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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隨棗會戰(수조회전)
일본어: 襄東会戦(양동회전), そ号作戦(소호작전)
영어: Battle of Suxian-Zaoyang
쑤이셴-짜오양 전투 | ||
제2차 세계 대전 중 중일전쟁의 일부 | ||
▲ 쑤이셴-짜오양 전역도 ▲ 방독면을 쓴 채 전투를 치르고 있는 국민혁명군 병사들 ▲ 철로를 경비하고 있는 일본군 병사 | ||
날짜 | ||
1939년 5월 1일 ~ 1939년 5월 24일 | ||
장소 | ||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민국, 쑤이셴 및 짜오양 | ||
교전국 |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민국 | 일본 제국 |
지휘관 | 파일:대만 국기.png 리쭝런 파일:대만 국기.png 리핑샨 파일:대만 국기.png 장쯔중 | 오카무라 야스지 |
결과 | ||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민국의 승리 | ||
영향 | ||
국민혁명군의 역량 증진 | ||
병력 | 파일:대만 국기.png 22만명 | 11만 3천명 |
피해규모 | 파일:대만 국기.png 약 2만명 사상 | 1만 3천명 사상 |
1. 개요
1939년 5월 국민혁명군 22만 명과 일본군 11만여 명이 쑤이셴-짜오양 일대에서 맞붙은 전투. 전투 초반 일본군이 짜오양을 일시 점령했으나 국민혁명군의 반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2. 배경
일본군은 우한 전투 후 대공세를 잠정적으로 중단하고 분산된 병력을 통합하고 점령지 지배를 공고화하기 위해 전략적 공세를 실시했다. 국민혁명군은 이러한 적의 움직임에 맞서기 위해 1939년 4월 하순부터 5월 중순까지 '4월 공세'를 개시, 국민혁명군 소속의 유격대를 일본군 점령지에 잠입시켜 적진의 후방을 교란하고 일본군 장교나 친일 요인들을 암살하게 했다. 또한 제5전구는 핑한철로의 동서 방면을 공격해 일본군을 압박했다.중부 지나방면군 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 중장은 우한의 주변 점령 지역을 통합하기 위해 제 3사단, 13사단, 16사단, 34사단을 동원해 신양, 응산, 종상을 점거한 후 퉁바이, 쑤이셴, 짜오양을 공격해 국민혁명군 5전구를 포위섬멸하고자 했다. 이리하여 1939년 4월 말, 오카무라 중장은 11만 명을 동원하여 짜오양을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3. 경과
1939년 5월 1일 새벽, 일본군 제 13, 16사단 주력군과 기병 제4여단은 공군과 전차의 지원을 받으며 중샹, 응산에 주둔한 제37, 180사단(5전구의 우익군)을 공격했다. 5월 4일, 일본군은 국민혁명군의 방어선을 뚫고 양하를 건너 양하 동쪽 방면으로 돌격했다. 국민혁명군은 이에 완강히 저항했지만 일본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밀렸고 국민혁명군은 패퇴하여 후방으로 퇴각해야 했다. 5월 6일, 일본군은 장수점을 점령하고 황교를 돌파한 후 북상하여 국민혁명군 제122사단을 격파했다. 이에 국민혁명군은 봉악하(奉乐河), 야오자강(姚家河), 유수하(流水河), 쌍하(双河) 등지에서 일본군을 측면 공격했다.5월 7일, 일본군은 쌍하 등지에서 자신들을 공격한 중국군을 격파했다. 다음날 일본군은 모자판(茅茨畈), 신집진(新集进)의 국민혁명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5월 10일부터 호양진(湖阳镇), 신예현을 점령한 후 탕허현을 비롯한 짜오양 동북 지역을 휩쓸었다. 이때 국민혁명군 5전구의 우익군과 창장 방어군(江防)은 일본군이 짜오양 방면으로 깊숙이 침입한 틈을 타 신예현을 탈환하기 위해 일본구의 후방을 공격했다. 한편 일본군과 맞서다가 큰 피해를 입은 제122사단과 제180사단은 탕허, 번성(樊成) 이북 지방으로 퇴각했고, 제37, 38, 132사단은 여전히 양허 동안 지역을 사수했다.
