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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006127><colcolor=#ffffff> 출생 | 1792년 3월 18일 |
|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 |
| 사망 | 1860년 4월 26일 (향년 68세) |
|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 |
| 국적 | |
| 재임기간 | 제5대 총리 |
| 1836년 4월 20일 ~ 1836년 9월 10일 | |
| 제14대 총리 | |
| 1842년 2월 9일 ~ 1846년 5월 20일 | |
| 제18대 총리 | |
| 1851년 4월 26일 ~ 1851년 5월 1일 | |
| 제21대 총리 | |
| 1859년 5월 16일 ~ 1860년 4월 26일 | |
1. 개요
안토니우 조제 드 소우자 마누엘 드 메네지스 세베림 드 노로냐는 왕실 ‘친족 대우’까지 받은 인물로, 자유주의 시대 포르투갈의 핵심 장군이자 정치가. 군사·정치 모두에서 당대 최중요급 인물로 평가된다. 자유왕정 내전의 영웅에서 출발해, 이후 보수 성향 자유주의파인 카르티스타의 절대적 지도자로 자리잡았으며, 훗날 재건당(Partido Regenerador)[1]의 기반을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정통 상급 귀족 출신답게 온갖 궁정직을 거쳤다. 마리아 1세의 모슈 피달구[2], 주앙 6세의 기병대장등이 있었고, 군 경력으로는 야전사령관, 포르투갈군 총사령관을 맡은 바 있으며, 행정쪽으로도 국무위원, 상원 의원을 역임했을 뿐 아니라. 권력의 정점인 총리직을 네 번이나 맡았다. 또한 아조레스 제10대 총독으로서 자유왕정 내전 초기 ‘앙그라 섭정정부’를 이끌었다.
2. 생애
2.1. 유년기
1792년 3월 18일 리스본 아호이우스 저택단지[3]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시 포르투갈 최고 부자 중 하나였던 빌라 플로르 6대 백작 안토니우 지 소우자 마누엘 지 메네지스 세베림 지 노롱냐, 어머니는 발리 드 헤이스 6대 백작의 딸 마리아 조제 지 멘도사이다. 왕국의 ‘그랑데’ 신분[4]으로, 포르투갈에서 가장 부유하고 오래된 봉토 귀족가 가운데 하나의 적통 상속자였다.1795년, 그가 두 살밖에 안 됐을 때 아버지가 사망했고, 빌라 플로르 백작 작위와 막대한 재산을 그대로 승계했다. 그 재산은 토지·부동산은 물론 수많은 영지 수입과 각종 수익으로 구성돼 있었다. 그가 이어받은 부동산 수익만 해도 페레이라의 성모 마리아궁전, 칼벨루의 성 페드루영지, 카소우라도의 성 티아구영지, 피게이라의 성 비센테영지 등이 있었고, 여기에 아버지가 받아야 했던 연금도 여러 개였다. 가문이 보유하고 있는 리스본 어시장 관리소(almoxarifado do pescado)에서만 이미 막대한 수입을 벌어들이고 있던 다이아몬드 수저의 보유자였다.
초 상류층의 생활을 항상 곁에 두고 자랐던, 당대 상급 귀족들이 밟던 전형적 교육과정을 거쳤다. 핵심은 군사 기술과 정치 수업이었다. 그런 흐름 속에서, 1797년에 겨우 네 살 나이로 그리스도 기사단의 사령관 작위를 받았고, 1804년 7월 25일, 열두 살에 노사 세뇨라 다 루스 수도원기사단의 수도기사 서약을 했다.
한편, 1802년 2월 10일, 아홉 살 나이로 4기병연대 사관후보생으로 입교했고, 1807년 6월 24일 초급장교로 진급했다. 바로 이 계급을 달고 있던 1807년 11월 20일, 장 안도슈 주노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가 포르투갈에 진입하며 제1차 프랑스 침공, 즉 이베리아반도 전쟁이 촉발됐다.
프랑스 측에 복종하길 거부한 어린 노로냐는 군에 사표를 던졌고, 당시 포르투갈군 총지휘관이었던 알오르나 3대 후작 페드루 조제 지 알메이다의 명령으로 즉시 승인되었다.
2.2. 이베리아 반도전쟁 참전
프랑스군이 포르투갈에서 쫓겨나자마자, 노로냐는 이전 계급 그대로 군에 재입대했다. 1809년 12월 6일 중위로 진급했고, 1811년 1월 23일에는 4기병연대 5중대장이 되었다. 이 시기 동안 반도전쟁 각 전선에서 적극적으로 참전했다.1811년 8월 5일, 사부고자 후작의 딸이자 자신의 사촌인 마리아 조제 두 리브라멘투 이 멜루와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포르투갈 상급 귀족 핵심 가문들과의 정치·가문 연계를 더욱 공고히 했다. 그러나 1813년에 찾아온 아들은 그만 생후 15개월 만에 사망했다.
