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상원 임시의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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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하원의장 |
<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아서 반덴버그 Arthur Vandenberg | |
본명 | 아서 헨드릭 반덴버그 시니어 Arthur Hendrick Vandenberg Sr.[1] |
출생 | 1884년 3월 22일 |
미국 미시간 그랜드래피즈 | |
사망 | 1951년 4월 18일 (향년 67세) |
미국 미시간 그랜드래피즈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NNNcm, NNkg, 혈액형 |
가족 | 이름 (관계) |
학력 | 학교명 학부명 (학과명1 · 학과명2 / 재학 여부) |
종교 | 종교 |
직업 | 정치인 |
소속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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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정치인.2. 생애
1884년 미시간 주에서 네덜란드 이민자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1906년, 불과 22세의 나이로 신문사의 발행인이자 주필이 되어 이름을 알렸다. 그는 후일 엄격한 보수주의자로 유명해지지만 정작 신문사 발행인일 당시에는 진보주의자였으며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칭찬하기도 했다.[2] 그는 명연설가로 유명했으며, 1차대전 참전 독려 캠페인을 벌이며 더욱 유명해졌다. 수차례나 미시간 주지사나 상원의원직을 제의받은 반덴버그는 마침내 1928년 상원의원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반덴버그는 허버트 후버를 지지했으나 그가 대공황에 너무 유약하게 대처한다고 생각해 실망했고, FDR이 당선되자 1차 뉴딜정책에 대부분 찬성하는 진보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노동조합의 권리를 명시하는 등 확연한 좌파적 색체를 보인 2차 뉴딜이 추진되자, 반덴버그는 이에 반대하며 보수연합의 리더로 떠올랐다. 또한 외교 정책에 있어 조지프 나이, 조지 노리스, 로버트 태프트 등과 더불어 고립주의를 지지하였으며, 1차대전 참전이 실수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사실상 겨울전쟁에서 핀란드 원조를 지원하고 일본에 대한 제재안에 찬성하는 것을 제외하면 반덴버그는 거의 모든 문제에 있어 고립주의적 견지를 지지했다. 이런 보수 고립주의적 성향 때문에 그는 공화당 보수파에게서 인기를 얻었고 1936년 대선에서 부통령 후보군으로 제의되기도 했으나 루스벨트의 압승을 예측한 반덴버그는 제안을 거부했다.
1940년 대선에서 토머스 듀이, 로버트 태프트 등과 유력 주자로 꼽혔다. 셋은 다양한 정도의 고립주의자였는데, 전당대회 몇주 전 프랑스가 6주만에 독일에 항복하는 일이 일어나며 공화당 유권자들은 급격하게 고립주의에 회의적으로 돌아섰다. 결국 거의 유일하게 국제주의를 옹호하던 다크호스 후보 웬델 윌키가 지명을 받으며 반덴버그의 대통령 출마는 무산되었다.
이렇듯 고립주의를 옹호한 반덴버그였지만 진주만 사건으로 외교적인 성향이 크게 바뀌게 된다. 그는 "모든 고립주의자들은 진주만에서 죽었다"라는 말을 남겼고 12월 7일 자신의 견해를 급격하게 고립주의에서 국제주의로 바꾸었다. 그는 놀랍게도 2차대전을 가장 열렬히 찬동하는 인물이 되었고, 외교 문제에 있어 루스벨트-트루먼 행정부와 초당적인 협력을 맺었다. 그는 2차대전이 끝난 이후로도 NATO 가입, 국제연합 창설 등 트루먼이 야심차게 추진한 국제주의적 대의를 적극 주도하면서 180도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이후 1948년 대선 후보로도 지목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지명을 받지는 못했고 건강 문제로 인해 1948년 재선에 도전하지 않으면서 정계에서 물러났다. 1950년, 암 진단을 받았고 1년만인 1951년 향년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활동
4. 여담
[1] #[2] 다만 1912년 대선에서는 루스벨트 대신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를 지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