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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리아 왕국 초대 군주 ადარნასე | 아다르나세 | ||
제호 | 한국어 | 아다르나세 |
조지아어 | ადარნასე | |
라틴어 | Adarnase | |
생몰 년도 | 미상 ~ 923년 | |
재위 기간 | 888년 ~ 92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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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베리아 왕국 바그라티온 왕조 초대 군주.2. 생애
타오 초대 공작 다비트 1세의 외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동로마 제국의 봉신이자 아르메니아 공작 아쇼트의 동맹자였다. 그러던 881년, 타오-클라제티 4대 공작 과람의 아들 나르세가 자신에게 상속받은 영지가 너무 적다고 여기고, 아버지로부터 유산 일부를 받아낸 다비트 1세에게 원한을 품은 나머지 암살해버린 사건이 벌어졌다. 나르세는 다비트의 영지를 점령한 뒤 동로마 제국과 아르메니아에 인정을 받으려 했다. 하지만 두 국가 모두 인정하지 않았고, 아르메니아 공작 아쇼트 1세의 지원을 받은 리파리트 오르벨리아니의 조지아인들이 봉기했다. 나르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주했다.리파리트 오르벨리아니는 그를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타오 공작으로 임명하려 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그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타오-클라제티 3대 공작 아다르나세 2세의 장남이자 타오에 일부 영지를 가지고 있던 구르겐 1세를 타오 일대 전역의 공작으로 선임했다. 그는 구르겐으로부터 일부 영지를 받고 조용히 지냈다. 그러던 884년, 아르메니아 공작 아쇼트가 아르메니아 왕으로 즉위한 뒤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아바스 왕조와 동맹을 맺었다. 구르겐 1세는 이 때를 틈타 조지아를 통일할 야망을 품고, 조지아 내 친위세력과 아르메니아와 동맹을 맺고 이웃 왕국인 압하지야를 압박했다.
이에 압하지야를 속국으로 두고 있던 동로마 제국은 그를 견제하기로 마음먹고, 885년 나르세에게 용병대를 맡겼다. 나르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 압하지야에 도착한 뒤 그곳의 군주 바그라트의 환영을 받았다. 이제 나르세의 침공이 임박하자, 구르겐 1세는 그와 연합하여 이에 대항했다. 888년 압하지야의 지원을 받은 나르세와 맞붙은 그와 구르겐 1세는 아스핀차에서 적군을 크게 격파하고 나르세를 생포한 뒤 즉결 처형했다. 이리하여 조지아 전역이 동로마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났고, 바그라티온 가문의 타오 저지대 지배가 공고해졌다.
888년, 아르메니아 왕국은 젊은 아다르나세에게 이베리아 왕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이리하여 이베리아 왕국은 580년 사산 왕조에게 멸망된 이래 300년 만에 부활했다. 다만 옛 이베리아 왕국의 중심지였던 므츠헤타는 그의 왕국의 영역 밖에 있었다. 한편 구르겐은 나르세의 영지 일부를 받고 아르타니와 차브체티의 공작을 칭했다. 아다르나세는 남쪽으로 확장하는 정책을 시작해 차브체티 시를 요새화하고 에르주름까지 확장했다. 그 후 카르틀리, 클라제티 및 타오의 일부의 영역과 더불어 동부 및 남부 조지아 일대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했다.
이 무렵, 구르겐 1세는 자신이 아니라 새파랗게 어린 그가 이베리아 왕이 된 걸 아니꼽게 여겼고, 확장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권력이 날로 커지는 것에 위협을 느꼈다. 이리하여 구르겐과 아다르나세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고, 조지아 귀족들은 구르겐 파와 아다르나세 파로 나뉘었다. 891년 양측은 음글리나비에서 맞붙었다. 그 결과 구르겐 1세가 전투에서 패배하여 치명상을 입은 채 체포되어 얼마 후 사망했다. 이로써 그는 타오 전체를 손아귀에 넣었고, 동로마 제국은 현실을 인정하여 그를 타오 대공으로 인정했다.
