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6 21:56:30

안화사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의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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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태조 대: 안화선원2.2. 예종 대: 정국안화사2.3. 이후
3. 주요 건축
3.1. 들어가는 길3.2. 재궁(齋宮)3.3. 무량수전3.4. 능인지전3.5. 선법당3.6. 미타전


安和寺

1. 개요

고려의 왕립 사찰 중 하나. 개성시 송악산 자하동에 있다. 고려 태조 신성대왕(왕건)이 지었고, 이후 고려 예종 문효대왕(왕우)가 증축했다. 특별한 점은 두 왕족의 원찰이었다는 것과 고려 - 북송 간의 친선외교의 상징이었다는 것이다.

2. 역사

2.1. 태조 대: 안화선원

안화선원(安和禪院)은 태조 재위 13년 차인 930년 8월에 지은 선종 계열 사찰로, 태조의 사촌인 왕신(王信)을 위한 원당이다.

왕신은 후백제에 인질로써 가 있었는데, 고려에 있던 후백제 인질 진호(眞虎)가 병으로 죽자 후백제는 고려가 고의로 진호를 죽인 것으로 간주, 926년 4월에 왕신을 죽인다.

927년 1월, 왕신의 시체를 담은 관이 고려로 전달됐고, 3년 뒤 태조는 안화선원을 지어 왕신을 추모한다. 이후 안화선원은 기록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2.2. 예종 대: 정국안화사

한참 뒤인 예종 재위 13년 차인 1118년 4월에 안화선원은 정국안화사(靖國安和寺)로 이름이 바뀌고 크게 증축된다.

예종은 숙종명의태후의 원찰인 천수사를 지은 뒤, 자신 소유의 사찰도 지었다. 1117년부터 공사가 시작됐고, 고려사에서 비난할 정도로 증축을 크게 했다고 한다. 중간에 농사철을 맞아 공사를 중단하기도 하는 등 시간을 들였다가 1118년에 드디어 완공한다.

예종은 안화사 건설을 북송과의 외교에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던 듯 하다. 당시 재위 중이었던 북송 황제 휘종은 예종에게 직접 쓴 국서와 안화사의 본전 '능인지전(能仁之殿)' 액호를 써 주었다. 또 북송의 최고 권력자였던 채경은 안화사 정문 편액 ‘정국안화지사(靖國安和之寺)’을 써 고려로 보냈다고 한다. 거기다 북송에서 제작된 십육나한(十六羅漢)의 소상(塑像)까지 전달했다. 이에 예종도 직접 쓴 국서를 북송에 전달했다.

예종의 2번째 왕후 문경태후는 1118년 9월에 죽었다. 2년 뒤인 1120년에 태후의 원당을 안화사로 옮겨, 안화사는 문경태후의 원찰이 된다.

2.3. 이후

고려가 멸망한 후 폐사찰이 되었다. 1930년 옛터에 승려 김만영이 시주를 얻어 다시 중창한 뒤 31본산(本山) 중 전등사(傳燈寺)의 말사가 되었다. 1945년 38선이 그어지고는 38선 바로 이북에 위치하였으나, 송악산 남록에 위치한 절의 특성상 정작 출입구는 38선으로 막혀있었다.

1989년에는 북한의 문화보존총국에 의해 오백성전·칠성전 등이 복원되었다. 2015년에 북한이 독일의 지원을 얻어 다시 보수하였다.#

3. 주요 건축

안화사는 고려도경에도 상세히 등장하는데, 이는 북송승려서긍이 자기 황제가 편액을 써준 사찰을 빼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려사엔 안화사 건축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며, 이하 기록은 모두 고려도경에 남아있다.

