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2 17:24:07

제임스 이스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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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상원 임시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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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하원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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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95대 미합중국 상원 임시의장
제임스 올리버 이스트랜드
James Oliver Eastland
파일:1671px-James_O_Eastland.jpg
<colbgcolor=#001633><colcolor=#F5BD00> 출생 1904년 11월 28일
미국 미시시피 도즈빌
사망 1986년 2월 19일 (향년 81세)
미국 미시시피 도즈빌
재임기간 제92-95대 상원 임시의장
1972년 7월 28일 ~ 1978년 12월 27일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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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엘리자베스 이스트랜드 (결혼: 1932년)
자녀 4명
학력 우드랜드 고등학교 (졸업)
미시시피 대학교 (수료)
밴더빌트 대학교 (편입 / 수료)
앨라배마 대학교 (편입 / 수료)
종교 개신교
의원 선수 7
의원 대수 77[A], 78, 79, 80, 81, 82, 83, 84, 85, 86, 87, 88, 89, 90, 91, 92, 93, 94, 95
지역구 미시시피 클래스 2
소속 정당

약력 미시시피 주 하원의원 (1928~1932)
미국 상원의원 (1941, 1943~1978 / 미시시피)
미국 상원 사법위원장 (1957~1978)
미국 상원 임시의장 (1972~1978)
1. 개요2. 생애3. 비판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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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정치인. 미시시피 주의 연방상원의원을 역임했다. 생전의 별명은 남부의 목소리(Voice of the White South) 혹은 미시시피 정치의 대부(Godfather of Mississippi Politics).

린든 B. 존슨, 리처드 러셀 주니어, 러셀 롱, 스트롬 서먼드 등과 함께 민권 시대의 가장 저명한 남부 민주당원 지도자 중 하나로, 존슨이나 롱에 견줄만큼은 아니어도 치밀한 법안 통과 및 저지 전략으로 악명높았다. 또 강한 인종차별주의 성향 때문에 북부 자유주의자들에게 가장 증오받은 인물 중 하나였다. 특히 같은 미시시피 상원의원으로 30년 넘게 같이 재직한 존 C. 스테니스와는 많은 역사가들에게 미국 사상 최악의 인종주의 상원의원 콤비로 분류되고 있다.

2. 생애

1904년, 목화농장 주인이자 지방검사로 일하던 부유한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들은 대대로 목화농장을 경영하던 노예주였으며, 노예가 해방된 이후에도 흑인을 노동자로 고용해 불공정하게 대우하고 소작인으로 부려먹는 것으로 지역에서 악명이 높았다. 그가 태어난 해인 1904년 인종차별을 일삼던 삼촌 제임스 이스트랜드가 노예 출신의 흑인 노동자 루터 홀버트에게 살해당한 적도 있었다.[2]

제임스 이스트랜드는 목화농장 경영에 관심이 많았지만 정치에 더 관심을 기울였으며, 미시시피 주립대, 벤더빌트대, 앨라배마 주립대 등 여러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3] 이후 지방검사인 아버지의 밑에서 일하며 법학을 배웠고 1928년 24세라는 젊은 나이로 잠깐 미시시피 주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아버지가 은퇴하자, 그는 정계에서 잠시 물러나 목화농장을 인수해 큰 돈을 벌었다. 이 목화농장은 이스트랜드가 죽을때까지 붙들고있었으며, 그때까지 흑인 노동자가 전체 노동자의 절대다수를 차지했다고 한다.

1941년, 미시시피 주의 연방 상원의원 팻 해리슨이 사망하자, 당시 주지사이자 이스트랜드의 아버지의 절친이었던 폴 존슨 주지사는 이스트랜드의 아버지에게 상원의원직을 제의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이를 거절하고 아들에게 상원의원직을 달라고 부탁했다. 폴 존슨은 그 해 치러질 보궐선거에 출마하지 않는 대가로 상원의원직을 받아들이라고 이스트랜드에게 말했고, 이스트랜드는 이 거래를 받아들여 잠깐 상원의원으로 재직하였고 1941년의 상원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지 않았다. 하지만 1년 뒤인 1942년 정규선거에서는 당선자 월 독시 상원의원에 대항해 예비선거 후보로 출마했고, 56%를 득표해 44%인 독시 의원을 제치고 상원의원 후보자로 선출되어 본선에서는 반대자 없이 단독입후보해 당선되었다.[4]

