1. 개요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공신. 본관은 영월 신씨이다.

공민왕원나라 잠저 시절부터 보필하여 두 차례나 국가 공신(연저수종공신, 수복경성공신)에 녹훈된 충신이었으나, 고려 말기의 혼란스러운 외침(왜구)과 지배층의 정치적 숙청 작업에 휘말려 천역(賤役)인 봉수대 병졸로 강등되거나 귀향을 겪기도 한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냈다.

거듭된 풍파 속에서도 가문을 보존해 내어, 훗날 그의 직계 후손들(손자 신이, 증손 신영손, 현손 신중거·신계거)이 조선 건국 직후 중앙 정계의 핵심 훈구 가문으로 도약하는 데 결정적인 기틀을 마련했더.

2. 생애

2.1. 두 차례의 녹훈

공민왕이 세자 시절 원나라에 머물 때부터 그를 끝까지 보필한 최측근이었다. 공민왕이 즉위한 이듬해인 1352년(공민왕 1), 왕을 호종한 공로를 인정받아 연저수종공신(燕邸隨從功臣) 3등에 녹훈되었으며, 당시 관직은 소부주부(小府注簿)였다.[2]

이후 1363년(공민왕 12), 홍건적의 난으로 함락되었던 수도 개경을 탈환하는 데 기여하여 수복경성공신(收復京城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3] 이때 관직은 대호군(大護軍, 종3품)에 이르렀으며, 두 차례나 공신 명단에 이름을 올림으로써 가문의 위상을 드높였다.

2.2. '봉졸(烽卒)' 강등

승승장구하던 그는 1373년(공민왕 22), 한양의 수장인 한양윤(漢陽尹, 정3품)으로 재직할 당시 씻을 수 없는 실책을 남기게 된다. 당시 왜구의 배들이 한강의 동강(東江)과 서강(西江)으로 침입하여 양천 일대를 노략질하고 도성 인근까지 이르러 민가에 불을 지르고 백성을 살상하는 피해가 발생했다.

이에 크게 노한 공민왕은 강화 만호(江華萬戶) 하을지(河乙沚)와 함께 신렴에게 방어 실패의 엄중한 책임을 물었다. 결국 신렴은 몽둥이로 맞는 장형(杖刑)을 당한 뒤, 최전방 봉수대에서 불을 피우고 보초를 서는 최하층 군역인 봉졸(烽卒)로 강등되어 유배되는 굴욕을 겪었다.[4]

2.3. 양백연 사건 연루와 은퇴

유배 생활 이후, 우왕 대에 이르러 다시 정계로 복귀하여 밀직부사(密直副使, 종2품)의 고위직에 올랐다. 그러나 고려 말 권문세족들의 권력 투쟁에 휘말리게 된다.

우왕 치세 당시,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찬성사 양백연(楊伯淵)이 이인임, 임견미 등에 의해 역모 및 비리 혐의로 탄핵을 받아 숙청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신렴 역시 양백연의 친구이자 측근으로 지목되어 옥에 갇히는 위기를 맞았다. 다행히 당시 수사를 지휘하던 최영 등이 "이들은 역모에 직접 가담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며 사형은 면해주었으나, 결국 관직을 박탈당하고 고향으로 쫓겨나는 귀향(歸鄕) 처분을 받으며 은퇴하게 되었다.[5]

비록 말년에는 정치적 숙청을 피하지 못했으나, 목숨을 부지하고 가문을 지켜낸 덕분에 손자 신이(辛頤)를 비롯한 후손들이 훗날 조선의 개국과 함께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3. 가족 관계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 속에서 보존된 가계는 아들 세대부터 조선의 개국과 함께 재기하여, 태종~성종 대에 걸쳐 중앙 정계의 핵심 훈구(勳舊)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 손자: 신이(辛頤) - 13세. 태종 대에 경기 경력(京畿經歷)을 지내며 국왕의 두터운 신임과 의복(겹옷)을 하사받았으나, 세종 즉위년(1418) 국구 심온(沈溫)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당하는 시련을 겪었다.
  • 증손: 신영손(辛永孫) - 14세. 세종의 특지(特旨)로 파격적인 당상관 승진을 이루고, 세조 대에 충청도와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하며 국왕으로부터 군사 동원권의 상징인 밀부(密符)를 하사받은 핵심 관료였다.
  • 현손
    • 신중거(辛仲琚) - 15세. 신영손의 차남. 사헌부 지평 시절 정계의 탄핵을 주도했으며, 훗날 영안도 경차관으로서 삼봉도(독도·울릉도) 탐사 대책을 세우고, 서정 종사관(西征從事官)으로서 1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 최전방 만포(滿浦)에 출진한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인물이다.
    • 신계거(辛季琚) - 15세. 신영손의 사남. 성종 8년(1477) 문과에서 임금의 직접적인 친탁으로 가문 최초의 장원(壯元) 급제를 차지한 핵심 언관이자 학자이다.

4. 평가

고려 말기, 대내외적인 위기가 극에 달했던 시대에 국가 최상위 계층인 공신부터 최하층 군역인 봉졸(烽卒)까지 극단적인 롤러코스터 같은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수도 개경을 수복한 구국의 영웅으로 대접받다가도, 외적 방어 실패라는 실책 앞에서는 가차 없이 내쳐지고, 또다시 중앙 정계의 권력 암투(양백연 사건)에 휩쓸려 유배를 가는 등 그의 생애는 여말선초(麗末鮮初)의 혼란상을 관통하고 있다.

비록 말년에는 정치적 풍파 속에서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가문을 온전히 지켜낸 생명력은 훗날 조선 초에 영월 신씨 부원군파(府院君派)가 명문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밑거름이 되었다.

5. 여담

  • 공민왕 12년(1363) 개경 수복 당시 1·2등 공신들에게 내려진 포상은 매우 파격적이었다. 부모와 아내의 봉작을 세 등급이나 올려주고, 아들이나 사위에게 벼슬을 내렸으며(음서), 막대한 토지(100결~50결)와 노비를 하사받았다.[6] 신렴 역시 이러한 엄청난 부와 명예를 거머쥔 고려의 최상위 권력층 중 한 명이었다.
  • 그러나 불과 10년 뒤인 공민왕 22년(1373), 한양 방어 실패로 인해 정3품 한양윤(漢陽尹)에서 천역(賤役)인 봉수대 병졸로 곧바로 강등된 사건은 당시 고려 조정이 왜구의 침입을 얼마나 심각한 국가적 위협으로 인식했는지 보여준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임금이 직접 곤장을 치게 하고 최전방 초소로 내쫓을 만큼 전시의 군율과 문책이 엄격했던 것이다.
  • 극과 극을 오간 신렴의 끈질긴 생존 본능과 가문 수호의 역사는 묘하게도 그 후손들에게 이어졌다. 그의 아들 신이(13세) 역시 태종의 총애를 받다가 세종 초 '심온 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당하는 등 짙은 부침을 겪었으나, 결국 손자 신영손 대에 이르러 다시 조정의 핵심부로 복귀하는 역사가 세대를 거쳐 반복된다.

[1] 부원군파(府院君派) 11세.[2] 《고려사》 권38 세가 공민왕 원년 6월 임인 기사 참조[3] 《고려사》 권40 세가 공민왕 12년 윤3월 을유 기사 참조[4] 《고려사》 권44 세가 공민왕 22년 7월 을사 기사권114 열전 하을지 기사 참조[5] 《고려사》 권114 열전 양백연 기사 참조[6] 《고려사》 권40 세가 공민왕 12년 윤3월 을유 기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