이후 수젤 1대 자작 안토니우 조제 드 미란다 엔히크스 장군의 명령참모(ajudante de ordens)로 복무했다. 그리고 1813년 3월 26일부터는 당시 원정 중인 영국군 소속 윌리엄 베레스퍼드 원수 휘하로 이동해 그 아래에서 복무했다.
이후 소령으로 진급했고, 반도전쟁 각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승전 소식을 리스본에 직접 전달하는 영예도 그에게 맡겨졌으며, 포르투갈에 주둔하고 있던 웰링턴 공작도 당시 섭정이던 주앙 6세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활약을 강하게 칭찬했다.
포르투갈 승전의 특사로 귀환한 리스본에서 뜨거운 환영을 받았고, 곧바로 중령(1813년 8월)으로 진급했다. 이러한 초고속 진급이 계속되었는데, 반도전쟁이 끝난 뒤 22세였던 1815년 10월에 대령으로 진급하게 된다.
2.3. 브라질 체류
전쟁이 끝난 뒤, 젊은 노로냐는 당시 포르투갈 왕실이 머물고 있던 리우데자네이루로 떠나, 상급 귀족으로서 자신에게 배정된 궁정 자리를 맡기로 했다. 1817년 브라질로 향했으며, 그때 파견된 부대는 페르남부쿠 반란(일명 페르남부쿠 혁명) 진압 지원 목적이었다. 해당 원정에서도 적극적으로 참전했다.그랑파라(Grão-Pará)의 총독 겸 대장군(capitão-general)으로 임명되었고 1820년까지 그 직을 맡았다. 하지만 1818년 7월 20일, 브라질까지 동행했던 아내가 열사병으로 그곳에서 사망하고 만다.
1817년 파라(Párá) 기병대를 창설했다. 본부는 상주제 수도원에 두었고, 초대 지휘관은 기병대 소령 조아킴 마리아누 지 올리베이라 벨루였다. 같은 해 장교·병사 군복 규정도 직접 제정했다. 이듬해인 1818년, 파라 지역 경찰대(Corpo de Polícia) 도 창설했다.
1820년 당시 '바이아 지 토두스 오스 산투스' 총독직에 동일하게 임명되었으나, 실제로 부임하지는 않았다. 1821년 4월 26일, 왕실 궁정 신하신분으로 주앙 6세와 함께 귀국선에 올랐기 때문이다.
한편, 출항 직전인 1821년 4월 23일 두 번째 혼인을 했다. 신부는 발리 지 헤이스 8대 백작이자 루렐 1대 후작인 아고스티뉴 도밍구스 지 멘도사 롤링 지 모우라 바헤투의 딸, 마리아 아나 루이사 필로메나 지 멘돈사였다. 이 결혼으로 루렐 가문과 정치적·가문적 동맹을 맺었고, 훗날 1대 루렐 공작 누누 조제 세베루와 함께 포르투갈 정치를 이끌 핵심 축이 된다.
2.4.
리스본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본국이 자유주의 격변기에서 흔들리고 있었고, ‘포르투갈 국가의 상·하원 합동 제헌의회(Cortes Gerais e Extraordinárias)’가 한창 활동 중이었다. 이 혼란 속에서 주앙 6세가 다시 포르투갈 정치로 복귀하는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다.이 시기 그는 전형적인 상급 귀족들의 행보를 따르듯, 헌정주의에 대해 다소 모호하고 양가적 태도를 보였다. 제헌의회가 왕에게 강제로 요구한 입헌군주국선서 역시 못마땅하게 여겼고, 새로 돌아온 왕실 가족에게 가해진 대우를 불경(lesa-majestade)에 가까운 모욕으로 보고 있었다.
그 사이 정국은 급속히 망가졌다. 1820년 자유혁명 이후 세워진 체제가 흔들릴 정도로 반(反)자유주의 반란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1823년 2월, 빌라 레알 지역에서 아마란트 백작 프란시스쿠 다 실베이라 장군이 헌법에 반기를 들고 군대를 일으켰고, 트라스-우스-몬트스 지방은 거의 통째로 이에 가담했다. 5월에는 빌라 프란사 드 시라에 주둔한 제 23보병연대가 절대왕정을 지지하며 봉기했고, 리스본의 몇몇 육군연대들도 미겔 1세을 앞세워 뒤따랐다. 노로냐도 이때는 왕당파 쪽에 서서 참여했다.
당시 그는 포르투갈 육군준장이었고, 왕당파와 가까웠던 덕에 곧장 소장으로 진급하였고, 미겔 1세가 포르투갈군 총사령관직을 받았을 때 참모를 겸직했다. 초기 자유주의 시대의 다른 주요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노로냐의 정치 입문은 절대주의 권리 회복에 기여하는 방향에서 시작됐다.