처음에 이스트랜드는 뉴딜 정책을 지지하는 일반적인 남부 민주당원으로 활동했다. 1940년대부터 남부에서 뉴딜에 대한 지지가 떨어졌고 특히 뉴딜을 열성적으로 지지하던 미시시피주의 시어도어 빌보 상원의원이 1940년을 기점으로 뉴딜에 적대적이게 되면서 미시시피에서의 뉴딜을 위해 뉴딜을 옹호할 상원의원이 필요했는데, FDR은 이를 위해 이스트랜드와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이스트랜드 역시 경력 초기에는 연방 프로그램을 옹호하는 등 경제적 좌파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1947년, 트루먼이 NAACP(전미 유색인종 인권 향상 협의회)에서 연설하고 FDR의 민권 프로그램을 확장하는듯한 행보를 보이자, 트루먼에 공개적으로 분노를 표출하고 이듬해의 대선에서는 트루먼을 지지할 수 없으며 그가 낙선하는 모습을 지켜보자며 사실상 스트롬 서먼드 딕시크랫 후보를 지지했다. 이후 그는 다수의 뉴딜 민주당원과 거리가 멀어졌고 인종주의와 보수주의를 옹호하는 행보를 보였다. 다만 1952년과 1956년 대선에서는 동료 존 C. 스테니스와는 달리, 아이젠하워 대신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을 지지했다.

1956년, 동료 남부 상원의원들의 도움으로 상원 사법위원장으로 취임했으며, 은퇴할때까지 이 직위를 유지했다. 상원에서 가장 중요한 상임위 중 하나인 사법위원장 자리에 있으면서 이스트랜드의 권력은 더욱 커졌는데, 특유의 친화력 때문에 남부 상원의원 뿐 아니라 북부 상원의원과도 사적인 친분을 맺으면서 자신이 원하는 법안을 더욱 수월하게 통과시킬 수 있었다. 또 그는 리처드 러셀 주니어, 에버렛 더크슨 등과 함께 매주 정기적으로 술을 먹는 상원의원 모임을 만들어 수많은 상원의원과 친목을 다졌다.[5]

때문에 이스트랜드는 린든 B. 존슨과는 스타일이 약간 다르긴 했지만[6], 100여명에 달하는 상원의원들의 개인적인 성향을 파악하고 이를 토대로 법안 통과나 상임위 배정과 관련해 협상하는데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다. 테드 케네디가 초선 의원으로 당선되었을 때, 이스트랜드가 상임위 배정에 관해 조언한 일화를 보면 이스트랜드가 어째서 남부 상원의원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의원이었는지 얼핏 알 수 있다.
(...) 이스트랜드 상원의원의 보좌관이 나를 보고 싶다고 전화를 걸었다. 당장 오라는듯 해서 서둘러 그의 사무실로 향했다. 이스트랜드는 나를 웃으며 반겨주었다.
"버번과 스카치 중 어느걸 마시겠나?"
뜻 밖의 질문이었지만 나는 스카치를 마시겠다고 답했다. 이스트랜드가 몸을 뒤로 기대고 술잔을 돌리며 말했다.

"음, 자네가 뭘 원하는지 알 것 같아. 내 생각이 맞는지 볼까? 자네 지역구인 보스턴에는 이탈리아계 사람이 많지. 그렇지 않나?" 이스트랜드는 내가 답하기 전에 스스로 답해나갔다. "그렇지, 보스턴에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많아. 케네디 가문의 사람들은 언제나 이민이나 이탈리아인 같은 문제에 얘기하곤 하지. 자네도 마찬가지일거야... 자네가 들어갈 첫번째 상임위는 그래서 이민위원회일세."
나는 가까스로 "세상에... 좋습니다" 하면서 술잔을 들었다. 하지만 한 모금 삼키기도 전에 머리카락이 곤두설 만큼 독한 남부식 술이라는걸 깨달았다. 이스트랜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리자 나는 재빠르게 그의 화초에다 술을 부었다.