파한집 권중에도 안화사에 관한 기록이 있다. 봉성(鳳城)[1] 북쪽에 있었으며 세간에선 '연하동 선인(烟霞洞 仙)이 실제로 거주하는 곳'이라 찬양했다고 한다. 또한 영평현 백작 윤관의 아들인 상국 윤언이가 이 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3.1. 들어가는 길

  • 다리
    안화사 앞엔 강이 있어 이를 지나갈 다리가 있다. 다리를 건너면 올라갈 큰길을 중심으로 양옆에 청헌정(淸軒亭)과 연의정(漣漪亭) 두 정자가 있다.
  • 산문각(山門閣)
    양옆에 소나무 숲이 조성된 산길을 오르면 산문각이 있다. 산문각을 지나면 안화문이 있다.
  • 안화지문(安和之門) / 정국안화지사(靖國安和之寺)
    안화사의 대문. 이 문의 편액은 채경(북송)이 썼다. 서쪽엔 냉천정(冷泉亭)이 있다. 고려도경은 대문 편액에 '안화지문'이라 쓰여져 있다했지만, 고려사엔 채경이 보내준 대문 편액은 '정국안화지사'라 쓰여져있다고 기록되있다.
  • 자취문(紫翠門)
    안화사의 2번째 문. 안화사에서 자고 있던 윤언이가 꿈속에서 호종단[2]을 만났는데, 그가 자취문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읽었다고 한다.
다섯 구름 깊은 곳이 내 고향이니,
연기가 올라오는 누대는 오랬동안 있었다.
되돌아보니 왕년의 오랜 친구는,
지금도 꿈 속에서 힘들어 하는구나.
- 파한집 권중 中.
  • 신호문(神護門)
    안화사 3번째 문. 문 동쪽엔 제석상(帝釋像)이 세워져 있었고 서쪽엔 향적당(香積堂)이 있었다. 신호문을 지나 서쪽으로 가면 재궁이, 북쪽엔 무량수전이 있다.

3.2. 재궁(齋宮)

재궁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임금이 타지에서 거주할 임시 궁궐'을 한자어로 재궁이라 한다. 안화사 서쪽에 있는 궁궐로 국왕이 오면 머무는 곳이다. 안화사 재궁엔 임금이 있을 전 하나, 각 하나, 정자 하나가 있었다. 극도로 화려해 서긍은 "마치 병풍 안에 있는 듯하다"며 질투했다.
  • 심방문(尋芳門)
    안화사 재궁으로 가는 문.
  • 응상문(凝祥門)
    안화사 재궁으로 가는 마지막 문. 인수전의 전문이다.
  • 인수전(仁壽殿)
    안화사 재궁의 정전.
  • 향복문(嚮福門)
    인수전의 북문. 만월대에 같은 이름의 문이 있었다.
  • 제운각(齊雲閣)
    향복문 뒤에 있는 각.
  • 안화천정(安和泉亭)
    제운각 뒤에 있는 정자.
  • 어화원(御花園)
    파한집에 등장하는 장소. 아마 제운각과 안화천정이 있는 장소를 말하는 듯 하다.

3.3. 무량수전

無量壽殿

신호문을 지나면 있는 전각. 전각명을 보면 아미타불을 모신 것으로 보인다. 무량수전을 중심으로 양옆에 누각이 있다. 동쪽엔 양화루(陽和樓), 서쪽은 중화(重華樓)이다.

이 전각을 기준으로 길이 갈린다. 동쪽엔 신한문, 북쪽엔 선법문, 서쪽엔 효사문이 있다.

3.4. 능인지전

能仁之殿

북송 황제 휘종이 직접 전각의 편액을 썼으며, 고려도경 기록엔 전문 편액까지도 휘종이 쓴 것이라고 한다. 휘종이 준 십육나한소상도 이곳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 신한문(神翰門)
    능인지전의 전문.

3.5. 선법당

善法堂

선법문을 지나면 나오는 당.
  • 선법문(善法門)
    선법당의 당문.

3.6. 미타전

彌陁殿

효사문을 지나면 나오는 전.
  • 효사문(孝思門)
    미타전의 전문.

이상이 서긍이 기록한 안화사 건축에 관한 기록이다.
[1] 만월대의 별칭.[2] 胡宗旦. 북송 출신 귀화인. 고려사에 본인 열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