이무렵 아르메니아의 아쇼트 왕이 사망하자, 그는 아르메니아를 방문했다가 키르스 총독 스파라페트 아바스에게 붙잡혔다. 이에 이베리아인들이 풀어달라고 호소했고, 아바스는 곧 풀어줬다. 그는 곧바로 장례식에 참석해 고인의 명목을 빌고 후계자인 숨바트를 만나서 아르메니아의 분열을 피하기 위해 왕국을 적극적으로 통제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면서 흐느끼고 있는 숨바트를 일으켜 세우고 왕의 옷을 입히고 왕관을 씌워서 숨바트 1세를 아르메니아의 합법적인 왕으로 공식화했다.
그러나 이베리아로 돌아가는 길에 아르메니아 왕위를 노리고 있던 스파라페트 아바스에게 체포된 뒤 카르스 성채에 갇혔다. 이에 아르메니아의 총대주교 게오르기 2세가 아바스에게 2개의 도시를 제공하면서 그를 석방해달라고 호소했고, 그는 자신의 맏아들인 다비트를 인질로 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래도 아바스가 석방시켜주지 않자, 숨바트 1세가 군대를 이끌고 카르스를 포위했고, 결국 아바스는 그를 풀어주기로 했다.
895년 디야르 바크르의 아랍 총독 칼리드 이븐 야지드 알-샤이바니가 남부 아르메니아를 침공했다. 그는 숨바트 1세와 함께 침략자를 격퇴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지만, 내부의 배신으로 인해 패배했다. 896년 아제르바이잔의 사지드 에미르인 무하마드 이반 아빌 사지가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자, 그는 재차 숨바트 1세를 도와 무하마드와 맞서 싸웠지만 또 패배하고 카르스가 함락되는 걸 막지 못했다. 901년 무하마드 이반 아빌 사지가 병사한 뒤 새로 부임한 데브다드 이븐 무하마드는 아르메니아, 이베리아와 화해했다. 그는 에라즈게보르에서 숨바트 1세와 아르메니아인들과 함께 축하 연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트란스코카서스의 정세는 점점 불리하게 흘러갔다. 카케티아 군주 파디아 1세와 후계자 크브리케 1세는 조지아 동부 일대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티플리스 및 아제르바이잔의 아랍인들과 친선 관계를 맺었다. 카케티아는 곧 이베리아 왕국을 공략할 야심을 품었다. 여기에 이베리아 내륙 산악지대의 귀족들은 그의 통제에 따르길 거부하고 영지를 자체적으로 운영했다. 그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공격적인 외교 정책을 펼치기로 마음먹었다.
904년, 압하지야 왕국이 카르틀리를 침공하여 우플리츠시케의 주요 요새를 점령하고 나머지 지역을 파괴했다. 그는 숨바트 1세와 함께 카르틀리 남쪽의 아르메니아-조지아 지방인 구카크를 방어하기 위해 연합 전선을 형성했다. 그는 압하지야 왕국의 콘스탄틴 3세와 협상하는 척했다가 콘스탄틴 3세가 방심한 틈을 타 사로잡은 뒤 숨바트에게 인질로 보냈다. 이후 압하지야 왕국은 그의 후원을 받은 귀족들의 반란으로 인해 혼란스러워졌고, 그는 이 때를 노려 압하지야를 집어삼키려 했다. 그러나 그의 권세가 지나치게 커지는 걸 경계한 숨바트 1세는 4개월 만에 콘스탄틴 3세를 풀어주고 아르메니아인이 쿠타이시를 다스리는 걸 용인반는 대가로 압하지야가 카르틀리를 지배하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그는 이에 분노하여 숨바트 1세를 배신자라고 비난했다.
