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무오(武五) |
본관 | 순흥 안씨[1] |
출생 | 1873년 12월 22일[2] |
경상도 성주목 운곡방 금암동 (현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가암1리 금암마을)[3] | |
사망 | 1951년 5월 14일[4] |
경상북도 대구시 (현 대구광역시) | |
묘소 | 대구광역시 북구 칠곡지구 동산(東山) |
국립서울현충원 위패 48판-8면-130호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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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안해용은 1873년 12월 22일 경상도 성주목 운곡방 금암동(현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가암1리 금암마을)에서 아버지 안시규(安時奎, 1843. 3. 3 ~ 1901. 2. 4)와 어머니 진주 정씨(1840 ~ ?) 정기일(鄭基一)의 딸 사이의 3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그는 1913년 3월 12일[5]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통화현(通化縣) 강산(崗山) 두도구(頭道溝)[6]로 망명했고, 1917년 봄에 다시 봉천성 동변도 유하현(柳河縣)[7] 제2구(第二區) 다화쇠(多花釗)로 이주했다.
그러다가 1920년 음력 12월, 그는 조선으로 귀국하려고 했으나 돈이 궁하여 이웃에 거주하던 광복군사령부 참리부장(參理部長) 조병준에게 조선으로 돌아갈 여비를 빌리려 했다. 이때 조병준은 그에게 자신은 광복군사령부의 참리부장이며, 일찍부터 국권의 회복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며 그가 조선에 돌아가게 되면 독립운동을 위해 응분의 힘을 다해달라고 말하며 입대를 권유하자, 이에 안해용은 즉석에서 수락하여 입대했다.
이어서 그는 참리부장 조병준 및 사령장(司令長) 조맹선 명의의 신임장 각 1통을 받고 경상남도·경상북도 특파원에 임명되어 경상남도와 경상북도 내에서 광복군사령부에 파견할 장정을 모집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으며, 모집한 장정을 파견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게 할 때에는 반드시 김옥명(金玉明)이라는 자와 협의하도록 설명을 받고 돌아갈 여비로 50원을 받았다.
1921년 2월 2일[8], 그는 봉천성을 출발하여 조선에 잠입하는 데에 성공했다. 며칠 뒤에는 평안북도 의주군 수진면 운천동(현 의주군 수진리)에 있던 김옥명의 집에 도착했고, 그를 만나 차후에 자신이 조선에서 모집하여 광복군사령부에 파견할 장정들을 어떻게 압록강을 건너게 할 지에 대해 협의하고는 곧 성주군의 고향 마을로 돌아갔다. 이후 선산군 구미면 진평동(현 구미시 진평동)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음력 4월에는 경상북도 대구부에 있던 서상일의 집에 가서 서상일에게 광복군사령부의 설립 목적을 말한 다음, 조직에 파견할 장정의 모집을 위해 힘써 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그해 음력 7월 칠곡군 지천면 신리에 있던 예수교회당에서 이덕생(李德生)·이수건(李壽健)을 만나 광복군사령부의 설립 목적을 말하고 가입할 것을 권유하여 수락을 얻어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압록강을 건너는 데에 필요한 암호를 주어 김옥명의 도움을 받아 광복군사령부에 성공적으로 파견하였다.
같은 달 안동군 안동면 예수교회당으로 가서는 교회 장로 김모(金某)를 만나 장정 모집을 위해 힘써줄 것을 부탁했고, 1922년 11월 24일[9]에는 상주군 상주면 예수교회당으로 가서 목사 김동필(金東弼)에게 장정 모집을 위해 힘써줄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1922년 11월 23일 상주경찰서에 체포되었는데, 체포 당시 순사에게 '우국지사를 인치(引致)함은 부당하며 너는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동포를 고통케 함은 매국노 불충자(不忠者)'라고 말했다고 하며 경상북도경찰부로 압송되던 도중에도 성주군 성주면 및 칠곡군 왜관면 왜관리 왜관나루터 등지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는 이후 경상북도경찰부에서 취조를 받다가 같은 해 12월 20일 송치되었다.
그리고 1923년 1월 2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고, 이후 1년 6개월 1일로 감형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대구시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1년 5월 14일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안해용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8년 11월 16일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
[1] 양공공파-사직공파 25세 용(容) 항렬.[2] 순흥안씨대동보 7권 566쪽에는 1874년 2월 3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3] 순흥 안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안중달도 이 마을 출신이다.[4] 서울현충원묘적부에는 1953년 6월 24일(음력 5월 14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순흥안씨대동보 7권 566쪽에는 1933년 5월 13일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5] 음력 2월 5일.[6]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시 퉁화현(通化縣) 다촨향(大川鄕) 터우다오거우촌(頭道溝村). 인근에 강산령(崗山嶺)이라는 산이 있다.[7]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시 류허현(柳河縣).[8] 음력 1920년 12월 25일.[9] 음력 10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