같은 시기, 일본군 제3사단의 주력부대는 응산 좌측면을 지키고 있던 국민혁명군 제 11집단군 제84사단과 제13사단을 공격했다. 제84사단은 일본군과 맞서 혈투를 벌인 후 타얼만(塔儿湾)으로 후퇴했다. 5월 2일, 일본군 제3사단은 여세를 몰아 제31집단군 소속 제13사단이 지키고 있던 고성(高城)을 공격했다. 이후 쌍방이 타얼만, 고성 일대에서 격전을 치뤘는데, 그중 타얼만 진지는 무려 6~7차례나 주인이 바뀔 정도로 격렬했다. 5월 4일, 일본군은 수많은 병사들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하자 독가스를 살포해 중국군을 제압하고 고성과 타얼만 공략을 달성했다.
5월 5일, 일본군은 포병 및 폭격기, 전차를 앞세워 맹공격을 퍼부었다. 국민혁명군은 야오자강 근처에서 일본군과 혈전을 치렀으나 중과부적으로 밀려 6일에 천하구(天河口) 방어선으로 후퇴했다. 5월 7일, 쑤이셴을 공략한 일본군은 8일에 국민혁명군 제 84사단 제2방어선을 뚫고 짜오양을 점령한 후 야오자강 근처 두점진(头店阵)에 주둔한 85사단을 공격헀다. 이에 85사단은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를 치른 후 일본군이 자신들을 포위하기 전에 안전하게 물러나는데 성공했고 84사단은 탕허에 주둔했으며, 39사단은 대홍산에서 유격전을 전개했다.
5월 10일, 국민혁명군 제31 집단군 주력군이 탕허로 이동하여 5월 15일 짜오양 이북 지역에 도착했다. 한편 짜오양을 점령한 일본군은 5월 10일 장당진과 상유진 공략에 착수했다. 제119사단은 이에 맞서 싸웠으나 여의치 않자 5월 11일에 철수했고, 일본군 제4기병여단은 강을 따라 진군하여 12일 탕허현을 함락시켰다. 이때 일본군은 자신들이 이겼다고 확신했지만 그 무렵 그들 주변에 적의 대군이 도사리고 있었다.
허난 남서쪽에 주둔한 제5전구 소속 제31집단군과 제1,2 화동군대는 수세를 공세로 바꾸기 위해 짜오양을 점령한 후 남하 중인 일본군을 은밀히 포위했다. 그후 제31집단군은 짜오양을 공격했고, 나머지 군대는 중샹을 공격해 일본군의 후방을 차단했다. 국민혁명군은 점령지에 남아있던 소수의 일본군을 격파하고 5월 14일에 탕허현을 탈환하고 16일에는 퉁바이에서 일본군을 포위했다. 또한 짜오양 탈환전에 착수한 제31집단군은 4일간 격전을 벌인 끝에 5월 19일에 탈환했다. 여기에 제39집단군 소속 유격대는 산지로 들어가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교통을 차단해 일본군을 한층 더 괴롭게 만들었다.
5월 22일, 국민혁명군은 쑤이셴 탈환에 착수해 23일 탈환했다. 이렇게 되자 일본군은 포위될 위기에 직면했다는 걸 깨닫고 독가스를 대량 살포해 국민혁명군의 접근을 막은 후 본래 진지로 전면 퇴각했다. 이후 국민혁명군은 추격을 개시, 잃었던 영토를 모두 되찾았다. 이로서 쑤이셴-짜오양 전투는 국민혁명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4. 결과
24일간의 전투 기간 동안, 국민혁명군은 약 2만여 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그 중 상당수는 일본군의 독가스 살포로 인한 것이었다. 반면 일본군은 1만 3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전까지 치뤄진 전투에서 일본군보다 3~4배 이상의 손실을 입었던 국민혁명군은 이제 거의 대등한 수치의 사상자를 상대에게 강요함으로서 자신들의 전투력이 향상되었음을 입증했다. 반면 일본구는 처음에는 많은 도시와 현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지만 국민혁명군의 거센 저항과 역습으로 인해 결국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이후 일본은 중일전쟁을 조기에 끝낼 수 있다는 믿음을 점차 잃어버린다.5. 참고 문헌
중문 위키피디아 쑤이셴-짜오양 전투 문서일문 위키피디아 쑤이셴-짜오양 전투 문서
영문 위키피디아 쑤이셴-짜오양 전투 문서
바이두백과 쑤이셴-짜오양 전투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