905년, 그는 아르메니아의 강력한 귀족 하산을 포함한 여러 귀족들을 포섭했다. 당시 숨바트 1세는 아다르나세가 자국을 침략할 것은 전혀 예상 못하고 타시르로 사냥을 떠나 있었다. 그는 이 틈을 타 시라크 지방을 침략해 약탈을 자행한 뒤 여세를 몰아 아르메니아의 수도 에라즈가보르스를 공략하려 했다. 그러나 숨바트 1세가 소식을 접하자마자 반격에 나섰고, 그는 전투에서 패배한 뒤 타오로 피신했다. 이후 그는 숨바트 1세에게 장남 다비트를 인질로 보내고 그를 배신한 귀족들의 명단을 전달하는 대가로 아르메니아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숨바트 1세는 많은 귀족을 처형했고, 처형을 모면한 이들은 압하지야와 동로마 제국으로 망명했다.
905년, 아제르바이잔의 에미르 유수프 이븐 아빌-사즈가 압바스 왕조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숨바트 1세는 압바스 왕조로부터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오히려 카케티와 티플리스 토후국을 정복한 뒤 아르메니아로 쳐들어온 유수프에게 연전연패했다. 그는 숨바트 1세의 구원 요청을 거부하고 유수프와 협력하여 압하지야인들을 카르틀리에서 몰아냈다. 907년에도 유수프가 아르메니아를 침략하여 대대적으로 황폐화시킬 때 협력했다. 909년, 유수프는 공식적으로는 이베리아 왕국의 일부이지만 실재로는 아쇼트 쿠히[1]가 자체적으로 다스리고 있던 삼츠헤와 자바케티아를 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912년에는 크벨리 요새를 포위 공격했다. 고브론이 이끄는 133명의 조지아 민병대는 끝까지 항전했으나 결국 생포되었다. 그는 이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몸값을 지불하려 했지만, 유수프는 이들을 가차없이 처형했다.
914년, 유수프는 아르메니아로 쳐들어갔다. 숨바트 1세는 압하지야로 피신했다가 도중에 아다르나세의 군대에게 체포되어 유수프에게 넘겨진 뒤 피살당했다. 그 후 아다르나세는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젊은 아쇼트 2세가 왕관을 획득하는 걸 막고 숨바트의 삼촌이자 최고 사령관 아쇼트를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삼았다. 아쇼트 2세가 이에 맞서 아르메니아 산악 지대에서 저항하자, 그는 군대를 파견해 아쇼트 2세와 맞서게 했다. 그러나 그는 유수프의 강력한 힘을 두려워해 915년 압하지야 왕 게오르기 2세와 동맹을 맺고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아르메니아로 진군해 유수프를 따르는 아랍인들을 몰아내고 아쇼트 2세의 아르메니아 왕 즉위를 용인했다.
921년경 아르메니아 왕 아쇼트 2세와 함께 동로마 제국, 압하지야와 연합하여 아바스 왕조의 지배를 거부했다. 그런데 압하지야 측이 아쇼트 2세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민 사실이 밝혀지자, 그는 아쇼트 2세와 연합하여 압하지야 왕 게오르기 2세와 전쟁을 벌였다. 한편, 918년 타오 상류 일대의 공작으로 취임한 구르겐 2세는 아르메니아 귀족 아바스 바그라투니와 동맹을 맺고 아다르나세, 아쇼트 2세에 대항했다. 그는 922년 구르겐 2세를 물리쳤지만, 구르겐 2세는 이에 개의치 않고 힘을 더욱 키웠다. 아다르나세의 통치 말기에 가르드만의 왕 사삭 세바다가 쳐들어왔지만, 아다르나세는 아쇼트 2세의 도움으로 그를 물리쳤다. 한편, 그는 통치 말기에 왕국 전역에 수많은 교회를 세웠다.
923년 숨을 거두었고, 장남 다비트 2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베리아 왕을 칭했다. 동로마 제국은 차남 아쇼트 3세를 하류 타오 공작으로 세웠고, 셋째 아들 바그라트 1세에게 마기스테르 칭호를 수여하고 상류 타오 공작으로 선임했다. 넷째 아들 숨바트 1세 역시 훗날 이베리아의 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