자리로 돌아온 이스트랜드는 약간 내 술잔을 보고 의심하다가 술을 다시 부으면서 말했다. "이제 두번째 위원회를 정해야하네. 케네디 가문 사람들은 흑인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지. 자네 이 흑인 문제에 관심 많다는 얘기를 들었어. 자네가 그 일을 처리하도록해. 민권 소위원회에서 일하게나."
"제가요?" 나는 이스트랜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스트랜드는 나와 이야기를 해보지도 않고 내가 선호하는 두 상임위원회를 다 맞춘 것이었다. (...) 나는 이스트랜드에게 도와줘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비틀거리며 일어나 내 사무실로 돌아왔다. 내 사무실에는 매사추세츠에서 온 사람 40여명이 있었는데, 술에 잔뜩 취한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듯 했다. 나는 그들에게 "지금 막... 어... 상임위 배정을 받았어요"라고 말했다.
테드 케네디, <케네디 가의 형제들> 9권 中
하지만 이스트랜드는 이런 자신의 권력을 선한 방향으로만 사용한 것은 아니었고, 자신이 원하지 않는 흑인 민권 관련 법안을 자꾸 방해하며 흑인 민권이 신장되는 것을 막곤 했다. 또 진보적인 연방 대법관이 임명되는 것에도 딴지를 걸어 미국 전역의 보수파를 기쁘게 했다. 연방 대법원의 진보적인 판결에 대해 저항하는 일도 잦았는데, 학교 내에서 공개적인 기도를 금지한 판결에 불복해 남부민주당원과 함께 손을 잡고 항의하는 성명을 냈고, 1956년 브라운 판결에 반발하는 "남부 서한"에도 서명하였다. 경제적으로도 보수적으로 기울어서, 말년에는 노동자들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연방정부가 사업체를 감독하는 법안에도 반대했다.[7]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서는 정작 민주당 주류의 입장에 동조하는듯한 모습도 어느정도 보였다. 대법원장 임명에 관해서도 에이브 포터스나 서굿 마셜 같은 일부 인사를 반대하긴 했지만 사사건건 진보적 대법관 임명에 반대하지는 않았고, 민주당 주도 사법위원회가 3차례나 닉슨의 대법관 인준을 저지시키는 것도 막지 않았다. 워터게이트 사건 때는 닉슨과 개인적인 친분 때문에 탄핵에는 반대 의사를 표했지만, 정작 사법위원회가 닉슨을 수사하는 것에는 크게 반항하지 않았다. 사법위원장이라는 엄청난 직책을 가지고 있는[8] 이스트랜드가 매번 민주당과 진보파에게 불리한 의사처리 진행을 했다면 미국 사회의 진보가 최소 10년은 뒤쳐졌을 것이며, 이스트랜드 본인도 민주당 지도부에 의해 자리를 잃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자신의 신념에 앞서 권력 보신을 하고자 한 이스트랜드의 성향 때문에 민주당 지도부는 1978년 그가 은퇴할때까지 사법위원장 자리를 그에게 맡겼고, 이스트랜드는 거대 석유기업체, FBI, 공화-민주 양당의 상원의원들과 좋은 관계를 쌓으며 부와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물론 개인적인 성향은 극렬 인종주의에다 극보수파였기에 사적으로는 망언을 자주 남겼으며, 오늘날까지 비판받는 이유가 된다.

1972년 대선에서는 닉슨을 지지했으며, 양당의 지지를 받으면서 상원의 사실상 의장이라 할 수 있는 임시의장 직위를 맡는 영광을 누렸다. 그는 상원 임시의장직을 1978년 은퇴할때까지 맡으며, 상원 내 최고 권력자의 지위로 올라섰다. 1976년 대선에서는 지미 카터를 지지했다. 카터와도 좋은 사이를 유지하다가, 고령의 나이를 이유로 1978년 상원에서 은퇴하였다.

3. 비판

미국 상원에서 가장 노골적인 인종주의자였다. 그는 흑인과 백인이 서로 다른 종류의 인간이라고 믿었으며, 나치 독일의 우생학을 열성적으로 지지했다. 그가 초선의원이었던 시절인 1944년, 이스트랜드는 법적인 인종 분리를 옹호하며 "백인은 우월한 인종이고 흑인은 열등한 인종이기에 두 인종은 분류되어야한다"라는 망언을 했다. 또 1954년 브라운 판결로 흑백 인종분리가 철폐되자, "오늘 헌법은 대법원에서 죽었다. 이것은 당파적이고 정치적인 결정이기에 남부에서 이 법률을 따를 이유는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인종차별이 북부의 발명품이라고 주장했으며, 인종분리가 이루어지는 남부에서는 흑인이나 백인이나 두 인종이 모두 행복하고 평등하게 살아간다는 망언을 남기기도 했다.

이 성향은 죽을때까지도 고쳐지지 않았는데, 1969년 로디지아를 시찰하러 갔을 때에는 로디지아의 백인우월주의 정권에 감동해 그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문화적 조치"를 격찬했다. 로디지아의 어느 호텔이 흑백 분리를 철폐했다고 하자, 속상해하며 "로디지아 같은 위대한 곳에서 더러운 검둥이들을 받아들이려고 한 것은 큰 비극"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극렬한 반유대주의자이기도 했는데, 유대인 상원의원 제이콥 재비츠에게 "나는 너희 종족을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막말을 했고, 존슨 대통령이 임명한 에이브 포터스 대법관의 인준을 거부하며 "지난번에는 검둥이가 대법관으로 임명되었는데[9] 또 유대인놈이 대법원장이 되면 내가 무슨 낯으로 미시시피로 돌아가겠나"라고 말했다.

