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17 19:08:09

아놀드 폰 에그몬트

파일:아놀드 폰 에그몬트.jpg
이름 아놀드 폰 에그몬트
Arnold von Egmond
출생 1410년 7월 14일
홀란트 백국 에그몬드 안 덴 호프
사망 1473년 2월 23일
브라반트 공국 그라베 성
아버지 얀 2세 판 에그몬드
어머니 마리아 판 아르켈
형제 빌렘 4세
아내 클레베의 카타리나
자녀 마리아, 마르가레테, 아돌프, 카타리나
직위 헬러 공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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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헬러 공작. 헬러 공작위를 놓고 아돌프 폰 율리히베르크, 게르하르트 폰 율리히베르크와 전쟁을 치렀고, 이후 아들 아돌프 폰 에그몬트와 분쟁을 벌였다.

2. 생애

1410년 7월 14일 홀란트 백국 에그몬드 안 덴 호프에서 아르켈 영주인 얀 2세 판 에그몬드와 메헬렌 영주 얀 5세 판 아르켈의 딸인 마리아 판 아르켈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빌럼 4세가 있었다. 1423년 6월 25일, 헬러와 율리히 공작 레이날트 4세 폰 율리히가 자녀를 낳지 못한 채 사망했다. 당시 13세였던 그는 자신이 레이날트 4세의 여동생인 요한나의 손자인 점을 근거로 삼아 헬러 공작위를 주장했다. 반면, 베르크 공작을 맡았던 레이날트 4세의 친척인 아돌프 폰 율리히베르크가 율리히 공작위를 선점했고, 뒤이어 헬러 공작위를 주장했다.

아놀드는 헬러 귀족 및 도시들의 특권을 보장하고 더 많은 것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헬러 기사단과 도시 대표단은 1423년 7월 8일 니어메겐에서 그를 만장일치로 헬러 공작에 추대했다. 1424년 8월 15일, 아놀드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에게 14,000 길더를 제공하는 대가로 헬러 공작령과 율리히 공작령을 맡을 권리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아놀드가 그 돈을 지불하지 못하자, 지기스문트는 1425년 5월 24일 아돌프에게 헬러 공작위를 수여했다. 이후 두 사람은 헬러 공작위를 놓고 전쟁을 치렀다. 그는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저지대 국가 전역을 통제하는 것을 지지하는 대가로 지원을 받아냈고, 나중에 필리프의 조카인 클레베의 카타리나와 결혼해 부르고뉴 공국과의 동맹을 강화했다.

아놀드와 아돌프의 전쟁은 4년간 승패를 가리지 못하다가 1429년 7월 임시 휴전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지기스문트는 부르고뉴 공작의 권세가 지나치게 강해져서 신성 로마 제국 서부 지역이 죄다 넘어갈 것을 우려한 끝에 1431년 아놀드를 제국 추방형에 처했다. 하지만 아놀드는 부르고뉴 공국의 지원으로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휴전이 만료된 후인 1433년부터 1436년까지 율리히 공작령을 확보하기 위해 아돌프와 전쟁을 치렀지만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선량공 필리프가 두 사람을 중재하면서 또다른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아돌프 폰 베르크 사후, 아돌프의 조카이자 후계자인 게르하르트 폰 율리히베르크가 1440년대 초 헬러를 공략하고자 전쟁을 재개했다. 1444년 11월 3일, 게르하르트는 린니히 전투에서 아놀드를 상대로 승리한 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린니히 시에 성 후브레투스 기사단 지부를 설립했다. 그러나 이후의 전쟁은 지지부진했고, 결국 양자는 아놀드가 율리히 공작령을 확보하는 걸 포기하고, 게르하르트는 헬러 공작령을 확보하는 걸 포기하는 조건으로 새로운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1450년경, 아놀드는 로마예루살렘으로 순례하면서 교회의 지지를 확보해 공작으로서의 입지를 다지려 했다. 그러나 헬러 귀족들에게 부여했던 특권을 도로 해소하려 해 그들과 갈등을 벌였고, 위트레흐트 주교령 점령을 둘러싸고 부르고뉴 공국과 갈등을 벌였다. 이에 선량공 필리프는 헬러 지역 귀족들의 저항을 지원했다. 1456년, 아놀드의 아들 아돌프 폰 에그몬트가 지역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반란을 일으키면서 갈등이 폭발했다. 이후 수년간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진 끝에, 1465년 1월 아돌프가 아버지 아놀드를 생포하는 데 성공한 뒤 헬러 공작이 되었다. 그러자 아놀드의 처남은 클레베 공작 요한 1세가 아놀드를 구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아돌프에 대적했다. 아돌프는 클레베 공작에 맞서 쾰른 대주교와 동맹을 맺고, 1468년 6월 23일 슈트랄렌 전투에서 클레베 공작의 군대를 격파했다.

1471년 2월 10일,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은 아놀드와 아돌프 부자를 에스당에 초대한 뒤 중재안을 제시했다. 그는 아돌프가 실절적인 권력을 행사하되, 아놀드가 명목상 헬러 공작 칭호를 수여받고 그라베에서 연금을 받으며 지낼 수 있게 해주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아돌프가 이 제안을 거부하자, 용담공 샤를은 병사들을 시켜 아돌프를 체포한 뒤 나무르에 연금하게 했다. 그 후 헬러 영지로 돌아간 아놀드는 지역 귀족들의 인정을 받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용담공 샤를은 그가 명목상 헬러 공작을 맡되, 자신이 헬러 영지를 실질적으로 통치해야 한다는 뜻을 표명했다.

아놀드는 처음에는 저항했지만, 대다수 지역 귀족이 용담공 샤를의 권세를 두려워해 그에게 붙자 전의를 상실하고 1471년 12월 1일 부르고뉴 공작에게 30만 길더를 제공하고 그를 주권자로 받드는 대가로 헬러 공작을 맡았다. 그 후 명목상 헬러 공작을 맡았지만 아무런 실권을 행사하지 못한 채 조용히 지내던 그는 1473년 2월 23일에 그라베 성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3. 가족

  • 클레베의 카타리나(1417 ~ 1479): 클레베 공작 아돌프 2세와 마리 드 부르고뉴[1]의 딸.
    • 마리아(1432 ~ 1463):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2세의 왕비.
    • 마르가레테(1436 ~ 1486): 스폰하임 백작, 팔츠심머른 공작 프리드리히 1세의 부인.
    • 아돌프 폰 에그몬트(1438 ~ 1477): 1456년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뒤 1465년 아버지를 체포해 헬러 공작에 취임했지만, 1471년 용담공 샤를에게 체포된 뒤 나무르에 연금되었다가 용담공 샤를이 부르고뉴 전쟁을 치르던 중 낭시 전투에서 전사한 뒤 1477년 다시 헬러 공작이 되었지만 투르네에서 급사했다.
    • 카타리나(1439 ~ 1497): 리에주 주교 루이 드 부르봉의 정부.


[1]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