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ruby(上尾事件, ruby=あげおじけん)]1973년 3월 13일 일본 사이타마현의 아게오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사상 초유의 승객 폭동. 말 그대로 시민들이 빡치면 헬게이트를 열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사건이며 뒤이어 일어난 더 큰 규모의 수도권 국전 폭동과 함께 일본국유철도의 운명을 결정한 사건이기도 하다.
한국의 동아일보에서도 이 사건을 보도하기도 하였다.
2. 사건의 경과
1973년 3월 일본국유철도(JNR) 동력차노조[1]는 2인승무를 요구하면서 산발적으로 '순법투쟁'[2]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국철을 포함해 일본의 공공기업은 현재도 존속하고 있는 '공공기업체 등의 노동관계법'에 의해 파업이 금지되어 있어서 그 대안으로 순법투쟁을 벌이곤 했다. 노조도 노조지만, 국철이나 운수성도 대체수송 등의 대책이나 노조와의 협상을 진행하지 않아 일을 키웠다. 1970년대 초반은 전후 단카이 세대가 경제활동에 나서면서 대도시권 인구가 폭증하던 시기로 오다와라시, 우츠노미야시, 타카사키시와 같이 도쿄에서 거리가 먼 교외 지역에서도 통근/통학을 위한 철도 승객이 많이 늘어났으나 정작 직원들이 시위를 하느라 열차 배차 간격이 제멋대로였고 국철이 운영하던 모든 노선은 하나같이 지옥철 그 이상이었다.사건이 일어난 아게오역은 타카사키선의 역이다. 타카사키선은 예나 지금이나 도쿄에서 간토 서북부, 더 가서는 코신에츠와 호쿠리쿠를 잇는 핵심 간선으로 국철의 경영이 바닥을 기던 1970년대 초반에도 흑자를 낸 노선이다. 즉 도쿄 한복판을 도는 야마노테선에 맞먹게 혼잡했다는 뜻이다. 노조의 순법투쟁 순서가 타카사키선에 돌아온 것이 3월 12일부터로, 당시 보도에 따르면 아게오에서 우에노역까지 보통 37분 걸리던 것이 3시간 이상 걸렸다고 한다.
특급 열차도 완행 열차[3]로 운행되었을 정도로 엉망인 상황에서 기껏 돌아온 열차도 개찰거부와 운행정지가 연속되자 승객들의 분노는 한계치를 넘기 시작했는데, 아침 6시 30분경 아게오에서 우에노까지도 가지 않고 오미야역에서 타절한다는 안내방송을 들은 플랫폼의 승객들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멈춘 열차에 투석을 하기 시작한 것으로 시작됐다. 소란은 열차 내부는 물론 역 전체로 확대되었는데 열차에 타고 있던 승객들이 기관실로 쳐들어가자 당시 열차를 몰던 기관사는 열차 앞문을 통해서 빠져나와 역장실로 도망쳤으나 이들을 족치려 찾아온 성난 군중들에 의해 경찰에 신고를 못하게끔 비상전화기가 파괴되고 역장과 역무원들은 한데 붙들려 집단 린치를 당했다.[4] 승객들 중에서는 열차 기관실에 불붙은 신문지를 집어넣어 방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아침 7시 30분, 이런 아비규환을 모르고 역을 통과하던 니가타행 급행열차 토키가 시민들의 돌팔매 공격을 받아 기관차와 객차 유리창이 깨져 회송했다.
뒤늦게 보고를 받은 국철은 오미야역에 긴급전화를 걸어 현장 상황을 파악하려 했으나 앞서 밝혔듯이 승객들이 역무실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역무원들까지 죄다 인사불성이 되었기 때문에 끝내 접촉하지 못했다.
사태는 열차는 물론 역 시설물의 파괴와 방화로 이어진 것은 물론이고 국철이 마비되자 인근 역의 시민들까지 폭동을 시작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관할 경찰이던 사이타마 경찰은 처음에는 사태파악도 하지 못하고 70여명의 경찰을 출동시켰으나 현실을 알고 기동대 550명을 추가로 증파해 진압을 시도했으나 수백명 남짓한 병력으로 몇천 내지 몇만 명의 군중을 진압하기란 불가능했다. 국철 지휘부는 운수성과 함께 긴급 대책회의에 돌입했으나 철길을 따라 인근의 오미야역에서도 오지 않는 열차를 기다리다 화가 난 시민들에 의해 폭동이 발생했고, 미야하라역에서는 승객들이 역장과 역무원을 붙잡아 철길을 걷게 하며 조리돌림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낮 12시 30분경 도쿄역에서는 "운영을 이딴식으로 하지 마라. 오후 1시 5분에 도쿄역을 폭파시키겠다"는 협박전화가 걸려와 경시청에 비상이 걸렸다. 이런 일련의 폭력사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민들이 운수성에서 급파한 셔틀버스를 타고 자진 해산하는 형태로 마무리되었으나 이후 아게오역과 관련된 노선의 운행이 며칠 동안 중단되는 바람에 지역 주민들이 철길을 걸어가서 통근 및 통학을 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한편 일본제 열차를 다량 구매하기 위한 잠비아 교통성 소속 관계자가 때마침 방일 중이었는데, 이 꼬라지를 보고 무슨 열차를 팔아먹냐고 하면서 계약을 파기하고 귀국하면서 나라망신까지 초래했다.
