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 경명(敬明) / 청운(靑雲) |
본관 | 삼척 심씨[1] |
출생 | 1887년 4월 5일 |
강원도 삼척도호부 미로면 상거노리 (현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상거노리)[2] | |
사망 | 1913년 12월 9일 |
대구형무소 | |
묘소 |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상거노리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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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87년 4월 5일 강원도 삼척도호부 미로면(현 삼척시 미로면) 상거노리에서 아버지 심찬조(沈燦朝, 1860. 12. 19 ~ 1906. 8. 4)와 어머니 삼척 김씨(1857. 11. 22 ~ 1935. 11. 5)[3] 사이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삼척군 말곡면 도경동(현 삼척시 도경동)으로 이주했다.그는 1909년 9월 중순 주명식(朱明識) 의병진에 입대하여 도총장(都總長)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해 9월 30일[4]부터 12월 29일[5]까지 부하 20명과 함께 총, 칼, 곤봉을 휴대하고 강원도 울진군의 각 마을을 돌아다니며 약간의 돈, 음식물, 짚신 등의 물품을 거두었다.
1910년 7월 26일[6] 밤에는 부하 5명과 함께 총, 칼, 곤봉을 휴대하고 경상북도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에 거주하던 홍재명(洪在明)의 집에 들어가 홍재명과 그의 친척 홍종락(洪鍾洛)을 결박하고, 가지고 있던 곤봉으로 구타하며 돈 300냥을 요구했다. 그러나 홍재명은 당시 가지고 있는 돈이 없음을 하소연했고, 이에 7월 29일[7]에 해당 금액을 수금하겠노라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 뒤 약속한 당일인 7월 29일 밤, 부하 3명과 함께 총을 휴대하고 다시 홍재명의 집에 들어가 돈 48원과 흰 옥양목, 큰 옷감 한 단, 생실로 짠 명주 1필을 거두었다.
1910년 8월 31일[8] 밤에는 부하 1명과 함께 봉화군 소천면 오산리(현 봉화군 법전면 소천리 오미마을)에 거주하던 박찬호(朴瓚浩)의 집에 들어가 의병이라 말하며 군자금 100냥을 요구했으나, 박찬호가 당시 가지고 있던 돈이 없었기에 9월 23일[9]에 해당 금액을 수금하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이후 9월 29일[10] 밤 부하 1명과 함께 총을 들고 다시 박찬호의 집에 들어가 금 14원을 거두었다.
1910년 9월 13일[11] 밤에는 부하 1명과 함께 총, 곤봉을 휴대하고 봉화군 소천면 선천리에 거주하던 이희명(李羲命)의 집에 들어가 백미 3말을 요구해 거두어들였다.
이후 심재규는 체포되었고, 당시 가지고 있던 화승총 1정을 압수당했다.
1910년 11월 14일 대구지방재판소 형사부에서 소위 강도 혐의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복역 중이던 1913년 12월 9일 옥중에서 옥사, 순국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에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