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4월 20일[1] ~ 1998년 10월 9일[2] (향년 46세)
1. 개요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가이자 재야정치인이었으며, 종교는 불교이다.2. 생애
1952년 4월 20일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월오리 584번지에서 아버지 안홍식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65년 용궁국민학교(53회), 1968년 용궁중학교(17회), 1971년 용산고등학교(22회), 1984년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정치학과(77회)를 졸업하였다.고려대학교 재학 시절이던 학원자율화 추진위원장, 민주화청년회 집행국장 등을 역임하며 민청학련 사건, 인천 5.3 운동 등으로 구속되기도 했고, 고려대학교 졸업 후에는 한 때 승려로 출가하기도 하였다. 이후 민주개혁정치모임 상임이사를 역임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경상북도 예천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자유당 유학성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유학성이 재산 공개 파동으로 국회의원직을 사임하자 치러진 1993년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경상북도 예천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자유당 반형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경상북도 문경시·예천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한국당 황병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소속 정당인 통합민주당이 신한국당과 합당할 때 따라가지 않고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지내게 된다.
1998년 10월 9일 오전 7시에 신길동 올림픽대로와 노들길 사이 뚝방길에서 한 직장인이 출근길에 양 발목이 허리띠로 묶이고 머리에 심한 타박상을 입고 숨져 있는 안희대를 발견하였고, 1시간 뒤 신고 받은 경찰이 출동하여 소지품을 통해 사망이 확인 되었다. 미궁에 빠진 사건 해결을 위해 그해 11월 4일 KBS2 공개수배 사건 25시에 '사라진 11시간'이라는 제목으로 방송되었으며, 행적이 확인되지 않은 시점부터 사망추정 시간까지 11시간의 공백을 주변인의 증언과 그의 행적을 토대로 다각도로 분석하였지만,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았고 결국 2013년 공소시효가 만료되면서 영구미제로 남게 되었다.[3]
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92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 경북 예천 | | 7,477 (18.64%) | 낙선 (3위) | |
1993 | 1993년 재보궐선거 | 경북 예천 | 6,226 (35.40%) | 낙선 (2위) | [4] | |
1996 |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 경북 문경·예천 | | 3,587 (2.32%) | 낙선 (6위) |
4.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990 - 1991 | 창당 정계입문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91 - 1992 | 탈당 |
| 1992 - 1995 | 입당 |
| 1995 - 1997 | 합당[5]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97 - 1998 | 탈당[6] |
[1] 선거관리위원회 후보자 정보에서 확인[2] 경찰 추정 사망 시점[3] 부검소견으로 뇌를 싸고 있는 지주막하의 출혈 및 숨골타격으로 즉사하였고, 혈중 알코올 농도는 0.26%의 만취상태로 위속 음식물은 전부 소화되어 있어 최소한 사망 6시간 전까지는 술을 마시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안희대의 마지막 행선지는 올림픽대로와 노들길에서 가까운 여의도 쪽인 것으로 보인다. 그의 사망 원인을 놓고 가설이 있는데 첫번째는 면식범에 의해 사건현장 근처에서 살해되고 유기했을수도 있다는 말도 있고 두번째는 인근 불량배들하고 싸우다가 살해되었을수도 있다는 추측이다.[4] 전임자 유학성 의원직 사퇴[5] 개혁신당과 신설 합당[6] 한나라당과의 합당 반발로 탈당.