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고바르드 국왕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font-size: 0.95em; letter-spacing: -1.4px" | 알보인 | 클레프 | 아우타리 | 아길루프 | 아달랄트 |
아리알트 | 로타리 | 로달트 | 아리페르트 1세 | 페르타리트 고데페르트 | |
그리말트 | 가리발트 | 페르타리트 | 알라히스 | 쿠닝페르트 | |
리우페르트 | 라긴페르트 | 아리페르트 2세 | 안스프란트 | 리우프란트 | |
힐데프란트 | 라치스 | 아이스툴프 | 데시데리우스 | }}}}}}}}}}}} |
랑고바르드 18대 국왕 Aripert II | 아리페르트 2세 | ||
제호 | 한국어 | 아리페르트 2세 |
라틴어 | Aripert II | |
생몰 년도 | 미상 ~ 712년 | |
재위 기간 | 701년 ~ 712년 |
[clearfix]
1. 개요
랑고바르드 왕국 18대 국왕.2. 행적
랑고바르드 왕국 17대 군주 라긴페르트의 아들로, 701년 말 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한 뒤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아버지에 의해 폐위되었던 리우페르트가 감옥에서 탈출한 뒤 지지자들을 끌어모아 정변을 일으켜 왕위를 되찾았다. 그는 코모 섬으로 피신한 뒤 추종자들을 끌어모아 반격에 나섰고, 파비아에서 리우페르트의 추종자들을 물리치고 리우페르트를 감옥에 수감한 후 왕위에 복귀했다.그러나 리우페르트의 지지자인 베르가모 공작 로타리트는 그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702년 왕을 자칭했다. 이에 베르가모로 진격한 그는 격렬한 공방전 끝에 베르가모를 함락시키고 로타리트를 체포한 뒤 노예와 전쟁 포로에게 실시하는 행위인 머리와 수염을 깎는 조치를 내린 후 토리노로 이송시킨 후 곧 죽였다. 리우페르트 역시 억류되어 있다가 목욕 중에 익사했다. 리우페르트의 후견인이었던 안스프란트는 가까스로 탈출했지만, 그의 아내와 자녀들은 신체 절단형을 받았다. 그는 베르가모 공국의 권한을 축소하고 믿을 수 있는 측근을 관리인으로 삼았다. 얼마 후 프리울리 공작 코르볼로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가차없이 물리친 뒤 코르불로을 실명형에 처하고 페르모네를 프리울리 공작으로 세웠다.
그는 랑고바르드 왕국을 가톨릭 국가로 삼으려는 정책을 계속해서 수행했으며, 교황 요한 6세에게 본래 교회의 영토였다가 랑고바르드 왕국이 접수했던 코티엔느 산맥을 반환하는 등 교황과 우호 관계를 맺고자 했으며, 잦은 내란으로 흔들리는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이지 않고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파울 부제에 따르면, 그는 초기에는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뒤 나라를 평화롭게 다스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또다른 반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인간 불신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는 비밀 요원들을 왕국 전역에 보내 반란을 꾸미는 자가 있는지 철저하게 감시하게 했다. 또한 보물을 가능한 한 챙기면서도, 외국 사절을 맞이할 때 거칠고 바느질을 잔뜩 한 옷을 입고 맞이해, 그들이 자기가 자긴 보물을 탐내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다.
712년 초, 안스프란트가 바이에른에서 군대를 모집한 뒤 이탈리아로 쳐들어왔다. 그는 즉시 이에 맞섰고, 양자는 그해 3월에 맞붙어서 해질녘까지 이어졌다. 전세는 어느 한쪽으로 쉽사리 기울어지지 않았고, 안스프란트가 동원한 바이에른 용병대는 막대한 손실에 동요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그런데 그는 승패가 판가름나지 않았는데도 파비아로 철수해 버렸고, 이를 비겁한 행동이라고 여긴 병사들이 그를 등져버렸다. 아리페르트 2세는 프랑크 왕국으로 망명하고자 파비아에서 달아났지만, 티키누스 강을 건너던 중 등에 짊어지던 보물에 짓눌리는 바람에 익사했다. 그 후 안스프란트가 랑고바르드 왕국의 새 군주로 등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