이스트랜드는 정경유착과 해외 독재자와의 친분으로 비판받았다. 그는 미시시피의 석유업체와 언제나 좋은 관계를 유지했는데, 테드 케네디는 오후 5시 쯤 되면 이스트랜드가 법안 파일이 아니라 미시시피 유정 지도를 보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FBI의 비밀 파일에 의하면 그는 도미니카의 독재자 라파엘 트루히요에게 수백만 달러의 불법 뇌물을 받고 트루히요를 여러번 의회에서 찬양하는 말을 남겼다. 정작 이스트랜드는 존 에드거 후버 FBI 국장과 친분이 있었기에 죽을 때까지 이 일로 기소되지 않았다.

4. 여담

  • 여러 인종주의적인 행보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인품은 전형적인 남부인으로, 누구와고도 친해질 수 있는 사교력 만렙의 사내였다. 그는 존 C. 스테니스, 스트롬 서먼드, 허먼 톨미지, 로버트 버드 같은 남부 인종주의자들과 주로 친했지만, 상대당 소속인 리처드 닉슨, 에버렛 더크슨이나 북부의 진보파 상원의원인 월터 먼데일, 패트릭 레이히, 테드 케네디, 필립 하트, 조지 맥거번(!!!!!)과도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다. 린든 B. 존슨과는 민권 문제 때문에 충돌할 때가 많았지만, 존슨과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였으며[10], 존슨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자주 존슨의 텍사스 목장에 방문하며 존슨과 끈끈한 우정을 유지했다.
  • 현 미국 대통령인 조 바이든과도 상당히 친한 사이였는데, 그 둘의 관계는 마치 아버지와 아들과 같았다고 한다. 이스트랜드는 초선 상원의원인 바이든이 위원회 배정을 위해 사무실을 찾았을 때 "흑인 민권을 위해 여기에 왔다"라고 하자 "그런 태도면 다음 선거는 낙선할걸세"라고 했지만, 정작 시간이 지낸 다음에는 친해져서 농담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바이든이 먼 훗날 이 일화를 공개하며 자랑하자 흑인 상원의원인 뉴저지의 코리 부커 의원은 "그런건 자랑할만한게 아니다. 이스트랜드의 그 농담은 끔찍한 인종주의 입에서 나온 것인데 제정신이면 그런걸 자랑할 수가 없다"라며 바이든을 비판했고, 여러 주류 진보언론도 바이든의 발언을 비판했다. 이 때문인지, 2024년 대선을 앞두고 바이든은 존 C. 스테니스, 로버트 버드, 이스트랜드 등 자신이 친하게 지낸 인종주의 상원의원과 관련된 일화는 일체 언급하지 않고 대신 휴버트 험프리, 테드 케네디 등 북부의 진보적인 상원의원과의 일화를 더 많이 언급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A] 전임자 팻 해리슨 사망으로 인해 미시시피 주지사에 의해 대체 상원의원으로 임명.[2] 그의 아버지는 이 흑인 노동자를 린치하기 위한 부대를 조직했으며, 자신의 동생 이름을 따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3] 다만 학위를 따지는 못했다.[4] 당시 미시시피에서는 흑인의 투표를 금지해버렸기 때문에 너무 민주당 세가 강해서 공화당이 10% 이상 득표하지도 못했고, 민주당 공천만 받으면 그냥 당선인 수준이라 경선이 본선보다 더 치열했다.[5] 술꾼으로 유명했던 테드 케네디가 이 모임에 거의 매주 출석했으며, 필립 하트 같은 사람들은 모임에 참석하긴 했지만 남부 인종주의자들이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은근한 따돌림을 당했다. 그럼에도 이스트랜드 자신은 필 하트와 꽤 괜찮은 관계를 유지했다.[6] 존슨이나 러셀 롱이 특유의 우람한 체구에서 나오는 압박감 + 각 의원의 약점을 쥐고 협박하는 스타일이었다면 이스트랜드는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천천히 의원들을 설득시키는 스타일이었다.[7] 이는 자신의 이권이 달린 일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스트랜드의 목화 농장은 흑인 노동자를 싸게 부려먹는 것으로 악명 높았다.[8]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상임위가 미리 법안 심사를 하고 여기서 통과된 안건이 본회의 표결에 부쳐진다. 때문에 미국 의회에서 상임위가 가지는 힘은 엄청나다.[9] 서굿 마셜을 의미한다.[10] 존슨의 절친이자 그의 스승이라 할만한 리처드 러셀 주니어가 1960년대에 존슨과 민권 문제로 크게 다툰 후 절교한 것과는 대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