국철노조는 당초 폭동의 원인으로 노조를 탄압하려는 당국이 개입하여 조장했다는 음모론을 제기하였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다만 훗날 자신이 폭동을 선동했다고 주장한 우익 인사는 있었다.
3. 사건 이후
당시 일본 정부가 집계한 손해는 다음과 같다.* 운행 중단 : 약 35000량
* 여객 열차 : 약 12000량
* 화물열차 : 약 21000량
* 물량 감소 : 약 260만톤
* 고객 부상자 : 총 92명
총 7명이 검거되었는데 엉뚱하게도 혼란한 틈을 노려 남의 지갑을 훔친 사람, 기자를 폭행한 사람뿐이었다.[5] 또 이 사건 이후에도 국철노조의 시위는 끝나지 않았고 결국 한 달 후 수도권 국전 폭동이라는 스케일 업된 시민 폭동으로 이어지면서 국철의 몰락이 시작되었고 결과적으로 이러한 사건들은 오늘날의 JR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 여객 열차 : 약 12000량
* 화물열차 : 약 21000량
* 물량 감소 : 약 260만톤
* 고객 부상자 : 총 92명
이 사건은 발생의 원인이었던 국철노조와 타카사키선의 혼잡으로 요약 가능한데 국철노조는 JR그룹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해체되었고 타카사키선의 혼잡도 바이패스 역할을 하는 사이쿄선이 1985년에 개통되어 승객이 분산되고 호쿠리쿠 신칸센의 오미야 - 나가노 구간[6]이 1997년에 개통되면서 장거리 재래선 열차 숙청으로 선로 용량에 숨통이 트이면서 아게오 사건 발생 당시보다는 많이 완화되었다.
당시 사건을 다룬 뉴스 영상. 나중에 터진 수도권 국철 폭동도 함께 다루고 있다.
비슷하게 일본인 전투종족이 출현한 사례로 나리타 공항을 둘러싼 나리타 투쟁을 들 수 있다.
[1] 일반적으로 단순히 국철노조로 묶어 인식되곤 하지만 국철의 노조는 직렬과 노선에 따라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거의 어용노조 급에서 일본 극좌의 핵심세력까지 다 갖추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중 동력차노조는 기관사들이 소속된 조합의 집단이다. 여담으로 과거의 국철노조 집단은 지금도 JR그룹 계열의 노조로 남아 있는데 그 중 치바 지역의 국철 동력차노조인 '도로치바'는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다.[2] 한국에서는 준법투쟁으로 부르며, 정비, 점검, 운전 등 열차 운행의 모든 부분에서 법규와 내부 규정을 준수한다는 뜻이다. 겉으로는 (통상적인 영업에서) 슬그머니 횡행하는 규정 위반 없이 안전을 위한 절차를 준수하는 것을 내세우지만 실질적으로는 사보타주에 해당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1990년대 한국의 철도노조에서도 곧잘 행해졌는데 가령 정차역 개문 30초를 준수한다고 하고(당시 수도권 전철에서는 승강객만 적으면 10초 단위 개문도 흔했다.) 실제로는 분단위 정차가 횡행하거나 속도 제한이 붙으면 그 제한을 한없이 밑도는 속도로 굴러가는 식으로 열차를 늦춘다. 결과적으로 분명히 모든 차량과 인원을 투입했는데 다이어그램이 꼬이고 소요시간과 배차간격이 몇 배씩 늘어나게 된다.[3] 이때 우스이 급구배 전용으로 제작된 169계 전동차(1967년 제작)가 완행열차로 운행되었다. 그러나 2비차에 크로스시트인 169계 전동차는 수송능력이 통근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아 차내 혼잡만 가중시켰다.[4] 결국 이들은 몰매를 건디지 못하고 병원에 실려갔다.[5] 폭동 자체는 그럴만한 경위가 있었고 가담자가 너무 많은 데다 주모자도 불분명해 시민들을 체포할 수 없었다. 죄없는 역장을 두들겨 팬 것 역시 엄연한 강력범죄 행위이지만 불특정 다수에 의한 집단 린치 사건이라는 특성을 생각하면 정말 엉뚱한 사람만 잡은 셈이다.[6] 이때는 나가노 신칸센이라는 명칭으로 개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