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96년 6월 22일 (주)화성유통 상무였던 조호연 씨[1]와 직원 10명이 신안비치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조직폭력배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한 사건.2. 상세
1996년 6월 22일 (주)화성유통에서 일하던 조호연 씨와 직원 10명은 신안비치호텔 나이트클럽에서 회식을 하다가 술값 바가지으로 인해 웨이터와 언쟁을 했는데, 이 때 웨이터가 업소 사장 등 25명을 데리고 조호연 씨 및 직원들을 집단 폭행을 하였다. 이로 인해 조호연 씨는 갈비뼈 3개가 부러지고 직원들은 중경상을 입었다. 이후 조호연 씨는 신안비치호텔 나이트클럽에 가서 항의를 했는데, 이 때도 조폭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했다. 조호연은 1996년 7월 7일 검찰에 고소장을 제출하였지만 검찰하고 경찰은 수사에 진전이 없었다.[2] 이 사실을 안 조폭들은 조호연 씨가 일하던 곳을 찾아가 깽판을 치고 심지어 7월 20일에는 조호연 씨의 남동생을 불러내 폭행하는 등 보복을 하였다.3. 언론
1996년 7월 25일 KBS 9시 뉴스, 1996년 7월 25일 MBC 뉴스데스크더 이상 못 참은 조호연 씨는 자신의 돈으로 광주일보에 "대통령께 올리는 탄원서"라는 제목의 글을 실어 이 사실을 호소하였다. KBS나 MBC 등의 언론사들은 조호연 씨의 글을 보도하였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은 이 사실을 알았다.[3] 이후 경찰청장이 목포경찰서장에게 내리갈굼을 하면서 목포경찰서는 이 때부터 업소 종업원 5명에게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나이트클럽 사장 4명을 수배하고 다른 나머지 종업원을 찾기 시작하였다. 이후 김영삼 대통령은 조호연 씨에게 위로서신을 보내고 지역 인권단체들은 격려를 보내며 목포 사회가 어두운 이미지를 씻는 반성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시민여론이 확산되었다고 한다. 당시 조호연 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후 나이트클럽의 조폭들은 잡히고 다른 목포 조폭들도 잡혔다고 한다.[4] 이 때 형사들은 조폭들을 때리면서 체포했다고 한다.[5] 이후 목포 조폭들은 뿔뿔히 흩어지거나 일본으로 도망갔다고 한다.[6]
4. 사건 이후
사건 이후 당사자 조호연 씨의 근황은 알려지지 않았다.5. 범죄와의 전쟁의 차이점
범죄와의 전쟁은 노태우 정부의 민심을 바꾸기 위해 한 것이고[7] 이 사건은 조폭의 위상을 낮추는 계기가 된 사건이다. 범죄와의 전쟁은 대한민국 전역에서 실시되었지만 이 사건은 목포 일대의 조폭을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공통점이 있다면 조직폭력배에게 나비 효과를 불러온 것이다.[8][1] 39세이다 1957년생으로 추정[2]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경찰 비리가 존재하였고 무엇보다 조직폭력배 관련 사건들은 힘이 강하면 경찰이 수사를 안하는 경우도 있다.[3] 카더라에 따르면 내무부장관부터 경찰청장까지 불러서 나라꼴이 어떻게 되려느냐고 격노했다고 한다.[4] 다른 조폭들도 문제가 있었는데 명분이 없어서 안 잡다가 여론이 조성되면서 잡은 것 같다.[5] 당시는 범죄자의 인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경찰의 권력이 어느 정도 있었던 때였다.[6] 한 형사의 말에 의하면 이 시기가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목포에서 깡패가 없어진 시기였다고 한다.[7] 국군보안사령부 민간인 사찰 폭로 사건으로 노태우 정부에 인한 반대 시위가 일어날 정도로 민심이 악화되었다.[8] 범죄와의 전쟁은 서진 룸살롱 집단 살인 사건으로 인해 조폭의 사건들이 터져나오면서 진행된 것이고 조호연 씨 사건은 한 사건으로 조폭의 활동을 위축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