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7-23 09:51:44

아흐마드 알 만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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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hmad al-Mansur(أحمد المنصور السعدي)
(1549 ~ 1603)

1. 소개2. 엘 바디 궁전3. 창작물에서의 등장

1. 소개

파일:모로코 중세사.png
아흐마드 알 만수르의 영토

모로코의 베르베르 계 왕조인 사드 왕조 (샤리프 왕조)의 제 7대 술탄. 무함마드 앗 셰이크의 다섯째 아들. 재위 기간은 1578년부터 1603년까지이며, 별명은 승리왕과 황금왕 등이 있다. 전자는 포르투갈에 대한 승리에서, 후자는 말리 정복으로 얻은 금으로 순금 주화를 발행하며 얻은 별명이다.

어린 시절에는 오스만 제국에서 볼모 생활을 했으며, 형 아부 마르완 압둘 알 말리크 1세를 도와 모로코의 왕이었던 아브 압둘라 무하마드 2세를 폐위하고 형을 즉위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1578년 8월 4일에 아브 압둘라 무하마드 2세가 복수하기 위해 포르투갈 아비스 왕조의 국왕 돈 세바스티앙과 연합하여 공격하자 알카세르키비르 근처의 와디알마크하진에서 형인 아부 마르완 압둘 알 말리크 1세와 함께 5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아비스 왕조의 군사 2만 3천명을 격파해 돈 세바스티앙과 아브 압둘라 무하마드 2세를 전사시켰다.[1]

전쟁의 승리로 승리의 아흐마드라 불리게 되었으며, 형인 아부 마르완 압둘 알 말리크 1세가 전쟁 직후에 중병으로 사망하면서 술탄이 되었다. 포르투갈과의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엘 바디 궁전을 건설했다.

1590년에 송가이 제국을 공격했고 원정 도중에 전염병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1591년에 톤디비 전투에서 승리해 송가이 제국의 가오, 팀북투, 젠네 등을 점령할 수 있었다.

당시 에스파냐와 영국은 미묘한 관계에 있었는데 이 양국간의 감정을 잘 이용하여 스페인의 땅을 얻기도 했고, 오스만과의 경계부근에 성곽을 쌓으며 침략을 대비하는 동시에 궁정이나 군대로 하여금 튀르키예식 복색을 하게 하고 터키어를 사용하게 함으로써 전쟁을 피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외교의 달인. 각국의 언어도 능숙하게 사용했다고 한다.

2. 엘 바디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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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의 업적은 단순히 여기서 끝나지 않고 중동 건축의 역사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길이 130 미터에 아라베스크 양식으로 호화롭게 지어진 이 궁전은 당대 아랍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건축물 중 하나였다. 그러나 사디 왕조의 몰락과 수없는 전란 등의 이유가 겹쳐 지금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유적일 뿐이다. 마라케시를 찾는 역사 덕후라면 둘러볼만하다. 하지만 폐허 덕후라면 이쪽이 더 좋을지도?

3. 창작물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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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 마이어문명 5에서 모로코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그리고 실제 역사처럼 호구인 송가이 따윈 손쉽게 털어버릴 수 있다. 가라 베르베르 기병대!


[1] 이 전투에서 포르투갈군은 8천이 전사하고 1만 5천이 포로가 되었다. 돈 세바스티앙은 전사했고 아부 압둘라 무하마드 2세는 도주하다가 강물에 빠져 익사한다.세바스티앙 1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아 후사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2] 평생 수도사로 살았던 삼촌 엔히크 1세가 환속 후 포르투갈 국왕에 올랐지만 2년만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이후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가 주앙 3세의 딸 마리아 마누엘라의 남편인 점을 근거로 삼아 포르투갈 왕위를 겸임하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동군연합이베리아 연합이 결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