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호 | 주산(珠汕) |
출생 | 1889년 |
경기도 양주목 고양주면 살곶이벌 (현재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동) | |
사망 | 1940년 11월 20일 |
경기도 경성부 |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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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신명균은 1889년 경기도 양주목 고양주면 살곶이벌(현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관립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1911년 주시경의 제자가 되어 조선어강습원에 입학했다. 1913년 조선어강습원 고등과를 졸업한 그는 1914년부터 1922년까지 독도공립보통학교 교사를 맡아 학생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쳤고, 1927년 보성전문학교 교사로 부임했으며, 1930년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해 1934년까지 여학생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쳤다.한편, 그는 1921년 조선어연구회가 발족하자 여기에 참가하여 1926년 간사가 되었고, 1927년 <한글> 잡지의 편집과 발행인이 되었다. 1929년엔 조선 총독부가 개최한 언문철자법회의 참여하여 우리의 철자법을 주도적으로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한글철자법 강연회와 한글강습회를 개최하여 한글을 보급화하고자 하였다. 1931년에 조선어연구회를 조선어학회를 바뀌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1932년에 간사장, 1933년에 회계감사를 역임하였다. 1932년에 다시 <한글> 잡지를 복간하였고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에 앞장섰다.
신명균은 중앙인서관이라는 출판사를 경영하면서 <신소년> 등의 잡지를 간행하였다. <신소년>은 청소년 교양잡지로 그의 주도로 한편으로는 정열모, 맹주천 등의 대종교 인사를, 다른 한편으로는 권경완, 이주홍 등의 사회주의 계열까지 참여시켰다. 그는 김교헌, 유근의 <신단실기>와 권덕규의 <조선유기>, 그리고 사회주의에 의거한 <사회주의 개론>과 <노동독본>을 함께 출판하여 사상적 균형을 취하고자 하였다. 또한 <조선문학전집>의 시조집, 가사집, 소설집을 편찬하여 조선의 문화를 소개하고자 하였다.
1920년대 초 대종교에 입교한 그는 대종교 총본부 중앙청년회에서 활동하였고, 영고탑에서 열린 대종교 교의회에 2번 참석하여 '지교'를 역임했다. 이후 영고탑에서 열린 대종교회의에 갔다 온 소감을 기술한 <우리의 옛땅을 밝고 와서>('신소년', 1924년 7월)라는 기행문을 발표하였다.
우리들의 선조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문명도 해보셨고 남들이 설설길 만한 위엄도 부려보셨습니다. 이처럼 온갖 자랑과 호령을 부리시던 땅은 이 반도보다도 저 넓고 넓은 남북만주와 시베리아 등이었습니다. 5천년동안이나 되는 오랫동안에 자자손손이 살던 곳이니 끼쳐 놓으신 자췬들 얼마나 많았겠으며 살어진 자췬들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 중에 혹은 단군 때의 무엇이니 부여의 무엇이니 발해의 무엇이니 고려의 무엇이니 하여 말로만 남아 있는 것도 잊고 혹은 자취만 겨우 붙어 있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단잠을 못 주무셔 가며 애를 쓰시고 고생하시던 일이며 의리있고 용맹있고 맘씨가 훌륭하시던 것은 백년천년에 눈비를 무릅써 가며 변함없이 우뚝 서 있는 저 백두산이 낱낱이 알 것이요 밤낮 쉬지 않고 철철 흘러가는 저 송화강, 흑룡강이 역역히 보았으련마는 답답한 저 산과 강이 말을 못하니 이를 누구더러 물어 볼까요?
그래도 얼마 되지는 않으나마 더러 있지만 있는 옛 자취를 잘 보관하는 것이 우리 선조들의 끼치신 뜻의 만일이라도 엿볼 수 있을 것이요 또 우리 자손된 사람의 도리도 되겠지요.
우리의 옛땅을 밝고 와서
그 중에 혹은 단군 때의 무엇이니 부여의 무엇이니 발해의 무엇이니 고려의 무엇이니 하여 말로만 남아 있는 것도 잊고 혹은 자취만 겨우 붙어 있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단잠을 못 주무셔 가며 애를 쓰시고 고생하시던 일이며 의리있고 용맹있고 맘씨가 훌륭하시던 것은 백년천년에 눈비를 무릅써 가며 변함없이 우뚝 서 있는 저 백두산이 낱낱이 알 것이요 밤낮 쉬지 않고 철철 흘러가는 저 송화강, 흑룡강이 역역히 보았으련마는 답답한 저 산과 강이 말을 못하니 이를 누구더러 물어 볼까요?
그래도 얼마 되지는 않으나마 더러 있지만 있는 옛 자취를 잘 보관하는 것이 우리 선조들의 끼치신 뜻의 만일이라도 엿볼 수 있을 것이요 또 우리 자손된 사람의 도리도 되겠지요.
우리의 옛땅을 밝고 와서
그는 이 기행문에서 만주가 단군 이래 우리 땅이고 그것을 지키지 못한 자손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들의 자취를 보관할 것을 주장한다. 특히 영고탑 주위의 발해의 동경성을 답사하고, “조선사람이 조선 옛터에 다시 들어와 살면 이 만주가 다시 조선의 땅이 된다는 전설”이 있어서 동경성에 조선사람을 들이지 않다가 당시에 우리 동포가 70여호 살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리고 만주 전역에 300만 명이 이주해 있고, 다섯 집마다 학교가 있어, 어떤 촌이든지 학교가 없는 곳이 없고 공부를 아니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하면서, 이는 장래 조선을 위하여 크게 기쁜 일이라고 주장했다.
1933년 4월, 신명균은 조선어학회의 회계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1933년 <조선어문법(朝鮮語文法)>, 1934년 <조선어철자법(朝鮮語綴字法)>을 출판하여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고 철자법 개정과 관련한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관제안(官制案)에 대항하여 조선어학회안(朝鮮語學會案)의 과학성을 적극 홍보하였다. 같은 해 6월 이극로(李克魯)와 함께 순 한글 주간신문(週刊新聞)인 『서울시보』를 발간하였다.
그러던 1940년 11월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조선어 상용을 금지하자, 그는 이에 분노했다. 소설가 홍구(洪九)는 1945년 12월 <신건설> 잡지에 기고한 '주산선생(珠汕先生)'에서 자신이 신명균이 자살하기 하루 전날에 만났던 사실을 밝히면서, "그때 선생의 비분은 말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관술(李觀述)은 신명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연전(年前) 일제의 모욕적인 창씨제도에 반항하여 자살해버린 신명균 선생이 있었다. 그는 일생을 양심적 민족주의자로서 마쳤거니와 또 내가 안 단 하나의 철저한 반일적 민족주의자이었다."
이관술, '반제투쟁의 회상'(상), <현대일보>, 1946년 4월 17일
이관술, '반제투쟁의 회상'(상), <현대일보>, 1946년 4월 17일
1940년 11월 20일, 신명균은 자택에서 자살했다. 1936년부터 조선어학회에 자주 참석해 신명균과 자주 대면했고 1964년 <한국민족운동사>를 저술한 조지훈은 1955년 10월 31일자 <고대신문> 기사에 기고한 글에서 신명균이 창씨문제에 분개하여 스승 나철의 사진을 품은 채 자결했다고 증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신명균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