1823년, 왕당파가 그에게 보낸 또 하나의 신뢰 표시가 있었다. 노로냐는 스페인으로 파견되어 외교 사절 역할을 맡았는데, 페르난도 7세의 절대군주정을 복구하러 온 프랑스의 앙굴렘 공작 루이 안투안 다르투아를 공식적으로 예방하는 임무였다.
그런데 이 시점 이후 그는 점점 자유주의 쪽으로 움직였다. 결정적 계기는 1824년 2월, 장인이자 루렐 1대 후작이었던 인물이 미겔 1세파에게 암살당한 사건 때문으로 추정한다. 그때부터 그는 공개적으로 헌법파에 합류했다.
그래서 1824년 4월 30일 벌어진 미겔 1세의 쿠데타에 참여하지 않았고, 그 결과 미겔 1세은 그를 페니슈 감옥에 처넣었다. 이 구속이 곧 자유주의 진영 완전 합류를 확정짓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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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겔 1세의 쿠데타가 실패하고, 면직·추방돼 빈으로 망명하자, 노로냐는 자연스럽게 풀려났고 군 직위도 복구됐다. 그런데 복귀 후 그의 위치는 꽤 미묘했다. 자유주의자들과, 주앙 6세의 ‘양도 불가한 왕권’을 고수하는 보수파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난해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1826년 3월 10일, 주앙 6세가 사망하자 이 갈등은 다시 폭발 직전으로 치달았다. 기존의 잠복 대립이 점점 노골적 충돌로 바뀌며, 정국은 빠르게 험악해졌다.
섭정 페드루가 브라질에서 1826년 헌정헌장(Carta Constitucional)을 발표하고 포르투갈의 페드루 4세로 즉위하자, 왕국 최상귀족 신분이던 노로냐는 그 해 4월 30일자로 상원 의원(par do Reino)에 임명되었다.
헌장이 반포되고 며칠 뒤인 1826년 5월 2일, 페드루 4세는 딸 마리아 다 글로리아에게 왕위를 물려주며 즉위시켰다. 이때 그녀는 일곱 살이었고, 페드루는 정치적 봉합을 노린 조치로 “장차 나이가 되면 삼촌 미겔 1세과 결혼시킨다”는 조건을 붙였다.
그 사이 상황은 순식간에 폭주했다. 미겔을 옹립하려는 반란이 불붙듯 나라 전역으로 번졌다. 7월 26일, 브라강사 주둔 제 24보병연대가 먼저 봉기해 미겔을 추대했고, 곧바로 2연대, 그리고 에스트레모즈·알메이다·빌라 레알·빌라 포우사 드 아기아르의 수비대들이 연달아 들고 일어났다. 미뉴·트라스오스몬트스·베이라스·알렌테주 지방 대부분의 민중도 여기에 합류했다.
이런 상황에서, 1826년에 알렌테주 주(州) 군사 총책(governador das armas)으로 임명됐던 노로냐는 곧바로 그 지역에서 벌어진 여러 반란을 진압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알가르브 주둔군도 비슷한 분위기로 들썩였고, 정부는 궁지에 몰려 영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영국군 한 사단이 도착하자, 진정은커녕 오히려 국민적 반감만 더 키웠다. 노로냐는 이 때 브리가데이루 안토니우 타바리스 마제시가 이끌던 반란군을 격파하고, 그 잔당을 스페인으로 도주하게 만들었다.
노로냐는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테주강 북쪽으로 이동해, 베이라스 지역에서 작전 중이던 프란시스쿠 드 파울라 드 아제레두 테이셰이라 드 카르발류 장군의 부대와 합류했다. 동시에 트라스오스몬트스에서 소규모 사단을 이끌고 내려오던 브리가데이루 안토니우 조제 클라우디누 피멘텔의 병력도 합쳐졌다.
세 장군이 베이라 지방에서 집결하자, 이들은 규모가 훨씬 큰 미겔파 군대를 상대해야 했다. 스페인 정부의 묵인 덕분에, 포르투갈에서 패배해 스페인으로 도망간 미겔파 부대가 억류되지 않고 그대로 무장을 유지한 채 국경 근처에 풀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포르투갈군에 쫓겨도 다른 지점에서 다시 나타나 계속 싸움을 이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로냐의 지휘 아래의 병력은 절대주의 세력을 격파했고, 북진군했다. 그런데 이전에 무찔렀던 그 미겔파 부대가, 이번엔 미뉴 국경을 다시 넘어 재유입되면서 자유파 군대에 꽤 큰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그러나 노로냐의 병력이 도착해 안제자 후작의 부대와 합류하자 전세는 바뀌었다. 자유파는 샤베스 1대 후작 마누엘 다 실베이라 장군이 지휘하던 미겔파군을 프라두 다리와 폰티 다 바르카 시가에서 연달아 격파했고, 결국 적을 갈리시아로 도주하게 만들었다. 이 승전의 보상으로 그는 빌라 플로르 후작(Marquês de Vila Flor) 작위를 받았고, 1827년 8월에는 포르투 군사 총책(governador das armas do Porto)에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